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71화
471화. 전설로 가는(10)
그런 이치카 씨의 울음을 어른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신기하게, 섣부르게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은 지영의 어머니가 어깨를 토닥이는 거로 위로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아까 속을 털어낸 적이 있어 그런지, 이번엔 좀 빠르게 진정됐다.
하지만 진정됐다고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눈물을 그친 이치카 씨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웠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한두 사람도 아닌 열 명이 훌쩍 넘는 사람 앞에서 울었다는 게 볼이 화끈거리다 못해 터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이치카 씨를 놀리는 표정으로 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안쓰럽게, 혹은 대견하게 이치카 씨를 바라봤다. 그런 눈빛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서러워졌다. 자기가 평생을 살았던 나라의 사람들은 그녀를 마치 더럽고 불경한 것을 보듯이 봤는데, 오히려 생판 남인 이 사람들은 자기를 이런 눈빛으로 봐주고 있었다.
그게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다.
하지만 이치카 씨는 더는 울지 않았다.
꿋꿋하게 보이려고 표정을 정비했다. 그러자 다들 빙긋 웃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질문을 했던 분은 자기를 ‘김지영’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강한결의 엄마며, 황금세대 아이돌 덕분에 일복이 터져 힘들어 죽겠다는 엄살을 떠셨다. 계속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다독여 준 분은 역시 강지영의 어머니셨다. 얼굴만 봐도 일주일간 거의 붙어 다녔던 강지영과 너무 닮아서, 아니라고 하면 솔직히 놀랄 뻔했다.
이후로 황석의 부모님, 임효중의 부모님의 소개도 받았다. 이성진의 부모님은 안 계셨다. 이미 자기 전에 틈틈이 황금세대에 관해 알아봐서, 왜 이성진의 부모님이 안 계신지는 알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그 밖에도 장세리와 이연이 있었다.
자기보다 몇 살 어린 연예인 이연은 이 중에서 당연히 외모로는 가장 빛났다. 그런데 그런 빛나는 외모보단 이연을 제외하면 전부 회사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틈에 끼어 얘기를 듣는 걸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아서, 그게 가장 놀라웠다.
거기에 회사 대표인 장세리도 마찬가지였다.
장세리는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일본에는 없는 인물을 꼽을 때, 언제나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게 바로 골프 여제 장세리기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스포츠 스타는 일본에도 많았다.
그러나 골프 여제 장세리처럼, 피겨 여왕 김연아처럼 세대를 풍미했던 선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선수들의 그늘에 가려 확실한 실력을 입증했어도 가려지기만 했다. 그래서 아침 방송에 일본엔 없는 ‘선수’라는 느낌의 프로그램을 할 때면 항상 손에 꼽히는 게 바로 장세리였다. 거기에 저 사람이 이번에 니시노 하루히와 계약을 해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직 인사도 못 해서, 따로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서로 너무 편해 보였다. 눈치를 보거나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이분들은 정말 사람을 편견 없이 보는구나…….’
연예인이라고 하면, 저런 대단한 회사의 주인이라고 하면 눈치를 볼 법도 한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기도 하면서 관계를 다지지 않았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때때로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도쿄에서도 외로웠고, 교토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편한 관계. 어려움이 생기면 팔 걷어붙이며 돕고, 내가 어려운 일에 처하면 도와달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관계.
일본에서는…… 특히 도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
그녀는 왜 지영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그것도 이해했다.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엄마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 이 사람들의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결이 그러던데, 음식을 아주 잘한다면서요? 이후 한국에 음식점도 열 거고.”
강한결의 어머니가 한 말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네? 네, 그럴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할 줄 알고, 좋아하는 게 요리밖에 없어서…….”
“그래요. 어디서 배운 건가요?”
“제 친정집이 교토에서 큰 온천여관을 했었어요. 어려서 청소며 요리며 도우면서 커서,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거든요.”
