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20화
520화. 전설로 남을(9)
무신을 간단하게 정의하라면, 딱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지극히 미국다운 히어로 무비.’
그리고 애초에 그렇게 기획이 된 시리즈였다. 그러나 그거로는 부족했다. 주요 타깃층 자체가 미국이 아닌, 동아시아의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인 코믹스 시나리오 팀은 미국의 히어로 영화에 열광하는 한국 팬을 사로잡기 위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그 나라에서 가장 먹히는 ‘코드’를 과감하게 써먹었다.
그게 바로, 그들의 우상이다.
아이돌을 뜻하는 우상 말고, 말 그대로 우상. 혹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
그 우상은 꽤 된다.
3부작 영화로 제작된 이순신 장군부터, 드라마로 자주 나온 세종대왕까지, 그래서 그들은 이 두 존재 말고, 다른 영웅을 찾았다. 한국인 주인공으로 써먹어야 하는, 압도적인 무력을 연결해야 하는 존재를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몇 달간 뒤진 끝에 찾을 수 있었다.
고려 무장 척준경.
제대로 된 정보는 많이 없지만, 그래도 가히 일세를 풍미했던 무장이다. 그 일대기를 본 코믹스 시나리오 팀은 곧장 이거다! 하고 전율했다.
강력한 무력.
원하던 것이다.
기초 캐릭터 설정을 짤 때, 한국인 캐릭터지만, 지극히 미국스럽게 만들려고 했었다. 그래도 본진인 미국 팬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척준경은 미국이 좋아하는 마초적인 캐릭터로 조형하기에 딱 좋았다. 하지만 한국인을 저격하려면,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특히 요즘은 여성 팬들을 끌어당기지 못하면, 그 캐릭터는 실패한 캐릭터가 된다.
미블의 미국대장이나, 강철사나이, 그리고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만든 토르가 성공한 것은 여성 팬심을 저격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자기를 지켜줄 것 같은 강력한 느낌을 주면, 여성 팬들도 충분히 움직인다는 것을 이미 보았기에 그렇게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캐릭터가 한국 캐릭터다.
애초에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을 짜려면, 초기 시나리오가 너무 꼬이게 된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초기 뼈대 중의 하나가, 캐릭터는 ‘완벽한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걸 이미 세워둔 상태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했냐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한국인이 깊이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국에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말이 있고, 그 말의 뜻은 누가 봐도 한국인이지만, 국적이 다른 사람을 향한 멸칭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즉,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렇기에 캐릭터는 완전한 한국인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만드는 캐릭터 또한 한국인이 깊이 공감하고, 그들이 환호하는 트렌드에 따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조화가 맞는다면서.
무신 척위준은 이런 느낌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기에 지영이 모르는 얘기가 있었고.
지영은 그걸 의외의 인물에게 듣고 있었다.
“헙, 정말요?”
주피터 레인.
레인 스튜디오의 주인인 그의 말에 지영은 정말 놀랐다.
“맞네. 우린 이미 자네가 루이비통 일을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주목했네. 그리고 천천히 작화를 수정했지. 아마 찾아보면 알게 될 거야.”
“…….”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우리 레인 스튜디오는 다니엘 화이트와 계약을 맺기 전부터. 아니, 훨씬 이전부터 한국에서 척위준을 맡아줄 배우를 물색하고 있었네. 하지만 80점 이상을 넘긴 배우는 아무도 없었지. 애초에 캐릭터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어. 문무의 겸비. 한국은 그렇게 말한다지? 진짜 강한 남성적인 느낌과 선은 부드러우며 지적인 느낌이 동시에 있어야 했으며, 그 두 가지의 조화로 독특한 중성적 매력까지 겸비해야 할 것. 이게 조건이었으니 눈에 차는 배우가 어디 쉽게 나오겠나. 그래서 포기해야 하나 할 때,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음…….”
“자네는 최고지. 이미 그때도 세계 최고 수준의 운동 실력을 갖추고 있었어. 그건 곧 강함이지. 그런 자네에 대해 알아보니 공부를 아주 잘했더군? 운동을 병행하면서도 학업으로 유명한 명문 하이스쿨에서 중상위권을 유지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으니.”
