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15화
515화. 전설로 남을(4)
각오와 다짐은 때론 인간의 본 실력 이상의 성적을 거둬주게 할 때가 있다. 특히 어떤 강력한 동기가 있다면 더더욱 강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100% 만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패기.
분명 서정우의 패기는 진짜였다.
하지만 그 패기는, 1분 만에 꺾였다.
시도!
심판의 지도 판정에 서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분간, 서정우는 지영을 몰아붙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서정우가 들고나온 전략은 간단했다. 패기로 밀어붙이기. 사실상 메치기로는 거의 약점이 없는 강지영이고,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전략도 거의 없었다. 이번에 첫판에 붙게 되어 꽤 공들여 파이팅 넘치는 유도로 강지영을 한 번 잡아봐야지! 하고 덤볐다.
그러나 1분간, 서정우는 정신없이 털렸다. 그리고 다시 1분이 지났을 때, 그는 무릎을 짚고 헉헉거렸다.
체력이 약한 건 아니지만, 잡기에 너무 사정없이 털렸다. 유효 포인트는 아마 다섯 개쯤 뺏겼을 거고, 그동안 기술 한 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1분이 더 지났을 때는 벌써 지도가 두 개다. 지영은 그런 서정우를 상대하면서, 조금의 방심도 없었다.
지영은 세계 최고의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회를 많이 출전한 건 아니지만, 굵직한 세 개의 대회에서 벌써 금메달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올림픽도 있었다. 각 체급의 최강자만 나온 토너먼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그것도 성치 않은 몸으로 말이다. 그러면 좀 건방지고, 혹은 좀 방심할 수도 있는데 지영은 그런 모습이 일절 없었다.
“독하다, 독해…….”
“와, 좀 쉬엄쉬엄해도 될 건데. 첫판부터 그냥 맥시멈으로 조지네.”
“서정우? 쟤 멘탈 터졌네, 터졌어.”
“터지고도 남지. 아마 직접 잡아보기 전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걸? 근데 잡아보면 완전 다르잖아.”
“다르지, X발…… X나 다르지.”
후우.
밖에서 시합을 보던 선수들은 강지영이 보여주는 경기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지영을 잡은 선수들이 공통으로 입을 모아 말하는 게 있다. 밖에서 시합을 보거나 경기 영상만 보면 분명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강지영의 유도는 분명, 하는 거 보면 좀 설렁설렁하는 느낌이 있다. 특유의 방어 유도가 겉보기로는 파이팅이 크게 넘치는 모습으로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돌려보면, 해볼 만한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시합을 준비하고 막상 직접 잡아보면, 그게 얼마나 틀린 생각인지 금방들 깨달았다. 잡아보면 안다. 이미지 트레이닝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렇게 다른 현실을 극복한 선수는 없었다.
국내에도, 국외에도.
3분이 지났다.
맛테!
시도!
그렇게 너무나 이상과 다른 현실에 벽에 막힌 채로 경기는 끝났다.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온 지영은 바로 대기실로 이동했다. 시합 내용은 만족스러웠다. 대기실로 가는 도중, 구혁이 지영에게 다가왔다.
“역시 강지영이.”
“형 안녕하세요.”
“흐흐, 그래. 맞다. 니 우진이 결혼식 가나?”
“가야죠. 형도 가세요?”
“청첩장도 받았는데 안 가기 좀 그렇지.”
“그럼 가서 보겠네요. 그런데 형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던데요?”
“음, 나쁘진 않지.”
“오, 결승에서 기다릴게요.”
“그래. 결승에서 보자.”
툭툭 구혁은 지영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시합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구혁과는 결승에서 만난다. 하지만 그건 구혁이 한층 성장한 장범을 이겼을 때의 얘기다. 지영의 시드에는 이름난 선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혁과 장범은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이번 대회 73체급에서 최고의 빅매치였다.
본래는 지영과 이우진, 구혁까지 셋이서 다 해 먹었던 체급이다. 이 세 선수 외에는 결승전에 올라간 선수가 거의 없었다. 작년 선발전에서 이우진이 시작과 동시에 한판을 떴던 경기를 빼고는 거의 셋이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우진이 빠지고, ‘신성’이라 불리는 장범이 합류했다.
