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98화
498화. 왕의 귀환(7)
헐리우드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분주한 스태프, 열심히 대본을 숙지하며 동선을 확인하는 배우들, 이 전부가 인종이 다르다는 것,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났다. 지영은 영어에 능숙하지만, 그렇다고 커다란 미국 땅의 영어 전부를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통역이 항상 같이했는데, 그게 확실히 어색했다. 영어와 한글이 주는 미묘한 차이. 특히 한글은 표현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다. 글자 하나에 뜻이 180도 바뀌는 것도 흔한 만큼, 의사소통에 역시 차이가 좀 났다.
하지만 통역사가 금방 적응하며, 제대로 의미를 전달받자 지영도 같이 적응했다.
“여기서 이쪽으로 돌아서, 니샷부터 땁니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옵니다. 바스트를 넘어, 풀샷을 잡으면 그때 미소를 지으면 됩니다.”
체이서의 연출은 다른 사람이지만, 지영이 적응하기 쉽게 이번 추가 신 연출만큼은 다니엘 화이트가 맡았다. 사실상 월권에 가까운 일이다. 자기가 연출하는 작품을 남에게 넘긴다는 것은 아무리 여기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됐다고 해서 지영도 좀 놀랐다.
하지만 그래도 지영에겐 좋은 일이었다.
다니엘 화이트와도 합을 맞춰본 적이 없는데, 원래 체이서 연출이 메가폰을 쥐었으면 지영이라고 해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배려 속에서 신 준비가 한창이었다.
제임스와 제니퍼가 먼저 신 촬영에 들어갔다. 미국의 액션은 역시 한국과는 결 자체가 달랐다. 한국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액션이 주를 이룬다. 재의 액션도 그랬다. 하지만 미국의 액션은 다이내믹하고, 화끈했다. 그러다 보니 또 시원시원했다.
커다란 액션.
그래서 주변 기물이 산산이 부서졌다. 터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제임스의 액션이 그렇다면 제니퍼의 액션은 전형적인 암살자의 액션이었다. 미블의 미망인처럼 시원시원하기도 하지만, 여성이란 캐릭터성을 살리는 액션이었다.
지영은 그걸 흥미롭게 지켜봤다.
무신 척위준엔 여성 캐릭터가 소월영 캐릭터를 빼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어가 주는 뜻 그대로, ‘신’적인 무력을 선보이기 때문에 압도적인 파괴력을 선보인다. 따라서 재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절도 있는 움직임보단 묵직한 칼로 짓이긴단 느낌이 강하게 드는 액션이다.
“미스터 강.”
그런 다름을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미국의 액션 스쿨 감독이 지영을 찾아왔다. 이미 인사는 나눈 사이였다. 무신 척위준의 액션을 맡을 감독이니 앞으로 친해져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네, 브레드.”
“준비 끝났는데, 이제 합 좀 맞춰볼까?”
“네.”
지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한쪽에 준비된 연습장으로 향했다. 넓은 공터에 새까만 복면을 쓴 액션 배우들이 보였다. 이 사람들과는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좀 걱정됐다. 세계의 모든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지만, 그래서 반대로 인종차별이 가장 극렬한 나라가 또 미국이다.
피부색으로 차별하거나, 깔보는 일?
이 바닥엔 정말로 흔한 일이다. 스포츠 세계에서의 인종차별은 영구 자격 정지도 때릴 만큼 엄격하게 관리하지만, 영화판은 전혀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영은 가볍게 인사 후, 눈빛을 살폈다. 인원은 열. 그런데 걱정했던 것처럼 불만을 품은 눈빛을 한 배우는 없었다. 아무리 복면을 쓰고 있어도, 인사할 때의 느낌만 봐도 그건 딱 감이 잡힌다. 그러나 지영이 동양인이라고 깔보는 느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면서도, 신기하단 생각을 하자 브레드가 다가와 소품 칼을 건넸다.
지영은 그걸 받아 바짝 들어 살펴봤다.
나의 무사님에서 몇 년간 들었던 소품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재가 쓰던 칼은 일반적인 도검이다. 얇고, 부드러운 느낌이 강한. 그러나 이건 정반대였다. 이건 마치 언월도 같았다. 창대가 없는 언월도. 넓은 면적에 반월로 곡선이 예쁘게 빠졌지만, 그만큼 파괴적인 느낌이 강한 무기의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무게가 좀 익었다.
