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16화
516화. 전설로 남을(5)
만원 관중이 내뿜는 열기.
준결승이 주는 고양감.
선수들은 본신 실력 이외의 실력까지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준결승에서의 패배와 결승전 진출이 주는 순위 차이는 지독하게 극명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메달도 없는 선발전이지만, 결승 진출은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3차 선발전에서 우승하면, 올해 열리는 아이치, 나고야 아시안 게임을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준결승은 어떤 의미로 7부 능선이었다. 여기서 지면 5부 능선으로 떨어지고, 승리하면 9부 능선에 도달한다.
그걸 모르는 선수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준결승까지 올라온 실력자라면, 유도에 올인하는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는 이 대회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양어깨에 얹힌 절실함까지.
이것들이 한데 뭉치면서, 괴랄할 정도로 강렬한 투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일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본신의 실력 이상을 발휘하게 해준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승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쿵!
잇폰!
남자 60체급의 준결승 첫 게임.
피 튀기는 경기였다. 춘추전국시대라 불리는 체급답게, 작년 1차 선발전에서 준결승에 올라온 선수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했다. 전원이 저번 대회 5위부터, 아예 순위권에 없던 선수였다.
“으아아!”
팡팡!
매트를 내려치며 울분을 토하는 선수는 올해 서른이 된 실업팀의 선수였다. 독종 중의 독종이라고 소문난 선수인데, 그 선수를 꺾은 선수는 이제 고작 고3이 된 선수였다.
전통의 강호 중의 강호 보성이 배출한 천재, 양효걸.
그의 나이는 이제 고작 열아홉 살이다. 만으로는 열일곱이고. 보성중, 고 라인을 타고 올라와 1학년 때부터 이미 고등부를 평정했고, 작년 1차 선발은 아예 출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 대회에 준결에 올라온 걸로도 모자라, 결승전에 올랐다. 문제는 두 선수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게 난다는 점이었다.
고3이면 피지컬은 물론 실력 또한 여물지 않았을 나이다. 그런데 양효걸은 그런 차이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실업팀의 선수는 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었고.
잔인한 거다.
운도 아니고, 4분 게임 전부 하고 연장전에서 한판을 뜬 거니까 실력으로 졌다고 봐야 했기에 더더욱, 잔인한 거다.
소망과 열망.
그걸 들어줄 신은 아주 냉정하게 승자에게 손을 들어줬다. 66을 넘어서, 73까지도. 지영은 간절한 표정의 상대를 고작 1분 만에 허리껴치기 한판으로 제압해 버렸다. 지영에게 패배한 선수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 선수 또한 간절함이 가득한 선수였다.
나이 서른둘.
이제 선수로서 황혼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문을 두들겨왔다. 하지만 지영을 포함한 이우진, 구혁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번 대회에 처음으로 준결승까지 올라왔지만, 이번에도 강지영이란 벽을 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동정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포츠계는 야생 그 자체니까.’
약육강식.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다. 오롯이 그 혼자 모든 것을 가지는 개인 종목이기에, 더더욱 심했다.
그렇기에 지영은 동정할지언정, 그 이상으로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악수까지 하고 밖으로 나온 지영은 대기실로 바로 가지 않고, 준결승 B게임을 지켜봤다.
구혁과 장범의 준결승전이다.
이긴 사람이 결승에서 지영과 붙는데, 일단 구혁은 스타일이 이미 굳은 상태라 크게 전과 바뀌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장범은 달랐다. 몇 달간 못 본 사이, 장범은 이제 결승까지 진출할 정도의 강자가 됐다.
지영의 방어 유도를 가장 성공적으로 카피한 선수.
거기에 요즘은…….
‘독자적인 스타일까지 입히기 시작했어.’
장범의 신장은 지영과 거의 비슷하다.
거기에 팔다리 길이까지도. 그렇기에 지영의 스타일을 카피하기 아주 좋은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지영은 사실 자신과 같은 선수가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방어 유도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에 마이너하기 때문이고, 실제로 이걸 이지적으로 써먹을 정도로 멘탈이 단단한 선수도 보기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범이 등장했다.
지영은 장범이 어떻게 카피했을까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저 신체 조건이었다. 기본적으로 팔이 길어야 했다. 그래야 상대에게 먼저 깃을 주고도 상대의 깃을 잡는 게 가능하다.
장범은 지영만큼이나 팔이 길었다.
