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4화
504화. 왕의 귀환(13)
웅성웅성.
너무 뜻밖의 상황에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고, 비슷하게 여자부 1회전이 끝나자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사실 이런 일이 매우 이례적이었다. 선수가 경기 내용이나, 심판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코치와 함께 강력하게 항의하는 경우는 있어도, 선수 자체가 이렇게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늘은 만원 관중이다.
경기장 상단에는 오늘을 위해 대형 사각 스크린까지 달아서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걸 통해 리앙 보르탱의 노매너 플레이는 이미 관중 모두가 봤다. 그런데 거기에 맞선 지영의 등을 밀치는, 유도에선 최악의 비신사적인 행위로 간주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분위기는 확 다운되어 버렸다.
“이야,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조인선 위원님 세대에도 저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감독이나 코치가 심판에게 항의하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선수 본인이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저도 처음 봤어요. 저 선수, 참 대단하네요. 물론 안 좋은 의미로요.”
“그렇군요. 어어, 리앙 보르탱 선수. 화난 걸음으로 강지영 선수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삿대질하며 뭐라고 고함을 지르는데요!”
“어…… 저 선수. 저건 정말 큰일 날 짓인데…….”
“거리가 멀어 뭐라고 하는지 들리진 않았습니다. 아, 김재정 코치가 핸드폰을 들고 있네요. 강지영 선수 그대로 빠져나갑니다. 뭐라고 한 걸까요?”
배영우의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아 이런…… 리앙 보르탱 선수가 강지영 선수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김재정 코치가 그걸 녹음했고요. 이거, 저 선수 정말 위험하게 됐는데요?”
“위험한 정도가 아니죠. 저건 무조건 제명입니다. 아마 저 선수의 유도 인생은 오늘로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네. 경기 중의 비신사적 플레이에 이은 경기장 밖에서 인종차별 발언이면, 아무리 싸게 줘도 영구 제명이죠. 모든 스포츠에서 특히 인종차별은 매우 엄격하게 처벌하거든요. 선수가 아무리 반성한다고 해도 한 시즌은 날아가는데, 이 선수는 그 두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집안이 정말 부자가 아닌 이상 회생은 힘들 겁니다.”
“아하하…… 그 마지막 말은 좀.”
“왜요? 사실이잖아요.”
“……하아. 네, 그렇답니다. 자, 장내가 소란스러워 경기 진행에 브레이크가 걸렸으니 경기 영상을 좀 보도록 하죠. 네, 이 부분입니다. 시작은 리앙 보르탱 선수입니다. 이 선수, 이거 의도적으로 발을 밟은 거 맞지 않습니까?”
배영우의 질문에 조인선 교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맞습니다. 1분 만에 발을 네 번이나 밟았어요. 심지어 여기, 힐끔 지영 선수의 발 위치를 확인하죠? 그리고 슬그머니 발을 밟았어요. 이건 무조건 의도적인 거예요.”
“지영 선수는 왜 발을 빼지 않았을까요? 알지 않을까요?”
“알죠. 그런데 발을 빼면 중심이 흩어지잖아요? 유도는 중심 운동의 극의를 다뤄요. 아주 조금만 중심이 무너져도, 선수는 선수를 넘길 수 있어야 하는 게 유도고요. 세계 선수권에 나온 정도면 그 정도는 충분히 잘하는 선수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지영 선수는 알면서도 반응하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이게 정말 무서운 게, 저렇게 엄지가 밟혔을 때 잘못 움직이면 발가락이 빠져버려요. 그걸 지영 선수도, 아니, 그냥 발을 뗄 때까지 중심을 잡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고요. 어차피 저 새, 아니, 저 선수도 기술을 걸려면 움직여야 하니까요.”
“……조인선 위원님? 저랑 나란히 방통위 끌려가시고 싶은 건가요?”
“흠, 주의할게요.”
“네. 제발,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자, 다시 경기 보죠. 여기, 여기는 보니까…… 무릎으로 찍는 것 같네요?”
“네, 교묘하게 엇박자 빗당겨치기를 넣는 형태로 무릎을 넣어서 지영 선수의 허벅지를 가격하네요. 하, 이…….”
“스톱!”
“……네. 후우. 아 근데 너무 화가 나네요. 저 선수의 전략은 정말 간단해요. 강지영 선수의 부상, 정신 흔들기. 이 두 가지예요. 저 비매너 플레이로. 그런데 저런 전략을 선수가 짰건, 아니면 팀에서 짰건, 정말 저건 정말…… 후우.”
