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97화
497화. 왕의 귀환(6)
후우.
“하, X바.”
반칙을 받은 구혁의 입에서 흐른 나직한 욕설. 그 욕설은 지영을 향한 욕설은 아니었다. 그리고 심판을 향한 욕설도 아니었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함 때문에 나온 욕설이었다.
심판도 그걸 아는지, 작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이해하고 시합을 재개했다.
하지메!
후! 숨을 강하게 토해낸 구혁이 다시 움직였다. 강하게 푸쉬를 걸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지영은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빠르게 잡고, 좌우로 돌며 취약한 하체 공략. 구혁 정도의 피지컬이면 그냥 서 있을 때는 아무리 발기술을 걸어도 흔들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구혁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왜? 지영도 나란히 서 있으면, 심판은 그쳐를 한 다음 지도를 줄 거기 때문이었다.
그럼 반칙 두 개인 구혁은 반칙패다.
그걸 아니까 가만히 서서 받을 수가 없는 거다. 게다가 상대는 강지영이다. 흐름을 유리하게 가져가는데 이골이 나다 못해, 귀신 같은 인간인 거다. 틈을 주면 거의 무조건 패배는 확정이다.
그러니 느긋한 경기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럼 할 수 있는 건? 공격이다. 상대가 카운터의 귀재라는 걸 알아도, 공격밖에는 답이 없었다. 구혁의 머리에서 그렇게 결론이 나며, 그는 깃을 잡자마자 말아업어치기를 걸었다.
한때 금지 기술이 되었다가 다시 풀린 이후, 여전한 악명을 자랑하는 기술이다. 변칙 기술계의 끝판 격으로, 걸리면 그냥 끝이다. 기술이 제대로 걸리지 않아도 체중으로 감아버리면, 대부분은 다 넘어간다.
하지만 지영은 아예 구혁이 말지 못하도록 막았다. 힘으로 버틴 다음, 그냥 뜯어냈다. 아무리 힘이 상대가 더 좋다고 해도, 원심력과 힘이 제대로 받기 전에, 몸을 말기 전에 등에서부터 막아버리면 기술은 파훼될 수밖에 없었다.
“큭! 이익!”
지영이 힘으로 버티자, 이를 악문 구혁이 사력을 다해 몸을 감았다. 지영은 그걸 가볍게 파리 쫓듯이 깃을 뜯어버렸다. 그러자 쿵! 하며 매트에 엎드려 버린 구혁. 그는 바로 일어나서 몸을 돌려 지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지영은 바로 코앞에 있었으니까.
제대로 일어나 허리를 세우기도 전에 지영은 목을 감으면서, 그대로 밭다리를 찍었다. 홰액! 파앙!
거의 반원을 그리며 뒤로 날아간 구혁은 어깨부터 뚝 떨어져서 굴렀다. 일반인이었으면, 저 정도면 최소 전치 오에서 육 주다. 최소에 최소로 잡아도, 정말 운이 좋아서 어깨로 떨어져도 그 정도는 다친다.
하지만 유도 선수들은 어느 순간에 떨어져도 반사적으로 낙법 치는 게 몸에 익었다. 그래서 다치진 않았다. 다치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구혁의 시선에 심판이 팔을 가로로 쭉 뻗고 있는 게 보였다는 건 문제였다. 그에게만큼은.
“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이는 구혁.
와자리!
심판의 선언을 듣기도 전에 지영은 자리로 돌아가며 띠를 풀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건 한판을 줘도 무방하다고. 아무리 심판이 지영이 싫어도, 절반은 줘야 한다고. 그 정도도 안 주면, 저 심판의 자질이 심히 문제든가, 아니면 뒷거래를 의심해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심판은 절반을 줬다.
한판이 아니어도 괜찮다.
절반도, 어차피 게임은 끝나니까.
도복을 고치고, 승자 선언 뒤에 지영은 구혁과 악수하고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구혁이 바로 다가왔다. 졌지만 그의 표정은 크게 나쁘진 않았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투기 종목 선수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기본 소양이었다.
“야, 하체만 조지게 공략하다가 갑자기 밭다리 찍기 있냐?”
“밭다리도 하체 공략이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 근데 형 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뭔 어후.”
“죄송해요. 혹시, 다친 것 같아요?”
“다치면 뭐. 치료비라도 내주게? 시합하다 보면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냐. 괜찮어. 근데 너 진짜 이주 훈련한 거 맞냐?”
구혁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각도 다 못 찾았었어요. 근데 아까 붙은 애, 장범. 걔 때문에 경기 감각이 많이 돌아왔고요. 형도 조심해야겠던데요? 걔, 잘하더라고요.”