장범의 스타일은 계속 진화 중이었다. 처음에는 강지영을 제대로 카피한 정도였는데, 지금은 거기에 본인의 스타일이 다시 더해지면서 독특한 유도 스타일이 되었다. 거기에 문제가 되던 체력도 상당히 끌어올려서, 지금은 포스트 강지영으로 불리고 있었다.
강지영의 시대를 저물게 할 유일한 선수라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걸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유도에 절대적인 건 없고, 자기의 시대가 목표를 이루기 전에 저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스포츠 세계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 그건 불변의 진리다. 피지컬의 하락으로 왕의 자리를 내주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갑자기 훅 등장한 신성에게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게, 스포츠의 세계다.
지영이 73의 에이스 안호진을 깨고 국가대표의 자리를 차지했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게 이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기엔, 지영의 정신이 너무 단단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장범의 실력은 진짜다. 하지만 지영은 장범을 파트너로 불렀고,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자신은 은퇴할 예정이다. 그럼 그 뒤를 장범이 이어주길 바랐다.
이미 강지영이란 한 인간이 부상으로 은퇴하지 않은 순간부터 본래의 미래는 꼬이고 꼬였다. 그 나비효과로 이우진은 은퇴했고, 장범이 등장했다. 그 장범이 자기의 뒤를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지영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장범은 심성이 좋았다.
형, 형하고 잘 따르기도 했고, 가르쳐주는 걸 기분 나쁘게 생각지 않고 바로바로 흡수하는 마음가짐도 있었다. 거기에 알려주는 건 팍팍 흡수하는 천재성까지. 이 모든 걸 생각하면, 장범을 지영이 안 챙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져줄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지영의 목표는 확고했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온 실력으로 누구든 꺾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지영의 마음가짐은, 2회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올해 창단한 하이원 선수단.
대학 4학년 중, 체급에서 한 명씩 받아서 창단했는데. 이번이 첫 대회였다. 하이원의 장명수가 2회전 상대였다.
경기대 출신으로, 지영과 비슷한 긴 신장에서 나오는 잡기와 덧걸이가 특기인 선수였다. 자세는 지영과 똑같은 왼쪽이다. 그래서 지영은 오른쪽으로 섰다. 왼쪽 맞틀어잡기는 지영이 별로 선호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꺼려지는 자세다. 그래서 지영은 이쪽으로는 웬만해서는 잡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약한 건 아니었다.
지영이 자세를 바꾸자, 장명수도 자세를 바꿨다. 이거 하나만 봐도 어떻게든 맞틀어잡겠다는 생각이 엿보였다. 그래서 지영은 그대로 잡아주기로 했다. 지영은 올라운더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업어치기, 허리기술, 발기술, 잡기, 운영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선수였다. 상황에 따라 경기 스타일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데, 그렇게 바꿔도 실력 손실이 정말 적다.
양쪽 다 잘하는 선수들은 제법 있다. 하지만 그래도 주력 자세는 있기 마련이다. 지영이 왼쪽이 주력인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양쪽의 실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건 지영도 이루지 못한 경지다.
방어 유도를 처음 생각하고, 자기만의 고유 스타일로 만들기 위해 지영은 양쪽 잡기를 가장 먼저 손봤다. 오른쪽으로 잡아도, 왼쪽으로 잡아도 잡기에서 절대 밀리지 않게끔 해야, 전방위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오른쪽으로 잡아도 사실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서로 자세를 바꿨네?”
“주 포지션 바꾸면 강지영한테 유리할 텐데. 재 양쪽 다 잡기 잘하잖아?”
“명수도 잡기는 나쁘지……. 아이고.”
홰액!
