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96화
496화. 왕의 귀환(5)
힘이라면 솔직히 지영도 체급에서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전체적으로 따져도 상위 10% 안에는 충분히 들어갔다. 하지만 상위 10%와 상위 1%의 차이는 아주 극명했다. 지영은 그걸 잡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구혁은 어깨를 쫙 접어서 등깃은 내주되, 가슴 깃과 소매 깃 만큼은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잡기 포지션을 잡았다. 등을 잡고 들어가는 기술은 거의 대부분은 허리 기술이다. 그리고 이 허리 기술은 상대와 무조건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허리 기술을 제외하면, 뒤로 상대를 넘기는 백드롭 형태의 기술인데, 이건 지영이 그다지 잘하는 쪽이 아니었다.
여기에 노림수가 있었다.
‘허리 기술 차려고 하면 무조건 뽑으려고 들 거야.’
툭.
손을 가볍게 쳐내며 지영은 구혁의 노림수를 파악했다. 구혁은 피지컬을 극단적으로 올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근력을 중점으로 올린 것 같았다. 이렇게 힘이 좋아진 구혁은 지영이 허리 기술을 걸면, 버틴 다음 그대로 뽑아서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자기가 짜올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들고 나온 것 같았다.
그래서 지영은 당연하게도 그걸 받아주지 않기로 했다.
힘이 확실히 좋다고 게임이 끝난 건 아니다.
구혁의 힘이 지영을 압도한다면, 지영은 반대로 리치에서 앞서고 있었다. 구혁보다 적어도 손바닥 하나는 더 있는 정도다. 원래 지영이 팔이 긴 편이고, 반대로 구혁은 짧은 편이라 그랬다. 이 차이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잡기에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전략은 정해졌다.
툭, 툭, 홱!
자세를 낮추며 빠르게 전급해 잡기를 거는 지영. 구혁은 그런 지영의 공세에 곧장 물러났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지영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예전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했다. 근력을 극단적으로 올리면, 필연적으로 속도는 떨어진다.
이상적인 유도 선수의 피지컬에서, 한쪽만 올렸으니 그건 당연한 부작용이었다. 반응이 늦어졌다는 것도 지영에겐 희소식이었다.
툭.
물러나는 구혁을 따라가며, 지영은 강하게 모두걸기를 쓸었다. 타이밍이 모든 것인 기술. 상대가 두 발을 매트에 대고 있는 순간엔 쓸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중심이 이동 중일 때 쓸어버리면 그대로 하늘로 붕 띄워버릴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 모두걸기가 제대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먹혔다. 홱! 떴다가 뒤집혀 떨어지는 구혁. 쿵! 소리가 나며 구혁이 엎어지듯이 떨어졌는데도 지영은 심판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냥 딱 봐도 점수는 아니다. 이걸 절반을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였다.
그리고 역시 어떤 제스처도 없었다.
지영은 굳히기를 잡지 않고 일어났다. 어차피 굳히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잘하지도 못했고.
맛테!
두 선수가 자리에 서서 도복을 고치자.
하지메!
시합이 재개됐다.
지영은 자세를 낮췄다. 잡히면 날아가니 중심은 무조건 아래에 있어야 했다. 기술을 걸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맞붙어서 거는 기술은 피해야 했다. 그걸 기본으로, 지영은 유효 기술 점수를 만든 걸 이용하기로 했다.
이게 지영의 특기 중의 특기다.
시합 운영. 운영의 묘를 극한으로 살려 경기를 풀어가는 것.
“혁아! 붙어야 된다! 밀고 올 거야!”
동의대 코치가 지영의 스타일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렇게 오더를 내렸다. 그에 앞으로 나오던 구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힘으로 밀고 올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유도는 유능제강의 묘를 극도로 살린 스포츠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거기에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에도 특화되어 있다. 힘으로 밀고 온다? 그럼 그 힘을 이용하면 된다.
툭. 밀고 오는 힘을 받아서 발목 받치기.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건 기술에 구혁의 몸이 휘청거렸다. 넘어가진 않았지만, 중심은 무너졌다. 지영은 반사적으로 거기에 빗당겨치기를 꽂으려다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구혁이 양손을 펼쳐 허리를 감으려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빗당겨치기도 상대와 붙는다. 그것도 등을 뒤로 내주면서. 제대로 걸리면 유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술이 되지만, 제대로 안 걸리고 허리를 잡히면, 그냥 백드롭으로 뽑힌다.
