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500화 (500/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0화

500화. 왕의 귀환(9)

스무 살이다.

이제 갓, 20.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많은 나이는 또 절대 아니었다. 농익은 느낌보다는, 풋사과의 풋풋함이 오히려 더욱 돋보여야 하는 나이였다. 하지만 남주영은 정반대였다. 이런 표현은 굉장히 미안하지만, 남주영은 전형적인 노안이었다. 화장을 강하게 한 것도 아닌데, 나이가 확실히 많아 보였다. 그러나 작품을 생각하면 이런 느낌이 오히려 정답이다.

무신 척위준의 소월영 박사는 30대다.

반대로 척위준은 스물 초반으로, 연상연하 커플이어야 했다. 그러니 지영보다 너무 어려 보이는 얼굴은 솔직히 갭이 맞지 않는다. 어느 정도 농익은 느낌에 천재 박사이니 지적인 느낌에, 천재가 보통 가지고 있다는 괴팍한 느낌까지, 전부 갖추고 있어야 했다.

남주영이 그랬다.

복장은 청바지에 흰 블라우스다. 하지만 그 세 가지를 동시에 전부 갖추고 있었다. 지적이며 농익은 느낌은 분명히 있었고, 외모의 선이 정말 굵어서 지영보다도 확실히 연상으로 보였다. 배우로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약점이지만, 적어도 소월영 역에는 딱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남주영은 30대 후반의 여성과 함께 왔는데, 이 사람은 임은진과 아는 사이였다. 비슷한 시기에 매니저로 같이 시작했고, 임은진이 여전히 매니저 계의 전설로 가고 있다면, 이 사람은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남주영은 이 사장의 늦둥이 동생이었다.

“안녕하세요. 남 엔터의 남선아예요.”

남 엔터.

뭔 뜻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매우 닮아서 가족일 거란 예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반가워요.”

가볍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지영은 먼저 꾸벅, 남주영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남주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지영의 인사에 화들짝 놀라며 마주 고개를 숙이는 남주영. 목소리조차 굵다. 여리여리한 느낌보단 허스키한 느낌이 강하다. 마치 뭔가를 긁어가며 나온 목소리 같았다. 그런데 그게 크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하하, 인사 나눴으니 앉을까요?”

요즘 들어 자주 한국에 오는 다니엘 화이트의 말에 지영은 임은진과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 남주영과 남선아 자매가 앉았고, 그 사이에 다니엘이 앉았다.

주연끼리의 인사 자리다.

그래서 지영은 남주영을 좀 자세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남주영은 제법 강단이 있는지 지영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지영.”

“네, 다니엘.”

“무리한 부탁인지 알지만, 여기 대본대로 잠깐 합을 맞춰줄 수 있겠습니까? 어색한 상태로 대화보다는, 한번 합을 맞춰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합이요? 어, 그냥 대사만 하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오, 좋아요. 미스 남? 어때요?”

“저도 좋습니다!”

그 대답에 씩 웃은 다니엘이 가방에서 대본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짧은 지문이었다. 먼저 위에 신 넘버와 지문이 있었다.

소월영은 워낙에 천재다.

그래서 무신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적, ‘아키 야마토’의 표적이 된다. 그녀를 납치해 그들에게 부족한 기술을 채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키 야마토의 꼬리를 밟다가 우연히 발견한 척위준이 구해준다.

첫 만남이다.

다니엘은 그 장면을 요구했다. 지영은 지문을 외웠다. 사실 요즘 틈틈이 무신 척위준 코믹스를 읽는 중이라, 이 부분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사를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영어로 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이것도 틈틈이 연습하고 있었다. 모든 시간을 훈련에 쓰는 지영이다. 그걸 비율로 나누면 8.5 대 1.5인데, 당연히 후자가 연기였다. 그 1.5의 훈련 중에 지영이 가장 중점을 두는 건 영어였다. 지영의 영어가 완벽한 편이 아니라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헐리우드 작품인 만큼, 발음이 어색해서 관객이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지영 본인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걸 지영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가능한 영어에 신경 쓰고 있었다.

문제는 남주영인데, 다니엘이 직접 캐스팅한 만큼 영어는 분명 수준급일 것이다.

‘아니, 아마 원어민급이겠지.’

이제 스무 살이다.