“어, 봤어. 너 다운 버전이던데?”
“지금은 그 정도인데, 익숙해지면 저만큼 할 것 같아요.”
“와, 지랄이네. 강지영이 둘? 하.”
혀를 찬 구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가, 지영의 어깨를 툭 치곤 대기실로 먼저 갔다. 아무리 웃어도 패배한 직후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가 떠나고, 지영은 대기실 근처에서 남은 준결승을 보기 위해 잠시 남았다.
그런데.
쿠웅-!
어! 어?
경기 시작 20초.
이우진이 모두걸기에 쓸려 하늘을 날았다.
* * *
결승전은 허무하리만큼 쉬웠다.
상대는 이우진에게 20초 만에 승리했지만, 그건 정말로 운이 겹쳐서였다. 실제 실력은 확실히 이우진이 위였다. 그런 이우진이 패배해 패자결승으로 떨어지며 구혁과 함께 나란히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영은 2분 만에 상대를 허벅다리 절반, 빗당겨치기 절반으로 우승을 확정 지었다. 그리고 이성진을 포함해 황금세대 전체가 선발전 1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는 당연하게도 신문에 걸렸다.
왕의 귀환.
기권을 제외하곤 무패 전적을 자랑하는 강지영을 왕이라 칭한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호칭이 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1부터 무패 전적이다.
공식전 무패 전적.
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비록 일본에 200승이 넘는 연승 기록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옛날이다. 유도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에, 유도에 익숙한 종주국의 선수가 세운 기록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기록은 맞으니까. 하지만 현대 유도에는 애초에 연승 기록이 나오기 너무 힘들다.
이유는, 분석이 너무 정밀해진 탓이다.
옛날처럼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데이터 분석이 이루어진다. 상대의 피지컬은 물론 주력 기술의 파훼법에, 공략법까지 전부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수십 개의 경기 영상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철저하게 파헤치니, 연승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그걸 뛰어넘는 천재들이 종종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무패.
무적.
그 단어가 주는 로망을 제대로 실현한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의 전적 자체가 그리 많진 않았다. 하지만 굵직한 대회가 포함되어 있어서 주목받았다.
아시아 선수권.
올림픽.
그 외의 가노컵과 파리 오픈까지.
이 모든 대회가 메이저 대회다. 그 모든 대회에서의 승리라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받는 지영은 시합이 끝나고 이틀 뒤, 미국에 도착해 있었다. LA에서 다니엘 화이트와 만난 지영은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지영이 미국에 온 이유는, 체이서의 촬영을 위해서였다. 지영의 합류를 위해 개봉 순서까지 바꿨을 정도로 레인 스튜디오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대회가 끝나 욱신거리는 몸으로 다시 비행기에 올라 미국으로 날아왔다. 오면서 대본은 숙지했다.
등장 타임은 3분에서 5분 내외.
이 짧은 신을 위해 개봉일도 뒤로 미룰 정도이니,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건 정말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런 지영을 다니엘 화이트가 직접 마중 나와 안내까지 했다.
“여깁니다. 지영.”
예전에 미국에 왔을 때 받은 숙소와 정말 비슷한 느낌의 숙소지만, 이쪽이 조금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굳이 따지자면 디트로이트 쪽은 생활감이 편한 느낌이고, 이쪽은 도시의 화려함을 강조한 느낌이었다. 뭐 둘 다 어떻든, 숙소는 괜찮았다.
지영의 팀 전체가 따로 개인실을 써도 될 정도로 숙소도 많았고, 미국 최대의 경호업체가 지켜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넓은 거실에 모였다.
그리고 곧장 다니엘 화이트와 함께 온 레인 스튜디오의 직원과 지영은 피팅부터 시작했다. 의상 제작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 저녁부터 촬영이 있고, 미리 만들어놓은 의상을 지영의 몸에 딱 맞춰 수선하기 위해서였다.
피팅이 끝나고, 지영은 다시 다니엘 화이트를 포함한 직원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거기서 지영은 레인 스튜디오의 주연들을 만났다.
“와…….”
같이 온 지영의 팀 직원이 순간 넋을 놓으며 탄성을 흘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이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는 그만큼 유명한 여배우가 또 있었다.
제임스 드류모어와 제니퍼 진.