재가 쓰던 도와 비교하면 적어도 두 배였다. 땅. 도면을 슬쩍 튕겨봤다. 맑은소리가 날 정도고, 그런 소리가 난다는 건 단단함이 생각 이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영이 무기 소품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이유는, 무신 척위준은 이거로 적을 휩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짓이긴단 느낌으로. 따라서, 잘못하면 크게 다친다. 합이 맞지 않아 만약 이게 그냥 몸을 때려버리면 재가 쓰던 칼로 잘못 때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이건 살도 가를 거고, 뼈도 상하게 할 무기였다.
그래서 지영은 긴장했다. 정신 안 차리면 누군가를 크게 다치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지영이 다짐, 각오하는 것을 브레드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받아들이며 기다려 줬다. 지영이 그 시간을 끝내고 브레드를 바라보자.
“준비됐나. 무신?”
이름이 아니라 무신이라 불러서 지영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브레드는 지영에게 소품 칼을 넘겨받아, 먼저 시범을 보였다. 일단은 슬로우모션이다. 천천히 쾅. 재의 액션관은 역시 다르다. 천천히 움직였지만, 재는 그걸 빠르게 하면 어떤 모습이 나올지 감을 확 잡았다.
무신 척위준이란 캐릭터가 그렇다.
재처럼 특별한 기교를 섞는 게 아니라, 그냥 힘으로 찍어누른다. 최초의 무신은 일본의 731 세균전 부대의 생체실험을 받게 된다. 그때 들어온 바이러스가 척준경이란 무신의 DNA와 결합하며, 괴악한 형태로 진화한다. 당연히 이때 죽음의 위기를 겪지만, 끝끝내 견뎌내며 최종적으로 근력, 민첩성. 오감을 포함한 모든 것이 극도로 증폭되어 버린다.
일반인의 몇 배에 달하는 힘.
똑같이 몇 배에 달하는 속도. 다시 똑같이 몇 배나 예민한 오감. 그리고 그 오감의 진화로 새롭게 얻은 초능력, 육감까지.
이 힘을 바탕으로 그냥 찍어 누른다.
브레드의 액션이 그렇다는 걸 보여줬다. 원작 코믹스 속에서도 척위준은 특별한 도와 특별한 갑주로 적을 압살한다.
브레드는 천천히 지영에게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곤, 두 번째는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가볍게 움직여 그냥 쾅! 액션 배우가 든 칼과 부딪치며 깡! 소리가 참 청명하게도 났다. 하지만 속도를 올린 것만으로도 확실히 파괴적인 느낌이 한층 돋보였다.
퍽!
그다음 가슴을 걷어차는 브레드. 그리고 칼을 그대로 좌로 짝 뿌리듯이 휘둘렀다. 그에 달려들던 액션 배우가 고개를 홱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렇게 다시 한번 시범을 보인 브레드는 마지막으로 더 빠르게 움직였다.
거의 뛰듯이 달려들어 도끼를 찍듯이 콱!
깡! 실제로는 검이 막히지만, 대본에는 사실 저 일격이 검과 함께 적을 쪼갠다고 나온다. 그건 CG로 입히고, 갈라지기 전의 적을 걷어차고, 다시 좌로 촤악! 지영은 그 궤적과 움직임을 전부 눈에 담고, 익혔다.
“자, 해보겠나?”
“네.”
고개를 끄덕인 지영은 칼을 넘겨받아, 실전 연습에 들어갔다.
깡!
기본적인 속도다.
상대 배우가 충분히 받아줄 수 있는 레벨의. 그리고 다시 좀 더 빠르게. 마지막엔 거의 전력으로. 그렇게 연습을 끝내자 브레드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브라보. 역시 운동선수라 그런가? 익히는 게 정말 빠른데?”
“고마워요. 브레드가 친절하게 구분 동작으로 나눠 시범을 보여줬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하하, 그래도 그 기본적인 것을 못 해서 애먹이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왜 내가 박수 치며 좋아하는지 알 거야. 하하!”
“하하, 그래요?”
“그럼! 그렇고말고! 하하!”
