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19화
519화. 전설로 남을(8)
LA에 도착한 지영은 찌뿌둥한 몸을 잠시 풀고, 가장 늦게 내렸다. 스튜어디스의 각 잡힌 인사를 같이 일일이 인사해 주면서 내린 지영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 천천히 움직였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심사를 받고 나오자, 레인 스튜디오에서 보낸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피켓을 들고 있어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강. LA에 다시 온 걸,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독특한 인사다.
지영은 그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고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다행히 예전에도 썼던 곳이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였고, 일단 짐을 풀고 잠시 휴식했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손님이 들이닥쳤다.
제임스 드류모어와 제니퍼 진이었다.
둘은 무신을 찍는 동안, 연인으로 발전했다. 제임스 드류모어가 한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이혼을 겪었지만, 제니퍼 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본 것도 같다. 그리고 둘은 올겨울에 결혼식 올린다. 그런 둘이 저녁에 숙소를 찾았다.
“헤이, 지영. 하하! 오랜만이야!”
“반가워요, 제임스.”
제임스는 유쾌함이 가득한 미소로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더니 지영을 안았다. 무신 척위준에서 호흡을 잠시 맞췄고, 앞으로 시즌3에도 종종 등장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추적자 시리즈에서도 앞으로 호흡을 맞출 예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포옹을 한 제임스가 떨어지자 온화한 미소로 다가온 제니퍼 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회 우승 축하해요, 지영. 멋있던데요?”
“오랜만이에요, 제니퍼. 대회 봤어요?”
“그럼요? 인터넷에서 중계해 주던걸요? 후후, 유도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파이팅한 스포츠인지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어요. 특히, 지영의 스킬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유도를 모르는 제가 감탄했을 만큼.”
“고마워요.”
가볍게 인사 후에, 아직도 어색한 볼키스를 나누고 떨어진 제니퍼 진. 지영은 둘을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임은진이 알아서 마실 거리를 세팅해 줬다. 그런데 그게 심상치 않았다. 제니퍼는 맥주. 제임스는 럼, 그리고 지영은 음료수다. 이 둘이 지영이 오자마자 숙소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술이다.
한동안 무신을 같이 찍으며, 지영은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애주가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단순히 애주가 정도가 아니지…….’
애주가이면서, 엄청난 술고래들이었다.
특히 제니퍼는 정말 타고난 건지, 맥주로 시작해 독한 버번위스키를 한 병을 작살내고도 좀 취할 뿐, 이성을 잃지 않는다. 지영은 같이 어울렸다가 다음 날 숙취로 진짜 고생한 뒤에 절대로 제니퍼의 속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후후, 지영은 술이 약하네요?
‘하고 도발해도 절대로…….’
절레절레.
속으로 고개를 저은 지영은 쓴웃음을 숨기고는 제임스를 잠시 바라봤다. 제임스도 제니퍼와 비교하면 조금 약할 뿐이지, 속도를 조절하면 위스키 한 병은 가뿐하게 날린다. 그러니 제임스와도 술잔을 나눌 땐 조심하는 게 좋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두 사람은 가끔 지영을 도발해도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애주가인 만큼, 자기 주량에 맞춰 술을 마시는 철칙을 세워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두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게 생각보다 부담스럽진 않았다.
“오, 은진. 고마워. 역시 우리 마음을 잘 안다니까?”
“어디, 한두 번 봤어야죠.”
한숨을 내쉬며 임은진이 지영의 옆에 앉았다. 이 둘은 가끔이지만, 어떤 지령이라도 받았는지 지영을 자신들이 찍는 다른 작품에 섭외하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것도 술을 마시고. 다행히 임은진이 얘기 중에 들어와 앉으며 눈치챘기에 불발로 끝났었는데,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시도했다. 그래서 두 사람과 술자리를 할 때는 언제나 임은진이 함께하게 됐다. 두 사람은 그런 임은진을 싫어하지 않았다.
자기 배우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넘어, 그녀의 모습에선 배우를 향한 ‘헌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배우는 오직 연기만을 보게 하고, 매니저인 자신이 팀과 함께 연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바쳐주는 모습은 제니퍼와 제임스가 감탄까지 했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무신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뒤풀이를 할 때, 자기 매니저로 와주면 안 되냐고 제니퍼가 공개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였다.
지영이 제작자나 연출가, 작가들에게 유명해졌다면 임은진은 철저한 케어로 반대로 배우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임은진이 함께하는 술자리를 두 사람은 절대 싫어하지 않았다.
