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3화
503화. 왕의 귀환(12)
리앙 보르탱.
벨기에 신성의 이름이다.
‘신장은 170 초반이고, 전형적인 오른쪽 자세다. 기술은 힘을 베이스로 한 허리 기술과 발기술. 발기술은 특히 물고 늘어지는 게 특기.’
경기 시작 직전에 김재정 코치가 알아 온 정보를 지영은 입장하기 직전까지 되뇌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막상 경기에 들어오면 스타일이 변할 수도 있다. 지영을 저격하는 스타일로.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우면, 지영이 지금까지 무패를 이어갈 리가 없고, 황금세대가 무패행진을 기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현대 유도는 수십 개의 경기 영상을 틀어놓고, 강점과 약점을 어떻게든 발견해 낸다. 아마 현 황금세대의 영상은 작년과 올해 최고로 많이 분석 당했을 것이다. 무패? 팬에게는 환호의 조건이나, 현역 선수나 관계자들에겐 치욕과 같았다.
왜냐고?
그 무패의 기록에 본인이나 본인이 관리하는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연패라도 끊고 싶을 것이다. 이대로 두 개의 대회에서 우승하면, 무패 그랜드 슬램이란 어마어마한 위업이 달성되는 거다. 그건 무조건 막고 싶을 것이다.
야구처럼, 퍼펙트게임을 진행 중에는 번트를 대면 안 된다 같은 암묵적인 룰 같은 것도 어차피 없는 유도다.
‘그러니 반칙을 해서라도 끊고 싶겠지. 아니면 그냥 반칙으로 이기고 싶든가.’
지금처럼.
꽈악.
슬그머니 발을 넣어 지영의 발가락을 밟았다. 그리고 힘을 꾹 줬다가 떼며 억지 기술. 그것도 딱 들어가는 모션만이다. 지영의 카운터에 처맞지 않으려고, 언제든지 도복을 놓고 납작 엎드릴 수 있을 정도로만 기술을 들어갔다.
지영은 이 반칙이, 자기의 멘탈을 일단 흔들어보고자 하는 전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자세를 바짝 낮추고, 바짝 민 머리를 들이민다. 유럽 선수 특유의 향수와 땀이 섞인 냄새가 올라왔다. 더러운 시합 스타일이다. 반칙의 경계선에서 교묘히 노니는. 하지만 지영은 사실, 이런 스타일은 지긋지긋하게 만나봤다.
거의 모든 대회에서, 한 번은 이런 놈과 붙었다.
그리고 한 놈도 빠짐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지영은 반칙을 봐주는, 그렇게 착한 인간은 아니었다.
꾸욱!
툭!
무릎으로 허벅지를 기술을 들어가는 척하며 찍어왔다. 피하려면 못 피할 것도 없는데, 서로 가슴 깃을 잡고 바짝 붙은 상태라 지영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그대로 빙글 돌아 빗당겨치기나 업어치기를 파고들어 올 테니까. 허리 기술이 주력이라고 업어치기를 못 할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선수들은 웬만한 기술은 전부 할 줄 안다. 다만 주력인가, 아닌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게 더러워서 피하면, 가슴 앞이 훤히 열린다는 소리다.
그래서 피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통증이 상당했다. 잠시 뒤, 다시 한번 들어오는 무릎. 지영은 다시 맞아줬다.
그리고…….
빠악!
물러나는 상대를 턱을 밀어 거리를 준 다음, 그대로 모두걸기를 쓸었다. 지영답지 않게 굉장히 거친 모두걸기였다. 발바닥과 발등 사이로 제대로 후려친. 그랬더니 울리는 소리가 지극히 둔탁했다.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는 표정을 보면 그 고통이 어땠을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시합 중인데도 밖에서 벨기에 코치가 항의하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페어플레이? 좋은 말이다. 스포츠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걸 지켜주는 선수에 한에서다. 이렇게 무릎으로 찍는 것과 은근슬쩍 밟는 건, 잘못하면 금방 부상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엄지를 밟혔는데 무리하게 움직이면? 엄지가 쏙 빠진다.
허벅지를 찍힌 건? 잘못하면 근육이 뭉칠 수도 있었다. 그게 부상이다. 즉, 이 새끼는 지영을 부상 입히는 걸 전략으로 들고 나온 거다.
이런 놈에게 페어플레이?
어림도 없다.
지영은 놈의 이름조차 잊었다. 스타일도 잊었다. 굉장히 중요한 정보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애초에 제대로 된 플레이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본래의 스타일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다.