“릴렉스입니다. 위원님.”
“네, 저는 멘트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탁.
조인선 교수는 심지어 인이어 마이크까지 떼어 그냥 목에 걸어버렸다. 더 이상 멘트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더 하면, 진짜 쌍욕을 박을 것 같아서. 그런 조인선 교수의 행동에도 배영우는 침착했다.
“잠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그럼.”
배영우가 자의로 중계를 중지했다.
“하하, 힘드시죠?”
“네. 유도가 괜히 예시예종이라 불리는 게 아니거든요. 시합은 격렬해도, 실상 보면 축구나 야구보단 훨씬 점잖아요. 패배에 승복 못 하는 경우도 있고, 심판의 미스도 있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몸에 악의적으로 부상을 입히는 저런 짓은 안 하거든요. 그런데 저 선수는 정말이지. 후.”
“이해합니다. 그래도 지영 선수가 잘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누군데요? 강지영 선수잖아요? 우리 강지영 선수는 저런 거에 흔들리는 선수가 아니에요. 멘탈 흔들기? 이 선수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리앙 부랄탱인가 뭔가 하는 새끼의 전략에 넘어갈 일이 없죠.”
“…….”
“거기에, 보셨죠? 상대의 전략을 간파하고 나서 싸늘하게 웃더니 곧장 갚아주는 거. 우리 지영 선수가 또 이런 마인드가 좋아요. 경기장 밖에서는 신사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정말 사나운 맹수거든요. 절대 물러서지 않아요. 그리고 봐주지도 않아요. 이게 이 선수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에요. 안 그래요?”
“어, 네. 그렇……죠?”
“뭐예요, 그 표정은?”
“그, 그게…… 광고가 안 나갔답니다.”
“네?”
“음…….”
광고는 예정된 시간에 나간다.
그걸 PD가 정해주는 거고. 그런데 지금은 돌발 상황이었고…….
“이야, 난리 났네요.”
“…….”
“리앙 부랄탱…… 큭!”
“아이 씨…….”
방송사고였다.
* * *
방송사고가 나든 말든, 시합은 10분 정도 뒤에 재개됐다.
처음에는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두 게임 정도가 끝나자 다시 가라앉았다. 그렇게 경기가 착착 진행되면서 이전의 열기도 되찾았다.
환호와 아쉬움이 섞인 탄성이 경기마다 나왔다.
그리고 그런 환호와 탄성을 대기실에서 메아리처럼 듣고 있는 지영은 눈을 감고 차분하게 이전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흥분했어. 흥분한 게 맞아.’
상대가 더럽게 나왔다. 그건 이견이 없는 일이다. 동시에 반칙패를 당한 비신사 플레이까지. 마지막에 인종차별 발언까지 생각하면, 그놈은 선을 아득히 넘었다. 하지만 지영이 복기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비매너 플레이까진 아니어도 상대를 열 받게 하는 플레이는 지영도 했다. 평소라면 굳히기 따위는 애초에 잡지도 않았을 거다. 그쪽은 자신 있는 쪽이 아니니까. 그런데 굳이 잡아서, 굳이 찍어눌렀다.
지영은 그걸 흥분했다는 거로 판단했다.
평소의 지영답지 않았다? 아니다. 지영다운 게 맞았다. 하지만 지영은 안자이 히카리가 첫 격돌에서 강유진에게 박살 났던 장면을 떠올렸다. 자이언트 킬. 사실상 정상급 선수의 대결이었기에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인 건 아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쪼갠 것도 아니다. 그건 있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우세한 건, 히카리가 맞다.
그런 히카리도 졌다.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시작부터 조금 무모한 기술을 걸어서. 지영은 그걸 상기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결은 분명히 다르지만, 뭐든 이렇게 반응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차분하게, 차분하게, 차분하게…….’
그래서 되뇌었다.
본래의 스타일 대로, 철저하게 운영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가자고. 각오를 그렇게 다지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명경지수? 이런 걸 그런 상황이라 하던가?’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오며,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잠시 뒤 눈을 떴을 땐 대기실에 아무도 없었다. 그에 지영은 다시 웃고 말았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다들 조용히 나가준 것이다. 이런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이걸 갚는 방법은 결국 성적이다.