장명수의 특기는 지영만큼 큰 신장으로 덮치듯이 치는 덧걸이다. 상대를 안아 상체로 찍어누르는데, 이때 당황하면 몸이 굳는다. 그 순간 치는 덧걸이로 장명수는 대학까지 갔고, 대학에서도 이 기술 하나로 쏠쏠하게 메달을 챙겼다. 그는 이 덧걸이를 상황에 따라 치는 능력자였다. 이런 기술 하나는 당연히 주요 경계 대상이다.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그 기술을 방어하면 아무리 실력자라 한들, 상대를 넘기는 건 매우 힘들다. 업어치기를 방어하기 위해 중심을 뒤로 바짝 준 상대에게 아무리 업어치기를 쳐도, 넘기기 힘든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이 덧걸이를 때에 따라 아낄 줄도 알았다.
상대가 방심할 때, 긴 접전으로 머릿속에서 덧걸이가 사라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사냥꾼의 심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그런 스타일을 지영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맹점을 찌를 요량으로 맞잡는 동시에 그대로 덧걸이를 걸어왔다. 그리고 지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허벅다리를 차올렸다.
파앙!
한 방이었다.
서로 견제하다가, 틈을 봐서 틀어잡는 동시에 친 허벅다리를, 그대로 역으로 허벅다리로 카운터. 장명수의 신장이 지영보다 좀 더 컸다면 먹혔을 거다. 하지만 둘의 신장은 비슷하다. 지영보다 조금, 정말 조금 더 장명수가 컸지만, 그래 봐야 정말 조금이었다.
그러니 기술이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거기에 지영은…… 전 세계의 유도 선수가 배우고 싶어 하는, 카운터의 귀재였다. 덧걸이가 다리 뒤로 들어온 순간 지영의 발축은 이미 회전을 끝내버린 상황이었고, 이어서 허벅다리로 부드럽게 연결됐다.
차올려서, 받친 다음, 틀어서, 매치기.
완벽한 연결이었다.
터엉!
잇폰!
심판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판을 외쳤다. 후, 지영은 짧게 숨을 끊어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복을 고쳤다. 얼떨떨한 장명수는 하,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나 지영의 앞에 섰다.
툭.
승자 선언 후 악수도 참 예의 없게 하고 나갔지만, 지영은 개의치 않았다. 저래 봐야 패자의 유치한 반항일 뿐이다.
“고생했어.”
“이 정도로 뭐. 다음 판 파이팅이다.”
“오케이, 파이팅이지.”
지영의 2회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효중이 들어갔고, 1분 만에 상대를 역시나 허벅다리로 제압하며 깔끔하게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이어진 황금세대의 무자비한 순항. 준결승 명단이 오후 2시에 가려졌다.
쉬는 시간 없이, 바로 패자전이 시작됐다.
패자전을 하는 동안, 지영은 친구들과 함께 떨어진 에너지를 보충했다. 김밥과 어묵꼬치. 시합장에서 선수들이 자주 먹는 점심이다. 그런데 맛은 좋았다. 시킨 게 아니라 한은정이 이른 새벽부터 준비해서 직접 가져온 김밥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뜨끈한 어묵꼬치와 국물로 배를 채웠다.
김밥이 정말 맛있었지만, 과식은 하지 않았다.
딱 적당히 배를 채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패자전이 진행되는 동안 짧게 자두는 게 좋았다. 너무 자면 퍼지지만, 20분에서 30분 정도의 잠은 떨어진 에너지를 확실히 채워줄 것이다.
20분 만에 일어난 지영은 그사이 굳은 몸을 다시 스트레칭으로 풀어줬다. 이 과정은 참으로 귀찮다. 하지만 이 과정을 무시하면, 정말 거짓말처럼 부상 확률이 올라간다. 부상 확률만 올라가나? 아니다. 몸이 굳어 있으면 경기 중에 본 실력이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4분 단판 게임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본 실력 100%를 끌어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
비슷하게 일어난 친구들과 함께 스트레칭하고, 경기를 관람했다.
패자전.
사실상 우승과 멀어진 게임이다. 그 끝에서 승리를 거둬도 3위지만, 이 3위는 때때로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3위 역시 선수의 커리어에 크게 도움이 된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열기는 예선전보다 훨씬 과열되어 있었다. 전 체급 패자 준결승이 끝나고, 오후 4쯤 다시 시작된 본 게임.
쿵!
잇폰!
이성진의 한판을 시작으로, 황금세대의 질주가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