영어를 중점으로 공부했다고 해도, 부족한 게 있을 나이다. 그런데도 영어로 합격했다는 건 연기 전공이 아니었거나, 아니면 그쪽 현지에서 살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듣지 않았지만, 실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영어가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바로, 가장 중요한 연기다.

다니엘은 그녀의 연기 실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을 주문한 건 두 사람의 합을 보기 위함과 남주영이란 신인의 실력을 지영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영은 걱정은 접었다. 대신 기대감이 피어났다.

지영의 필모는 정말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이미 충분히 인정받았다. 반대로 남주영은 아무런 필모도 없는, 단역 두 번이 전부인 생 신인이었다. 게다가 마스크도 강렬하고, 한계가 명확한 배우 느낌이지만, 지영처럼 잘하는 역할을 잘하면 롱런할 배우가 될 것이다.

남주영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본을 숙지하더니, 지영을 바라봤다.

“준비됐어요?”

“네, 선배님.”

“그럼 나가서 해볼까요?”

“네? 네!”

미팅룸은 적지 않았다. 충분히 앞에 나가서 할 공간이 있었다. 앉아서 합을 주고받는 것보다 서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지문도 그런 느낌이었고. 나란히 섰는데, 키가 상당했다. 그리고 굉장히 육감적이었다. 앉아 있을 때보다는 서 있을 때 그런 느낌이 훨씬 강하게 풍겼다.

굽이 좀 높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눈높이가 지영의 근처까지 왔다. 적어도 170 중반대라는 뜻이었다. 힐을 신으면 아마 비슷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둘이 나란히 마주 보며 서자, 다니엘이 작은 카메라를 꺼내 테이블에 고정해 둘에게 포커스를 맞춘 다음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카메라와 실제의 차이를 차분히 살펴봤다.

몇 번을 그렇게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카메라에 둘의 모습이 더 잘 잡힙니다. 하하.”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시작해도 될까요?”

“네.”

지영은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남주영을 바라봤다.

“준비된 거 맞죠?”

지영이 그렇게 묻자, 남주영은 대답 대신 눈을 감으며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하던 어느 순간, 뒤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전등 스위치를 누른 것 같은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에 남주영이 눈을 번쩍 떴다.

“아.”

지영의 입에서 불쑥 탄성이 나왔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스위치 들어가는 소리에 반응해.

그에 지영은 직감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기술이 아닌, 직감과 재능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변한 눈빛은 올곧았다.

소월영은 천재이면서, 자기가 가는 길이 맞다는 지독한 확신을 품은 여자다. 그녀의 캐릭터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님과 친언니를 죽인 야마토를 멸살시키는 것. 그게 소월영의 존재 의의다. 그런 그녀는 천재성을 폭발시키는 순간부터 자기의 길이 맞단 세뇌를 시작한다. 그녀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악당이긴 하나, 인간의 목숨을 빼앗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

직접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만든 모든 도구는 결국 인간을 죽이기 위해 쓰인다. 그 어떤 것에도 깨지지 않는, 심지어 대구경 저격 라이플의 탄환조차 튕겨내고도 멀쩡한 언월도가 그러하며, 그 탄환에 맞아도 진동계수를 조작해 우습게 흘려버리는 척위준의 갑주가 그러했다. 척위준을 지키는 것이 곧, 척위준이 휘두르는, 그녀의 무기가 곧, 야마토를 죽이는 수단이 된다.

차도 살인.

정말 전형적인 차도 살인의 계를 복수를 위해 펼치는 게 소월영이다.

그렇기에 소월영은 그걸 견뎌내야 했다.

혹자가 말하는 왕관의 무게에 비슷하다. 물론 소월영에게도, 척위준에게도 심적으로 흔들리는 신들이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엔 둘 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다.

‘적어도 이 신은 그런 부담감, 살인에 대한 부담을 이겨낸 뒤의 만남이야.’

그러니 저런 눈빛인 게 맞았다.

확신.

그 확신으로 인해 별처럼 단단하게 빛나는.

“죽여.”

확신에 찬 어조다.

어떤 확신이냐고? 나를 반드시 죽여야 할 거라고, 안 그러면 후회할 거라고 깊게 다짐하는 목소리다. 이 첫 만남에 소월영은 엉망이 된 모습이다.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릴 정도로 찢어진 옷차림으로 탈출을 감행하다가 척위준을 만난 거라서 처음에 소월영은 그를 야마토의 인간이라고 착각한다. 지영은 그 대사를 받는 순간, 빠르게 몰입했다.