똑똑.
“지영아?”
김재정 코치의 목소리에 지영은 네, 나가요. 하곤 일어났다. 도복을 입고 나간 지영은 복도에서 다시 몸을 풀었다. 부딪치기 3세트에 몸에 열기가 다시 피어났다. 우와! 그때 경기장에서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뭔가 궁금해하며 다시 부딪치기를 하는데 경기장을 보고 있던 스태프가 달려와 외쳤다.
“이성진 업어치기 한판승!”
“나이스!”
그리고 또 잠시 뒤, 와아! 하는 함성이 울렸다. 아까 그 스태프가 또 달려와 외쳤다.
“유진이 허벅다리 한판승!”
“굿!”
좋다.
잘 올라가고 있다. 아쉽게 다른 선수들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둘은 잘 올라가고 있었다.
“강지영 선수 입장이요!”
그렇게 다시 지영의 차례가 왔다.
2회전 상대는 이탈리아 선수였다. 여기도 신인이었다. 다만, 이쪽은 나름 유럽에선 천재 소리 듣던 선수다. 유소년 때부터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고 올라온, 청소년 세계 선수권만 2연패다. 차세대 유도 스타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왜? 이 친구는 진짜 잘 생겼다.
마르코 콘티.
전형적인 이탈리아 신사의 리즈 시절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운 외모다. 외모 하면 꿀리지 않는 황금세대와 비교해도 동점이라 생각될 정도로 선이 굵으면서도 아름다운 외모다. 그래서 유럽에선 팬이 제법 많았다.
쇼맨십도 있는 편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게을리하는 스타일도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경기에 승리한 뒤 자기의 찬란한 미소를 보여주려고 이 악물고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지영은 밉지 않았다. 동기가 어떻든, 강자와의 경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와아아!
꺄아!
지영의 입장에 관중석에서 커다란 환호가 터졌다. 익숙한 환호다. 관중의 절반 이상이 자기를 보러 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뻑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그러면 보통 팬서비스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지영의 심장은 평온했다.
본래의 스타일로.
철저하고, 또 철저하게. 상대를 처절하게 만든다.
인사하고 입장한 뒤,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메!
마르코의 신장은 좀 크다.
170 중후반 정도. 지영보다 조금 작은 신장이다. 팔다리가 길쭉하고, 피지컬 자체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딱 보면 체형은 지영과 비슷했다. 시합 스타일은? 지영처럼 왼쪽이었다. 정통파 왼쪽잡이가 아니라, 지영처럼 변칙적인 스타일이었다.
되치기와 발기술, 타이밍 잡아서 업어치기.
기술 자체가 엄청 날카롭진 않다.
하지만 하나 주의해야 할 건. 굳히기 스페셜리스트라는 점이다. 거기에 주짓수를 곁들인 스타일이다. 서브미션에 가까운 스타일이라 잘못하면 꼼짝없이 짓눌린다. 지영은 그런 사전 정보를 이미 뇌에 각인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번 전략은, 굳히기를 주지 않는다는 거다. 서서는 위협적이지 않기에, 굳히기만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지영의 전략은 시작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거리 주지 않기는 당연하다.
철저하게 하체를 공략하고, 타이밍이 왔을 때 유효 기술까지. 철저한 운영 위주의 경기 플레이. 2분이 지났을 때 그 결과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마르코 지도 두 개. 강지영 지도 없음.
그에, 밖에 있던 관계자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운영이 정말…… 기가 막혀.”
“눈빛 봐.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어. 선수가 가지는 열기, 흥분마저 짓누른 모습이라고.”
“1회전에 좀 흥분해서, 좀 건드리면 틈 좀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걸 기대하기도 어렵겠군.”
“누가 마르코 저 친구를 신사라고 했지? 지금 저 모습은 그냥 비에 젖은 개새끼 같군.”
“두려움에 젖은 거겠지.”
“하긴, 강이랑 처음 잡아보면 보통 저렇게 되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승기는 저쪽으로 훌쩍 넘어가지.”
“끝났군.”
“끝났네.”
맛테!
시도!
세 번째 지도가 마르코에게 들어가며 경기가 끝났다.
3회전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뜨기 시작한 아프리카 유도의 왕이 기세등등하게 등장했으나, 3분 만에 반칙패로 물러났다.
그렇게 안착한 준결승.
왕이, 자신의 권좌를 찾아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