이런 지영의 마음은 곧장 행동에 반영됐다.
‘너같이 반칙 위주의 선수는 있지, 잡기로 조지면 돼.’
스타일이 변했다.
가슴 깃을 뿌리치고, 손을 쭉 뻗었다. 와아아! 꺄아아! 함성을 들으며 지영은 가슴 깃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상대가 그걸 뿌리치려고 손을 대는 순간 툭! 투욱! 모두걸기 한 방, 다시 빙글 돌아 나오며 발목 받치기 한 방을 넣었다. 중심을 깨는데 이것만큼 직빵도 없었다. 중심이 딸려 나와 앞으로 엎어진 놈의 목깃을 찍어 누른 다음, 무릎까지 댄 다음 강하게 조였다. 굳히기?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비슷하게 해줄 뿐이다.
‘이렇게 압박하면 더럽게 아프거든.’
특히 귀를 찍어 누르면,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순간적으로 이성이 와락 날아갈 정도로. 홰액! 역시 곧장 반응이 왔다. 귀가 짓눌리며 올라온 고통에 놈은 격하게 힘을 쓰며 허리를 세웠다. 역 V자를 만들었으니, 심판에게 그쳐를 해달라는 뜻이다. 지영은 그 순간 힘을 풀고 즉시 물러났다. 여기서 강제로 조이면 심판이 이 새끼 보소? 하고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완벽하게 방어한 것 같단 자세를 잡을 때, 바로 물러났다.
이에 벨기에 선수의 팬 쪽에서 우우! 하는 항의가 들렸다. 하지만 극히 작아서 지영의 귀에 겨우 들려올 정도였다.
맛테!
심판의 그쳐 사인에 지영은 자리로 돌아와 도복을 고쳤다. 그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앞을 봤더니, 놈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게 보였다. 그에 지영은 그냥 피식, 실소를 지었다. 그러자 얼굴이 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모욕받은 기분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의도에서 한 게 맞았다.
‘부상 입히기. 그게 안 되면 최소한 멘탈은 터뜨리기. 이런 엿 같은 전략을 들고 나왔으면서 자기가 당하는 건 또 싫은 건가?’
하여간 인성이 제로인 인간들은 이게 문제다.
시작은 자기가 먼저 했다.
아마 지영이 지켜보는 눈이 많고, 워낙에 드높은 명성 때문에 끝까지 페어플레이를 고집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영은 유도에 한에서만큼은, 아니, 자기 몸에 해를 끼치는 인간에게만큼은 지독하게 냉정하게 반응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야 당연히 트라우마 때문이었고.
이런 인간을 지영은 철저하게 응징한다.
그 예로, 졸려간 놈도 있고 팔이 부러진 놈도 있었다. 그게 전부 지영을 자극한 결과였다. 지영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지고, 입가에 지어진 조소도 한층 진해졌다. 경기장 상층에 달린 거대한 스크린에 그런 지영의 미소가 잡히며, 꺄아아! 하는 교성을 유발했다.
시니컬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미소는 강지영이란 인간과 한없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메!
경기 속행.
지영은 이번에도 먼저 움직였다. 워낙에 신장이 좋고, 어깨를 포함한 피지컬이 좋다 보니 마치 천막이 훅 덤벼드는 느낌을 받았는지, 놈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걸 놔줄 지영은 아니다.
아아! 나옵니다! 강지영 선수 특유의 코너 몰기!
지영도 이제 익숙한 한국 중계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영은 가슴 깃을 또 먼저 잡았다. 놈은 이번에도 이걸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지영은 좀 전과 똑같이 모두걸기를 툭 때렸다. 그리고 돌아 나오며 발목 받치기 모션을 걸었다. 그러자 놈은 두 번은 당할 생각이 없는지 확 달려들었다.
‘기다렸다고.’
말아업어치기와 빗당겨치기 변형. 혹은 합일? 의 느낌을 주는 기술이 터졌다. 놈은 달려드는 순간 확 트인 시야에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몸이 그대로 앞으로 뒤집혔다. 파앙! 하지만 등이 아닌 엎드린 상태로 바닥에 처박혔다. 어깨부터 쓸려 처박혔는데, 그 순간 천운으로 몸이 앞으로 기울여지며 엎어지게 된 것이다.
“끄윽!”