다만, 상대의 깃을 후속으로 잡는 게 조금은 늦었다. 이 찬스를 그냥 놓칠 구혁이 아니기에, 그는 곧장 털면서 장범을 흔들었다. 하지만 장범은 침착하게 다시 팔을 뻗어 구혁의 어깨 깃을 잡았다.
조건 두 번째가 저거다.
깃을 못 잡았다고 허둥지둥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깃을 거칠게 뜯어내지 않는 것 말이다. 그렇게 하면, 방어 유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게 좋다. 왜? 전자의 경우는 높은 확률로 지도고, 후자의 경우는 일반 유도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먼저 깃을 줘도 뒤이어 바로 잡거나, 바로 잡지 못했어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상대의 깃을 잡는 게 중요하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연달아 잡기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공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상대에게 지도를 주거나 그러진 않지만, 적어도 지도를 혼자만 받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지도를 받더라도, 최소한 같이 받아야 했다.
이기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절대적이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시합 중에도 이성적인 사고 판단이 필수 불가결했다. 그런데 유도는 말했듯이, 초근접 운동이다. 레슬링이나 씨름만큼이나 근접에 붙어서 경기한다. 그렇기에 이성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다.
1부터 10까지 전체를 이성적으로 직관하지 못하고, 몸과 정신에 거의 낙인처럼 새겨 놓은 체력, 기술을 통해 승부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실력이 비슷하면 할수록 더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지.’
그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악물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를 어떻게든 넘기려고 악을 쓰다 보면 이성 따위는 깔끔하게 로그아웃한다. 거의 본능에 의지해, 경기를 풀어가는 단계가 되는 거다. 그렇게 이지적인 게임을 하던 선수도, 동급의 선수와 붙으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지영은 반대였다. 지영은 동급의 선수와 붙어도 냉정한 사고 판단이 가능했다. 오직 한 선수. 미야모토 신지와 붙을 때만 많은 걸 내려두고 순수한 본능에 의지해 게임을 풀어나간다. 그런데 그때도 완전히 이성을 놓진 않는다. 최소한 잘못된 판단을 막을 정도의 이성을 남겨둬야 하기 때문이다. 억지 기술, 수를 잘못 파악한 공방을 막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이성은 필수였다.
지금 경기가 그랬다.
장범에게도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잡기 직전까진 여유가 좀 있었지만, 잡고 나서 진짜 공방이 시작되는 순간에는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되면 승자가 누가 될지, 그건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연장전 10분을 넘게 한 뒤에야 결판이 날 때도 있고, 그냥 어느 순간 한판 기술이 터지기도 한다. 정반대로 기술을 노린 카운터가 터지기도 하고. 지영은 마지막은 제외했다.
쿵!
맛테!
구혁의 업어치기에 장범이 앞으로 엎어지며 방어에 성공했다. 좀 전엔 약간은 카운터 각이 보였는데, 장범은 그 순간을 노리지 못했다. 장범이 아직 지영보다 부족한 하나가 바로 저거였다. 강지영의 방어 유도의 핵심 중 핵심인 카운터 장착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지영이 운영을 쉽게 풀어나가는 이유의 99% 지분이 바로 이 카운터다.
카운터를 경계하다 보면, 기술을 걸기 쉽지 않다.
지금 들어갔다가 카운터에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무의식이 기술 자체를 걸지 않게 정신을 막아선다. 이것만 해도 효과는 이미 어마어마한 거다. 여기서 기술을 걸지 않으면 지영은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고, 천천히 사냥을 시작한다. 여기서 지도 하나만 먼저 먹여도 지영에게 승기가 절반은 넘어간다. 모든 경기가 그랬으니까, 절반 이상을 줘도 될 것이다.
그럼 만약 그 무의식을 이겨내고, 기술을 걸어오면?
그럼 뭐, 카운터를 치면 된다.
이걸 공략해 낸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다. 하지만 장범은 그 단계까지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맛테!
시도!
지도를 먼저 하나 받았다.
후…….
경기 시작 2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구혁의 눈이 빛나 보이는 건, 절대로 착각이 아닐 거다. 하지메 소리에 맞춰 구혁이 움직였다. 파상공세. 자세를 낮추고, 카운터를 조심한 채로 조급함 없이 천천히 장범을 압박했다. 장범은 다 좋은 선수지만, 부족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실력과 재능. 이 두 가지에 비교해 경험이 매우 적었다. 세계 대회 출전 경험도 있지만, 그거로 부족한 경험을 채우는 건 당연히 힘들었다. 반대로 구혁은 지영이 없던 시간에도 이우진과 번갈아 가며 세계 대회를 출전했다.