유도의 모든 기술엔 되치기가 존재하고, 지영은 그걸 카운터를 치는 데 이골이 난 선수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구혁의 노림수를 단숨에 파악하곤 기술을 걸다 말고 그대로 빠져나왔더니, 그 찰나에 구혁의 눈가에 아쉬움이 스쳐 가는 게 보였다.
‘노렸네?’
이건 계산한 거다.
자기가 밀고 오면 그걸 받아서 발목 받치기로 중심을 무너뜨리고 볼 거라는, 지영의 시합 스타일을 철저하게 해부해서 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지영이 만약 소매깃만 잡고 빗당겨치기를 냅다 꽂았으면, 구혁은 그대로 허리를 감아서 뽑았을 거다.
이 모든 게 계획된 거다.
‘골치 아프겠는데?’
본능으로 유도하는 선수만큼 쉬운 선수도 없다. 왜? 하다 보면 스타일이 눈에 익기 시작하고, 그러면 지영처럼 매우 이성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선수가 이것저것 미끼를 내던져 낚아채기 쉽기 때문이다. 구혁은 그런 본능에 가까운 선수였다. 워낙에 재능이 좋고, 신체 조건과 기술도 좋아서 본능으로도 충분했던 선수였다.
물론 아예 이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비율로 따지면 7대3에서 8대2 정도였다. 물론 낮은 게 이성이고. 그런 구혁이 지금 철저하게 이성적인 경기를 풀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비율을 정반대로 바꿨으니, 이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의 예상대로 경기가 흘러갔다.
서로 크게 기술을 건 것도 없었다. 철저한 간 보기 게임. 보는 관중들도, 선수들도 가장 재미없다고 평가하는 게임. 보통 그렇게 평가하는 게임인데, 경기를 보는 눈이 있는 관계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눈치가 진짜 귀신이네.”
“혁이가 선발전 준비로 저거 하나 내내 연습했는데, 와. 거리 안 주는 거 봐라.”
“강지영은 실력도 실력인데,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눈치가 너무 좋아. 상대의 노림수를 너무 잘 파악해. 그리고 그 노림수를 역이용하는 건 아예 이골이 났고.”
“그러니까 사기라는 소리를 듣지. 진짜 너무하네…….”
동의대 선수들의 한탄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강지영은 정말 거리를 절대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반칙을 받지 않는 선에서, 거리를 유지하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먹이를 노리는 인파이터와 그걸 노리고 짓이겨 들어오는 인파이터의 턱을 쪼갤 틈을 노리는 아웃 파이터의 경기 같았다.
하지메!
연장전이 시작됐다.
후.
지영은 구혁을 바라봤다. 눈빛이 아직 죽지 않았다. 자기가 노렸던 경기를 풀어가지 못했는데도 크게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사람 같았다. 지영은 이 경기를 위해, 구혁이 얼마나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준비했는지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필승의 각오, 다짐.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배려해 줄 수는 없었다.
체력?
그건 자신 있다.
장범과의 경기로 호흡도 완벽하게 트여서 10분을 넘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니까. 구혁의 체력 또한 만만치 않을 거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번 경기는 어차피 한 방에 끝난다. 이미 지난 4분간 반칙 하나를 더 먹이기 위해 지영도 꽤 노력해 봤는데, 구혁은 그 타이밍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괜히 더 무리하게 몰아붙이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아주 높이, 훨훨.
그걸 피하려면, 지금처럼 하는 게 최선이다.
거리를 주지 않고, 반칙을 받지 않고. 상대가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지영은 그때를 인내하며 기다렸다.
툭.
가슴 깃을 잡자마자 쳐내는 구혁.
그리고 역으로 손을 뻗어서 지영의 가슴 깃을 잡아 왔다. 지영은 그걸 뜯어내지 않았다. 대신 교차시켜, 위로 구혁의 가슴 깃을 잡았다. 하지만 그 포지션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구혁은 다시 뜯어냈다. 업어치기 선수는 기본적으로 아래로 잡는 게 좋다. 그래야 겨드랑이 안쪽으로 팔꿈치를 넣으며 파고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위로 잡히면 기술에 걸릴 위험도가 확 증가한다.
거기에 위로 잡으면 상대의 기술을 끊기 좋아서, 방어 자체도 위가 더 좋았다. 그걸 아니까, 위로 잡는 걸 그냥 두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위치에 따라 포지션 상 우위가 정해져 있기에 잡기는 중요하다.