“저는 시차가 좀 있어서, 조금 있다가 마실게요. 아직 속도 허하기도 하고요.”
“좋지. 음, 2차 내부 시사회가 내일모레니까, 오늘은 밤늦게까지 달려보자고.”
“하하.”
지영은 제임스의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지영이 웃고 말자, 제니퍼가 갑자기 킁킁, 코를 벌렁거리며 주방을 돌아봤다. 조금 전부터 나기 시작한 냄새 때문이었다. 무슨 냄새냐고? 라면…… 냄새다. 스프를 타는 순간 침샘이 터지기 시작하게 하는 마약 같은 냄새에 제니퍼가 대번에 반응하고 있었다.
반짝.
제니퍼가 시선을 임은진에게 돌리며 눈을 빛냈다.
“은진?”
“제니퍼 거예요. 기대하고 왔을 거잖아요?”
임은진의 말에 제니퍼의 눈빛이 대번에 하트로 변했다.
“아…… 사랑해요, 은진. 정말 나랑 함께할 생각 없어요?”
제임스는 라면을 먹지 못했다. 미국인의 입맛엔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매웠다. 하지만 제니퍼는 정말 잘 먹었다. 할렘가에 비슷한 곳에서 자랐기에, 그녀는 안 먹어본 게 거의 없었다. 유년 시절에 쓰레기통을 몇 번이나 뒤졌다고 본인이 얘기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라면은 허들이 높은데, 제니퍼는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라면 냄새만 맡으면 정신을 못 차렸다.
무신 촬영 때, 미국식 식사에 너무 질린 나머지 지영과 임은진, 그리고 스태프들이 커다란 솥을 구해 라면을 끓인 적이 있는데 그 냄새에 홀린 듯이 끌려와 먹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녀의 라면 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면서도 특이한 건, 그녀는 자기가 직접 라면을 구해 끓여 먹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런 특별한 음식은 우연히 먹어야지만 그 의미가 있다나 뭐라나…….’
하여간 누가 여배우 아니랄까 봐, 확실히 정신세계가 독특하다. 잠시 뒤, 스태프가 끓인 라면이 냄비째로 제니퍼의 앞에 대령 됐다.
‘눈을 반짝이며 어설픈 젓가락질로 라면을 건져 먹으며, 입가심으로 버번을 마시는 할리우드 탑 여배우라……. 말해도 안 믿겠지.’
지영은 이어서 나온 저염식 식단을 먹으며 속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임스가 다시 한번 라면에 도전했지만,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하필이면 매운 라면이다. 이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푸라면이라고 읽는. 이건 한국인도 땀을 뻘뻘 나게 하는 라면이다. 불닭면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그렇다고 안 매운 건 절대 아니다. 그런 라면을 어색한 젓가락질로 건져, 후후 불어서 호록, 호록, 면치기를 하는 모습은 처음에 봤을 땐 현실성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이것도 익숙해졌다.
라면은 금방 끝났다.
“후우, 후아. 아아, 이거예요. 이 맛. 사실 너무 못 참겠어서 구해서 먹어본 적 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내가 끓이면 이 맛이 안 나요. 혹시, 라면을 끓이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가요?”
먹방을 끝내며 손수건으로 땀을 콕콕 찍어 닦으며 제니퍼의 말에 지영과 임은진은 물론이고, 근처에서 편히 쉬던 스태프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죽했으면 경호원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웃음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제니퍼.
“어머, 왜 웃죠? 제가 뭐 이상한 말 했나요?”
“아니요.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말이요?”
“라면은 남이 끓여주는 것과 야외에서 찬바람 맞으며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어머, 그래요? 왜 그런 건데요?”
“그건,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 이건 한국에서도 좀 논란이 있었던 문제였다. 왜 대체 라면은 남의 걸 뺏어 먹을 때 제일 맛있을까? 지영은 영어가 이제 익숙해졌지만, 이걸 설명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임은진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오오, 하며 감탄하는 제니퍼.
그녀는 곧 왜 라면이 이렇게 맛있었는지 깨달은 얼굴이 됐다. 그녀 본인이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서 라면을 먹어왔다는 것도 같이 깨달았다. 기대하고 왔고, 기대심리에 충족되는 지금 상황은 그녀가 간절히 먹고 싶어 직접 사다가 끓여 먹었을 때와 다르지 않지만, 장소는 달랐다.
그녀는 거의 촬영 현장에서 먹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한 환경에서 먹는 라면은, 사실 자기관리가 그렇게 철저한 지영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거다.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건 역시 안 먹는다고 했다가, 친구나 가족이 끓여온 라면을 한 젓가락 호로록하는 게 최고고요. 후후.”