메이저인 파리 오픈도 출전했고, 가노컵도 출전했다.
거기에 준결, 결승전 경험이 매우 차고 넘치는 선수였다. 즉, 나이에 맞지 않게 노련미가 있는 선수였다.
쿵!
다시 업어치기.
이번엔 지영도 카운터 치기 힘들 정도로 제대로 된 타이밍에 들어왔다. 거기에 기울이기도 완벽했고. 하지만 장범은 용케도 기술을 피했다. 하지만 다시 포인트를 뺏겼다. 여기서 다시 한번 기술을 허용하면, 지도가 또 들어갈 것이다. 장범은 그걸 직감했는지, 방어 유도를 버렸다.
하지만…… 그 모습에 지영은 혀를 찼다.
‘성급해.’
급하게 잡기를 걸어오는 걸 소매 끝만 말아서, 그대로 업어치기. 장범이 몸이 붕 떴다. 쿵! 막판에 버티긴 했지만. 와자리! 절반을 뺏기는 건 피하지 못했다. 절반이 나온 순간, 사실상 경기는 거의 결정됐다.
구혁도 정상급의 선수다.
먼저 딴 절반을 고작 1분도 지키지 못할 정도의 선수는 절대로 아니었다. 공세는 완전히 버리고 수세로 돌아선 구혁은 1분 동안 지도 2개를 받으면서 지켜냈고,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나쁜 게임은 아니었다.
구혁이 장범을 제대로 파악하고 들어왔고, 제대로 공략했다. 장범은 구혁을 공략하지 못했고, 승부는 그런 공략의 차이에서 갈렸다. 그뿐이다. 장범은 그래도 침울한 얼굴은 아니다. 뭔가 시원해 보이기도 했다.
“이따 보자.”
구혁이 지나가면서 결승전에서 보자고 한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범은 나오자마자 지영에게 다가왔다.
“아, 역시 혁이 형한텐 형처럼 해서는 못 이기겠네요.”
“끝까지 가지 그랬어, 그냥.”
“그러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조급했어요. 어? 정신 차려보니까 업어치기 날아가고 있더라고요.”
“그런 것 같더라. 그래도 그런 조급함을 버려야 해. 방어 유도는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는 거다. 그거 못하면, 방어 유도는 버리는 게 나아. 온전히 본능에 의지하면, 아까 그 꼴 면치 못할 거야.”
“네, 형. 많이 알려주세요.”
방글방글.
지영은 지고도 참 해맑은 장범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참, 넉살도 좋다. 물론 그래서 장범이 마음에 들었다. 이 나이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딱 후계자로 키워보고 싶은 놈이었다.
그래서 조언을 더 해줬다.
“힘도 길러야겠더라. 혁이 형한테 힘으로 좀 밀리지?”
“네? 네. 못 파고들어 가겠던데요?”
“힘이 부족해서 그래. 인바디 정교하게 재서, 최대치까지 근력 올려. 그런데 조심할 건 절대로 유연성이나 반사신경, 속도는 떨어지면 안 돼. 정확히 체지방만 날리고, 나머지는 근력으로 바꿔.”
“헐. 그게 돼요?”
“형은 그거 고1 때 끝냈다. 지금도 분기마다 검사해서 떨어진 부분은 수정 작업해. 이번 대회 전에도 도복 입기 전에 그 작업부터 했고.”
“와, 역시 유도 마스터……. 근데 저도 할 수 있을까요? 그거 형이니까 되는 거 같은데?”
“내가 됐으니까, 전부 다 돼.”
안 되는 건 없다.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안 되는 거지. 이 작업은 황금세대가 임대성 코치의 지도하에 전부 끝냈다. 방금 한 말처럼, 분기마다 검사해서 수정하는 작업하는 것도 진짜였다.
쿵!
잇폰!
얘기를 나누는 중에, 강한결이 들어가자마자 허벅다리 한판으로 경기를 끝내면서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결승전 준비하라는 신호 아닌 신호를 보냈다. 지영은 장범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생했어. 이제 가서 패자전 준비해.”
“넵. 형. 결승전 파이팅하세요.”
“…….”
지영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하는 거로, 분위기를 바꿨다.
결승전.
심기일전한 구혁과의 대결은, 잠시 뒤 지영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게 만들었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장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떠났고, 지영은 강한결과 황석의 승리를 확인한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대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