지영은 그걸 잘하지만, 선호하지 않는 거고.
그래서 틈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구혁의 잡기 스타일이 조금 변했다. 조금 더 공격적으로. 원래 경기 중에 스타일을 바꾸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익숙함을 버리겠다는 거니까. 하지만 구혁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사실상 그건 통하지 않는 말이다. 경지에 오른 선수는 어떤 자세로 서도 기본 이상은 충분히 하기 때문이었다.
밀고 오는 힘이 역시 강하다.
탱크처럼 우직하게 밀고 오니, 지영도 쉽게 버틸 수 없었다. 거기에 폭을 좁게 잡고 들어왔다. 계속 밀고 들어오면 아까처럼 지영이 발목 받치기로 돌려버릴 것 같으니, 한 칸씩 전진하고 있는 거다. 전형적인 코너 몰기다. 상대에게 반칙을 유도하기 위한. 하지만 이 정도에 당할 것 같았으면, 운영이 아주 지랄 맞다는 칭찬은 듣지 못했을 거다.
지영은 옆으로 돌았다.
구혁의 앞이 아니라, 등 쪽으로. 앞으로 돌다가는 역으로 빗당겨치기에 당할 수도 있고, 구혁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업어치기에 당할 수도 있었다. 이런 기술은 각도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런 지영의 움직임에 구혁은 후!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밀고 오는 걸 포기했다. 등을 내주는 건 그로서도 좋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맛테!
그쳐.
반칙이 들어올 시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심판은 경고성 그쳐를 외쳤던 건지, 지도를 주지 않고 다시 경기를 시작시켰다. 지영은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영도 그렇지만, 아마 구혁도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지영이 틈을 줘야 가져온 전략을 꺼낼 건데, 그 각도 자체를 아예 주질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다. 구혁은 정말로 많이 준비해왔다. 유도는 상대를 넘기거나, 반칙을 먹여야 끝나는 경긴데 구혁은 그 모든 것을 준비해 왔다. 그렇다면 넘길 방법이 아예 없을까?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유도에 넘어가지 않는 선수는 없다. 넘기지 못하는 상대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공략하면 된다.
철저하게, 집요하게, 오직 하나만.
그러나 구혁의 약점은 없다. 눈에 띄는 약점은.
하지만 그렇다고 구혁의 유도가 완벽한가? 그리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반응 속도. 민첩성. 그게 전반적으로 전부 떨어졌다. 그건 이미 아까도 봐뒀던 터였다. 지영은 그걸 노리기로 했다.
민첩성이 떨어지니, 민첩하지 못하면 피하기 힘든 기술 종류로. 그리고 그 기술을 걸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체를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실행이다. 지영은 빠르게 손을 뻗어 어깨 깃을 잡았다. 먼저 지영이 공세에 나오자 구혁은 그걸 당연히 뜯어냈다. 하지만 그 틈을 노려 지영은 다시 모두걸기를 쓸었다. 아귀힘이 상당한 지영이라, 그냥 뜯어낼 수는 없어서 뒤로 물러나며 뜯었기 때문이다. 물러나는 순간 중심은 당연히 이동하고, 그 타이밍을 노리고 들어간 모두걸기.
투욱!
발바닥이 매트를 쓸며 들어간 모두걸기가 구혁의 중심을 흔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잡지도 않고 쓴 모두걸기라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중심을 잡는 구혁에게 다가간 지영은 대놓고 하체를 노리기 시작했다.
잡고, 상대가 뜯어내기 전에 털어서 안뒤축.
빠르게 파바박! 턴 다음 툭 치는 안뒤축이다. 역시 이것도 넘어가진 않는다. 그래서 지영도 그냥 치는 순간 뒤로 홱! 밀어버렸다.
그러자 뒤로 쭉 밀려 엎어지는 구혁.
꼴사나운 느낌이 있지만,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선수들은 아…… 하고 한탄했다.
“힘 키우면서 반응 속도 떨어진 걸 벌써 귀신같이 눈치채고 이용해 먹네. 그것도 시합 중에…….”
“진짜 눈치 X발…….”
“혁이 힘들겠네……. 이번에 진짜 이 갈고 준비했는데. 하아…….”
그게 몇 번 더 반복됐다.
리치를 이용한 잡기에 이은 하체 공략. 심판은 자비 없이 반칙을 줬다. 이로써 구혁은 지도가 두 개, 지영은 하나였다.
경기의 균형이, 갈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