“이건 또 뭐야.”

그리고 척위준은 그런 그녀를 같잖게 바라본다.

“죽여달라고? 죽이라고 하면 내가 못 죽일 것 같냐? 야마토의 더러운 개 따위가.”

“……야마토? 차라리 죽여……. 그딴 개소리로 나를 모욕하지 말고!”

악을 쓰는 소월영에게 척위준은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소원이시라면.”

미소가 바람처럼 싱그럽다.

그런 미소로 백정이 드는 칼처럼 투박한 박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걸 휘두르려는 순간, 적이 난입한다. 그런데 적은 척위준과 소월영에게 동시에 살수를 뿌렸다. 그걸 반사적으로 막아서 모조리 적을 처단한 척위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소월영을 향해 묻는다.

“뭐냐, 너?”

“그러는 넌 뭔데……?”

“…….”

“…….”

둘은, 그때야 불쑥 깨달았다.

야마토가 동시에 목숨을 노렸다면, 둘은 야마토가 아님을.

“쯔.”

그리고 혀를 찬 척위준은 겉옷을 벗어 던져주곤, 그녀를 챙겨 탈출을 감행한다. 여기까지가 대사의 끝이다.

“후…….”

다시 눈을 감은 남주영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치 감정의 잔향을 뱉어내는 것 같았다. 지영도 감정을 정리했다. 짧은 신이지만, 확실히 몰입했다. 눈빛이 확실히 받쳐주니, 감정 잡기도 수월했다.

‘연 누나랑은 완전 정반대의 스타일이네.’

이연은 철저한 연습으로 다져준 기술파다. 흔히 말하는 연기 스킬을 극한으로 갈고닦아 가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딱 봐도 남주영은 그쪽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남주영이 지영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네?”

“저기, 연기 괜찮았나요?”

“네, 잘했어요. 영어 발음은 저보다 훨씬 좋던데요? 저도 더 많이 연습해야겠어요. 차이가 너무 나네.”

“아, 진짜요?”

“영어는 어디서 배웠어요?”

“저 언니랑 살려고 한국 온 지 이제 2년 됐어요. 부모님은 아직도 미국에 계시고요.”

“아아, 역시.”

나이 차이가 있는 친언니 남선아를 믿고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연예계를 두드리는 중이고.

“그런데 그 딸깍? 그건 뭐예요?”

지영이 묻자 남주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게…… 제가 감정 몰입을 잘 못 해서요…….”

“아하, 이해했습니다.”

지영은 거기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대번에 이해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맹하고, 어리바리하다가도 감독이 액션 사인만 내면 사람이 180도 돌변하는. 그런 배우는 심지어 연예계에 적지 않았다.

일종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자기가 정한 특정한 신호에 맞춰. 남주영의 경우에는 그게 지영이 들은 딸깍 소리고. 그 소리 자체가 신호다. 불이 켜진다는 신호. 남주영은 그 소리에 맞춰 본래의 얼굴에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힘든 거냐고? 이해만 받으면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브라보! 하하! 딱 제가 원한 느낌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지영은 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오늘은 느낌만 보는 거다. 그의 까다로운 디렉팅이 시작되면 또 다르겠지만, 당장 느낌만으로는 일단 통과인 거다. 적어도 좀 전 둘의 합은 다니엘의 감각에 맞는 연기가 펼쳐졌다는 뜻이었다. 그것만 해도 오늘 이렇게 모인 보람은 차고 넘쳤다.

“합은 이만하면 됐고, 이제 일정을 러프하게 짜봅시다.”

다니엘의 말에 이번에 나선 건 임은진과 남선아였다. 스케줄 정리는 둘의 영역이었고, 지영은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돌아갔다. 이제 시합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원래 있던 스케줄이었는지 다니엘 화이트는 풀메이크업에 의상까지 차려입은, 완전 무장한 남주영과 함께 공식 석상에 나서 인터뷰했고, 이는 또 대단히 화제가 됐다. 뭐만 하면 아주 그냥 화제의 중심이 되는 강지영은 다시 수일의 시간이 흐른 뒤,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올해 세계 선수권이 열리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