찰랑이는 호박색 버번위스키로 목을 축인 주피터 대표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문무는 거기서 검증됐지. 자네의 지적인 이미지를 이미 대중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넬 강력하게 추천한 친구들은 자네의 이미지를 가장 높게 평가했어. 특히 예인? 거기서 보여준 자네의 나른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에 푹 빠졌지. 그게 자네 첫 작품인 걸 감안하고 보면, 그 친구들이 그렇게 난리를 친 것도 이해가 가. 보고받고 찾아본 나에게도 인상적이었으니까.”
“하하…….”
“그래서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했네. 작화를 천천히, 자네의 느낌으로 틀어간 거지. 아주 길게 호흡을 줘서. 당시에는 이미 시리즈 스케줄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여유가 제법 있기도 해서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고 들었네. 그 결과 최근 코믹스의 척위준은 자네와 제법 높은 싱크로를 자랑하고 있지.”
“만약 제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우린 레인이네. 어떻게든 설득했을 거야.”
“…….”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리고 지영도 촬영에 임하면서 최근화까지 다 봤다. 그때도 나랑 좀 비슷하네? 하는 느낌을 받긴 받았다. 하지만 그땐 자기가 이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으니, 그것 때문에 그냥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줄 알았다. 이런 비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스토리는 미국스럽지. 하지만 캐릭터는 지극히 한국적인. 그걸 원했는데, 아주 잘 뽑혔어. 자네가 잘해준 덕분이지. 고맙게 생각하네.”
“제가 감사하죠. 이곳에서는 아무런 성적도 없는 저게 큰 배팅을 해준 거니까.”
독대.
지영은 시사회가 끝나고 레인 스튜디오의 회장인 주피터 레인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는 촬영장에도 한 번 나타난 적이 없었다. 회장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해서가 아니라. 아니, 그런 이유도 있지만 자기가 등장해 압박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믿는. 그런 행동을 보여줬다.
게다가 그는 사고가 좀 트여 있었다.
주피터 회장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자였다. 10대에 미국으로 넘어와, 작은 햄버그 가게에서 일을 해 돈을 모아 신발샵을 열었고, 거기서 다시 돈을 벌어 주식 시장으로 돌진, 믿기지 않는 성공 신화를 그때부터 써 내려갔다.
30대에 백만장자가 된 그는, 50대에는 손에 꼽히는 거부가 되었고, 그때 코믹스를 차렸다.
그가 레인 스튜디오를 창립한 계기는 간단하며, 아주 묵직했다.
미국으로 이주해서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위로가 된 게 바로 미블과 DG 코믹스의 만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류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레인을 묵직하게 운영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런 그가 딱 한 번, 이런 자리를 부탁했다. 심지어 다음 스케줄도 있으면서, 그걸 미루면서까지. 그래서 지영은 받아들였다.
임은진도 없이, 이런 사람과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지만, 지영은 주피터 회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지영에 대한 배팅은 주피터 회장의 결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그걸 통 크게 질렀다.
그것 말고도 고마운 마음은 있다.
무신 척위준은 좋은 작품이었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30분간이나, 진짜 역사서에 등장하는 사진까지 써가면서 그쪽 섬나라가 극렬히 들고 일어날 게 예상이 되는데도 허락한 것도 주피터 회장이었다.
최종 각색본은 당연히 주피터에게도 올라간다.
만약 거기서 반려당했으면, 지금 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동서양의 조합. 혹은 조화. 지영은 이 작품을 그렇게 평가내렸다.
‘정말 미국스러운 시나리오와 전개인데 그 중심엔 너무나 한국스러운 캐릭터.’
잘 빠졌다.
특히 의상이 정말 잘 빠졌다.
지영은 주피터 회장과 헤어져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면서, 오늘 시사회를 통해 본 최종 편집본을 생각했다.
미국의 히어로 무비는 쉽게 말해 기승전결이 굉장히 뚜렷하다.
위기, 갈등, 고뇌. 그리고 그걸 시원하게 이겨내고, 박살 내는 스토리. 히어로 액션 무비의 중점은 결국은 ‘재미’였다. 즉, 통쾌함의 크기가 작품의 흥행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 통쾌함을 주기 위해 시나리오와 미술, CG, 연기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영이 보기에 그 전부가 한곳에, 아주 잘 담겼다.