미블의 미국대장과 미망인 캐릭터와 비슷한 캐릭터를 맡은 주인공들이었다. 특히 제임스보다는 제니퍼 진의 인기가 정말 많았다. 정말 호불호가 없는 깔끔한 외모와 미블 작품 말고, 다른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했다. 그녀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배우가 됐는데, 그전까진 샌드위치 가게의 점원이었다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진짜 그녀를 인기 있게 만든 건, 그녀의 마음이었다.
사치가 없다.
이미 성공해 재력을 쌓기 시작해 사는 곳은 안전 때문에 당연히 베벌리 힐스로 이사했지만, 그 외는 사치를 정말 부리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그녀가 살았던 지역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편안한 식당에서 정말 멋이라고는 조금도 부리지 않은 편안한 차림으로 지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우!”
짝짝!
리액션이 큰 제임스 드류모어가 지영을 보더니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반겼다. 그러곤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영은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하하, 반갑습니다! 드디어 이렇게 우리 미스터 강을 보게 되네요! 그거 압니까? 무신이 제작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이 친구 다니엘에게 미스터 강을 추천했다는 것을요?”
다다다.
흥분한 그가 마구 쏟아낸 말을 지영은 다행히 잘 알아들었다.
“그래요? 고마워요, 제임스.”
“이봐, 제임스. 인사할 시간은 좀 주자고? 그리고 말은 끝까지 해. 그때 당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도 이미 그를 생각 중이고, 딴 배우는 안 뽑을 거라고 말했잖아.”
“아? 그랬나? 하하!”
제임스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딱히 눈빛에 색깔로 인한 차별은 보이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일단 합격이다. 제임스가 한 걸음 물러나자 그 옆으로 제니퍼 진이 섰다. 빙긋, 하고 웃는데 그 웃음이 정말 사람을 편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반가워요. 지영. 음, 지영 강?”
“지영이라고 해도 되고, 강지영이라고 해도 돼요. 미스 제니퍼.”
“아, 강, 강지영.”
강이 아니라 ‘캉’으로 들렸지만, 지영은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이름을 똑바로 불러서 인사하는 제니퍼와도 악수와 볼 키스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동그란 의자에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잘 볼 수 있게 되자, 지영은 미국에서 작품을 찍는다는 실감이 났다.
지영이 이곳으로 온 이유와 이 두 사람을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극 중에서 이 둘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홍콩을 방문하고, 극 중 무신 척위준도 악의 근거지를 찾기 위해 홍콩을 방문했다가, 먼저 도착한 둘이 위기에 빠진 걸 구해주는 장면이다. 가볍게 툭 치고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 장면은 극의 중후반부에 쓰여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짧은 도움을 주고, 쿠키 영상에 등장한다.
이 장면은 전부 해봐야 3분에서 5분을 넘기지 않는다.
짧은 출연이지만, 임팩트가 커야 했다. 그래서 합을 맞출 배우들과 오늘 미리 만나는 거다. 최소한 안면은 익혀 놓으려는 다니엘의 배려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헤어진 지영은 대본을 보며 감을 대사를 외웠다. 비행기에서 대사를 외웠고, 길지 않아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일단 이 캐릭터는 나의 무사님의 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재는 칙칙한 느낌이다. 참 이름다운 느낌이 난다. 그러나 척위준 캐릭터는 정반대다.
척위준은 쾌남이다.
시원시원하다. 살인의 무거움을 통렬히 느끼기에, 오히려 정반대로 얼굴엔 웃음이란 가면을 뒤집어쓴다. 히어로가 된 자신을 숨기지도 않고, 그 인기를 누릴 줄도 안다.
그러면서 적에겐 자비 없이, 반드시 ‘죽음’을 선사한다.
그게 무신 척위준이다.
그렇기에 재의 느낌은 하나도 쓸 수 없다. 재와 똑같이 ‘칼’을 쓰지만, 재는 기술이라면 척위준은 파괴력이다. 가른다는 느낌보단, 짓이긴단 느낌이 강하단 뜻이다. 당장 몇 신이니까 하겠다고 한 거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면 준비할 게 많았을 게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가공되어 온 의상을 입어봤다. 붉은색 바탕의 한복과 비슷하다. 기르고 기른 머리를 질끈 끈으로 묶어주니, 거울 속엔 웬 처음 보는 풍류 공자가 서 있었다. 어색해서 지영도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지만, 또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레이트!”
휘이익!
꼭 보고 싶다며 온 다니엘과 제임스, 그리고 제니퍼가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채로 지영은 제임스, 제니퍼와 사진을 수십 장은 찍었다. 하지만 다니엘이 올리면 레인에서 쫓아버리겠다는 협박에, 단 한 장도 SNS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게 피팅이 끝나고, 저녁.
지영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