지영은 그래요? 하고 되물었지만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유도의 모든 기술을 처음 배울 때는 전부 구분 동작으로 배운다. 업어치기만 해도 하나에 깃을 잡아 공간을 만들고, 둘에 발을 찍고, 셋에 팔꿈치를 상대의 겨드랑이에 넣으며 몸을 돌려 앉고, 넷에 일어나며 메치기 쿵. 모든 이런 식으로 구분 지어 가르친다. 심지어 스텝까지 세 가지로 나눠서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재능이 보인다.
재능이 좋은 친구들은 사실 몇 번 안 보여줘도 알아서 잘한다.
그냥 딱 보고 딱, 하는 거다.
하지만 재능이 부족한 친구들은, 이 구분 동작으로 나눈 업어치기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시간을 참 많이 잡아먹는다. 이게 이해를 못 해서가 아니라, 머리로는 기억하고 이해하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거다.
지영은 그 정반대였다.
지영은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을 몸으로 따라 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인간이다. 두세 번이면 어설프고, 좀 느릿하더라도 제대로 따라 하는 게 가능했고, 그걸 본 당시 체육관 관장이 지영을 선수로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지영에게 이런 합을 보고 따라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액션은 브레드의 액션이라는 것을.
“브레드.”
“응? 왜 그러나?”
“이제 좀 제 느낌대로 커스텀 해봐도 될까요?”
“동작을? 그럼, 물론이지!”
“고마워요.”
“고맙기는! 하하, 자네만의 느낌이 들어가야 액션의 완성이 되는 거야. 어떻게 할지는 정했나?”
“네, 생각한 것은 있어요.”
“오오, 얼른 보고 싶군!”
“하하, 지금 할 거니까 보채지 마세요.”
말했듯이, 지영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지영은 액션과 캐릭터는 서로 맞물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신 척위준이란 캐릭터는 겉과 속이 다르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수놓고, 그 죄책감에 슬퍼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얼굴엔 언제나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풍류 공자다.
절대 자신의 아픔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원작에서는 어느 것 하나 거짓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척위준의 것이란 뜻이다. 그런 척위준이라면, 그건 전투에서도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만화는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 없다. 특히 미국의 코믹스 같은 경우는 한국의 만화와는 결이 다르다.
척위준의 파괴적인 무력은 보여줘도, 그 전투에 캐릭터와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보지 못했다. 지영은 그걸 표현해 볼 생각이었다.
‘건들거리는 건 아니야. 좀 더 부드럽게. 바람처럼 움직여서…… 마지막에 힘을 집중한다는 느낌으로.’
풍류라는 단어에서 지영은 이 같은 느낌을 캐치했다. 풍류라는 뜻은 멋과 운치가 있는 일이나, 그걸 즐기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 풍류의 풍자는 바람 풍자다. 즉, 바람처럼 자유롭게 멋과 운치를 즐긴다는 것이다. 현대로 가져오면 사실 바람둥이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단어다. 그러나 지영은 그걸 전투 장면에 접목할 예정이었다.
브레드가 보여준 파괴적인 면만 부각한 액션 말고, 부드러운, 바람처럼 강력한 일격을 부각한 액션으로.
지영은 그걸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좀 더 부드럽게, 물 흐르듯이 다가가서, 가볍게 툭 치는 것처럼 내려찍었다. 하지만 타점에 떨어지기 직전에 힘을 강하게 실었다.
따앙!
지영의 칼을 막은 액션 배우의 눈빛이 대번에 변하는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타점에서 힘을 집중하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가슴에 발을 살짝 대서, 민 다음 팔을 쭉 뿌렸다.
“오!”
브레드는 그렇게 변한 액션에 작은 감탄을 흘리며 눈을 빛냈다. 액션 외길을 달려온 그에게는 어디가 변했는지, 명확히 보인 것이다. 이어진 지영의 액션에 그는 고개를 계속 끄덕이며 더욱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액션 배우 열이 전부 누울 때까지 신을 끝내고 나자. 짝짝짝! 박수를 크게 쳤다. 흡족한 그 표정을 보면서 지영은 안도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의 액션을 멀리서 보던 다니엘 화이트의 눈빛은 가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1시간 뒤, 무신이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지영은 촬영을 훌륭하게 소화했고, 재촬영 없이 4일 만에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입촌.
배우로서의 짧은 스케줄을 끝낸 지영은 선수로 돌아와 세계 선수권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