혹자들은 얘기한다.
다니엘 화이트는 디테일한 디렉션과 편집의 천재라고. 그는 촬영 내내 지영에게 디테일한 디렉션을 집요하게 선보였고, 지영은 최대한 거기에 맞춰 연기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은 이 바닥에 익숙하지 않은 지영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다.
“잘 되겠다.”
“응?”
불쑥 뱉은 혼잣말에 옆에 앉은 임은진이 고개를 들며 되물었고, 지영은 아니에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둠이 진 LA 도심을 달리고 달려 뒤풀이 장소에 도착한 지영은 2시간이나 지났을 텐데도 여전히 멀쩡한 제임스와 제니퍼에게 끌려다니며, LA 마지막 일정을 소화했다.
초대받은 사람이 제법 됐고, 모두가 자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건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영은 그냥 담담히 사람들과 인사하고 뒤풀이를 즐겼다.
한국의 뒤풀이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뒤풀이다. 애초에 파티라고 하는 게 맞는 느낌이다. 편한 차림이 아니라, 한껏 치장한 상태로 진행하는 뒤풀이. 드레스 코드까지 있을 정도다. 그래서 지영도 평소에는 거의 입지 않는 수트를 입었다.
그래선지, 불편했다.
술이 좀 들어오자 쉬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거기에.
“지영은 외국인에겐 관심 없나요?”
가슴골이 훤히 파인 미니 드레스를 입고 은근히 자기를 어필하는, 이름 모를 배우 때문에 더더욱. 미국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니, 이건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공통이다. 다만 미국이 한국보다 그런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데 좀 더 자유롭다. 그런데 그런 문화 차이를 이해한다고 해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지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어……. 그렇군요.”
꾸벅.
모를 리가 없을 거다. 지영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건 결국 뺏겠다는 의미고, 지영은 그걸 시도조차 못 하게 막았다. 후, 숙소로 돌아가고 싶지만, 시간이 애매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더 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번 스케줄은 이게 끝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영은 짐을 풀고, 다시 쌌다.
안에 있던 걸 전부 빼고, 운동복 위주로 전부. 자주 싸는 거라, 익숙하게 짐을 싼 지영은 그리웠던 한식을 마음껏 먹었다. 어차피 내일 다시 선수촌에 들어가면, 2주간 쌓였던 것들을 뽑아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입촌.
친구들과 만나 같이 선수촌에 들어간 지영은 짐을 풀고, 센터부터 찾았다. 몸이 좀 무거워서 일단 땀을 좀 뽑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영의 옆으로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2주간 가벼운 운동에 익숙해진 근육이 놀라지 않게.
30분은 그렇게 달렸다. 그리고 5분마다 속도를 조금씩 올렸다. 확실히 몸이 무겁긴 했다. 호흡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걸 견뎌내야 한다. 내일 새벽부터 속에 든 걸 전부 게워내고 싶지 않으면.
1시간을 달리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입촌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이튿날 월요일부터는 다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어차피 다들 훈련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기정 감독을 비롯한 코치들은 그저 훈련에 집중시키는 역할만을 맡았다.
그리고 시작 첫 주의 훈련은 본격적이었으나, 하드한 훈련은 아니었다. 선수가 훈련에 적응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주말을 맞이한 지영은 미팅이 있으면 항상 이용하는 카페로 외출을 끊고 나섰다.
도착하니 임은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 지영아. 아고, 또 일주일 만에 홀쭉해졌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진짜로 그 정도는 아니다.
그저 2주간 낀 기름기만 뽑은 정도에 불과하다. 임은진의 건너편에 앉자, 그녀는 바로 스케줄 표를 전달했다.
미국에서 시작해 유럽을 돌고, 마지막 한국을 도는 시사회 일정.
빡빡했다. 심지어 유럽은 하루에 두 군데 나라를 도는 일정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피터 회장과 다니엘의 의지 때문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이 결과물을 대중에게 선보이고 싶은.
“좀 빡빡한데, 괜찮아?”
“그럼요. 빨리 끝내고, 빨리 훈련에 전념하고 싶어요. 오히려. 그래서 기꺼운데요?”
“그래?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그럼 이대로 간다고 진행한다?”
“네.”
출국은 다시 다음 주고.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