그리고 지영은 목깃을 다시 찍어누른 다음 무릎을 댄 다음 찍어눌렀다. 똑같이 귀를 압박하는 굳히기 전 기술에 놈이 짧게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지영의 종아리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역으로 굳히기를 잡을 생각인가 본데, 지영은 받아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다리를 쭉 펴 손을 털어낸 다음, 양손으로 목깃을 잡고 바짝 잡아당겼다. 삼각 누르기의 시작 자세. 절대로 반칙이 아닌 자세다. 하지만 이게 또, 무릎이 똑같은 위치로 들어간다.
“끅!”
역시나, 악을 쓴다.
마치 심판! 이 새끼가 반칙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경기 운영이다. 옛날에는 삼각구라 불렸던 기술의 시작 자세고, 이 기술은 지금도 국제대회에서 자주 나온다. 그러니 심판이 당연히 이걸 반칙이라 볼 리가 없었다.
이것도 운영이다.
상대를 열 뻗치게 하는.
맛테!
지영이 삼각 누르기를 들어가려는 의도가 없어 보이자, 심판은 바로 그쳐를 선언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데,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툭. 벌떡 일어난 놈이 지영의 등을 밀어친 것이다.
마치 가슴팍을 밀듯이.
그리고 뭐라 거칠게 소리치는 게 들렸다.
음?
지영은 이건 또 뭔가 하는 생각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귀를 부여잡고 씩씩대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이걸 못 참는다고?”
지영이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성난 얼굴의 심판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강하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한 뒤, 이어폰을 만지며 뭐라고 말을 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반칙패를 주겠다.
그에 지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경우는 지영도 처음이었다. 유도는 투기 종목이라서 선수 간에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그래서 신경전도 벌어지고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축구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그림? 그건 한 해에 한 건 일어날까 말까다. 왜냐고?
유도의 슬로건은 예시예종이다.
따라서 경기 중에 지영이 건 정도의 신경전은 벌어져도, 심판이 맛테를 외친 상황에서 상대의 몸을 밀치거나 하는 행동은 절대로 안 나온다. 그건 무조건 반칙패라는 걸 선수들은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거의, 정말 거의 절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벌어졌다.
고작 두 번의 자극으로, 귀가 벌겋게 변할 정도로 좀 눌렸다고. 상대를 밀쳤다? 이걸 봐주는 심판은 유도계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판정은 금방 나왔다. 반칙패.
심판은 단호한 표정으로 반칙패를 선언했고, 놈은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게 왜 반칙패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심판은 지영을 향해 승자 선언을 했고, 지영은 가볍게 걸어 다가갔다.
“더…… 더러운 새끼.”
피식.
인종차별적 단어가 나올 뻔했는데, 그래도 그건 또 중간에서 용케 막았다. 지영은 손을 툭 치곤 그대로 돌아섰다. 저런 놈에게 해줄 예의? 없다. 경기장엔 수많은 관중이 있고, 지영의 경기는 생중계되기도 한다. 그러니 시작을 누가 했는지는 명백하게 나와 있다.
후.
슬그머니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나오자. 김재정 코치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반겼다.
“진짜, 별일 다 있다? 그치?”
“그러게요. 저도 설마 저럴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멘탈이 저렇게 약한 게 어떻게 그런 전략을 들고 나왔는지, 쯔쯔. 가자.”
“네.”
그런데 놈이 밖으로 나오더니 코치를 밀치고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지영의 어깨를 잡아 홱 돌렸다.
‘피곤하네, 진짜…….’
힐끔, 지영은 김재정 코치가 반사적으로 폰을 드는 걸 보고는 다시 시선을 놈에게 돌렸다. 지영은 고개를 꼬고, 뭔데? 하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봤다. 잠시 눈싸움 뒤, 놈이 고개를 바짝 들이대더니 말했다.
“더러운 노란 원숭이 새끼! 게임 매너 있게 해!”
으르렁거리면서 한 그 말에 지영은 씩 웃었다.
이런 놈은. 말 한마디 섞어주는 것도 아깝다. 그래서 도로 김재정 코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녹음 잘 됐어요?”
“아마도? 어, 보자. 어. 잘됐네.”
“그래요? 가요, 그럼.”
자기 목소리가 김재정의 폰에서 흘러나오자, 그제야 상황을 눈치채고 이성을 찾은 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자기가 뭔 말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은데, 늦은 거다. 이 음성은 이제 협회에 전달될 거고, 좀 전에 반칙까지 합쳐지면 저놈의 운명은 이거로 결정됐다.
영구 제명.
스포츠계에서 인종차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했다. 반칙패와 더불어 인종차별까지.
미래는, 어두울 거다.
아주, 칠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