“아아, 그래요? 제임스! 오늘부터 라면을 좋아하도록 하세요!”
제니퍼의 말에 제임스는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침통한 표정이 됐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지영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제임스는 비장한 표정으로 라면 국물을 호로록 마시더니, 이내 물 한 병을 싹 비웠다. 그러자 제니퍼는 한없이 아쉬워하며 제임스의 등을 두들겼다.
농담이었다면서.
‘누가 봐도 농담이 아니었는데…….’
물로 혀를 세척하고 나서야 살아난 제임스와 건배를 했다. 지영도 저염식 식단을 다 먹어서, 술잔을 들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시간에 맞춰 작정하고 왔다. 이런 두 사람을 돌려보낼 방법은 지영이 아는 한, 없었다.
그러니 그냥 같이 어울려 주는 게 상책이었다.
“올해 마이클의 연기는 환상적이었어요. 그의 오스카 수상이 충분히 이해가 갔죠.”
“스윈튼의 연기도 마찬가지야. 정말 소름이 돋았어. 절망에 빠진 한 엄마의 감정을 그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할 줄은 몰랐지. 특히 시선 처리와 얼굴 근육을 쓰는 연기는 정말…… 솔직히 가서 배우고 싶었어.”
둘은 할리우드에서 있었던 일을 가볍게 대화의 형태로 지영에게 알려줬다.
그러면서도 지영에게 대화의 참여를 부드럽게 강요했다.
“지영은 지금 연락이 오는 곳이 많죠?”
“네, 그런 거로 알고 있어요.”
“엘르 토크쇼 얘기도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됐어요?”
“그건 하지 않기로 했어요.”
“어머, 왜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결정된 사항이다.
임은진이 예상 질문지를 먼저 받았는데, 생각보다 별로인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그걸 빼주길 바랐는데, 안 된다는 말에 임은진이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일본이랑 중국이 왜 저를 싫어하는지, 그걸 자세히 듣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 후원재단이나, 기부 얘기도 하길 바랐고.”
“이런, 정말 그런 질문지가 왔어요?”
“네, 은진 누나가 빼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대요. 그래서 거절했어요.”
엘르 쇼는 미국에서도 메이저 쇼다.
그래서 나갈까 했는데, 질문이 생각보다 별로여서 지영은 그냥 나가지 않기로 했다. 친구들은 시발탄을 지영이 터뜨려 주길 원했지만, 강한결의 결정으로 이제 인터뷰나 토크쇼도 알아서 나갈 거라서, 크게 문제도 아니었다.
“잘했어요. 음. 그럼 작품 쪽은요?”
“스크립트 보내준 건 전부 읽어봤는데, 아직 확 와닿는 건 없어요.”
“그럼 좋은 작품이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물론이죠.”
좋은 작품.
지영이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경험치를 채워줄 수 있는 작품이라면, 지영도 환영이다. 지영은 해보고 싶은 욕구가 근래 확 폭발하는 중이었다. 자만이고 오만일 수 있지만, 유도와의 이별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오면서도 복사해 폰에 넣은 스크랩트를 잔뜩 읽었다.
그렇게 읽은 게 적어도 100개다.
하지만 그렇게 읽은 작품 절반이 나의 무사님이나 척위준과 비슷했다. 30% 액션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거의 B급이다. 몇 작품은, 에로를 넘어 포르노에 가까운 작품도 있었다. 지영은 키스신까진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베드신을 찍을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배우로서 연기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그래도 싫었다.
그건 지영이 생각하는, 양유진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좋은 작품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어머, 정말요?”
“네.”
하하!
지영과 제니퍼의 대화를 듣던 제임스가 호탕하게 웃더니 할리우드를 싹 뒤져서라도 좋은 작품을 가지고 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작품 얘기가 지나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면서 날이 깊어가다가, 날짜의 숫자가 변했다. 자리는 그때쯤 파했다. 다음 날은 휴식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 뒤, 내부 시사회에 참석했다.
관계자와 배우 포함해서 스무 명이 모인 작은 상영관에서 시작되는 무신 척위준.
시작은 예고했던 대로, 일제의 만행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해적과 침략전쟁부터 시작된 한 나라의 만행으로부터 시작된 무신 척위준은,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에 지영은 직감했다.
이건, 먹히겠다고.
그리고.
어느 한 나라는 입에 게거품을 물겠다는 것도 같이,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