그녀는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도쿄에서는 이런 속마음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레미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크는 동안에도 자기가 요리를 잘하고, 부모님이 교토에서 온천여관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창피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단순하게 어른이 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분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강지영은 자리만 만들어줬다.
이곳에 도착해 지금까지, 강지영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자리만 준비해 준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 줄은 예상도 못 해서, 사실 요 며칠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꿈속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교토에서 사실 포기했었다. 특히 딸을 매도해 가던 언론 기사를 볼 때면, 이 힘든 삶을 포기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악물고 슬픔을 참아가는 딸을 보며 겨우겨우 힘을 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강한결이 올 거라는 임은진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땅끝 홋카이도로 이사를 생각했다. 이방인에서, 다시 이방인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강지영의 도움으로, 강한결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지옥이 걷어지고, 천국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그래서 꿈 같은 모든 것이 깨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이번엔 신이 그 소원을 들어줬는지, 꿈은 깨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꿈을 유지하는 게,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요. 장하네. 메뉴야 알아서 잘 정할 거고, 그럼 음식점은 어디에 낼 생각인가요? 서울은 연고도 없고 월세도 너무 세니 힘들 거고, 결국 추천할 만한 곳은 청주 아니면 충주인데, 어디가 좋겠어요?”
“네?”
“쉽게 말하면 청주는 여기 우리 거의 전부가 있고, 충주는 옆에 지영이 엄마가 있는 곳이에요.”
“아…… 그건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레미랑 상의해서…… 아이가 원하는 곳에 자리 잡고 싶어요.”
“그래, 그게 좋겠네요. 너무 성급하게 물어봤네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빨리 결정 못 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휴, 고개 들어요. 누가 보면 내가 혼내려고 한 줄 알겠네!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이 키우는 엄마가 당당해야지, 그렇게 쉽게 고개 숙여서 되겠어요? 아이 교육에도 좋지 않으니까, 그렇게 쉽게 사과하는 버릇은 고쳐야 해요. 알았죠?”
“아, 네. 네…… 죄…….”
“또.”
“…….”
나직하지만 단호한 그 소리에 목이 쏙 들어갔다.
아주 어릴 적, 음식을 가르쳐준 큰 엄마 같은 분이 계셨다. 실제로 큰 엄마라 부르며 따르기도 했었다. 그 큰 엄마는 평소는 너무 인자하신 분이셨지만, 칼을 쥘 때는 호랑이보다도 무서우셨다.
거기에 조금만 정신을 놓고 칼을 놀려도 아주 엄하게 혼냈다. 채소가 제대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지 못한다며, 그렇게 썰어 놓으면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며 매우 크게 혼냈다. 그땐 그게 서러웠는데, 나이를 먹은 어느 순간 자기가 똑같이 레미를 혼낼 때 그녀는 깨달았다. 채소를 쓰지 못해 버리는 게 아까워 혼내는 게 아니라, 딴생각하다가 손을 베일까 봐 걱정해서 크게 혼냈다는 것을.
그 큰 엄마의 느낌이 났다.
“아휴, 언니. 언니 표정이 너무 무섭잖아요. 안 그래도 위축됐을 텐데, 너무 그러지 마요.”
“하, 그러네. 그건 내가 잘못했네. 미안해요, 정말.”
빠르게 나온 사과.
그녀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재밌게도, 또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큰 엄마라 불렀던 분은 어려웠다. 어린아이였던 그때는 주방이나 청소를 조금만 부족하게 해도 혼나기 일쑤라 사실 좀 다가가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무서운 큰 엄마란 인식이 생겼다.
그런데 그때마다 와서 위로해 준 사람이 있었다. 작은 엄마. 그녀는 그 사람을 작은 엄마라 부르며 따랐다. 그분은 언제나 자상했다. 실수해도 혼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해야 해, 여긴 이게 부족해. 하며 친절하게 잘못된 부분을 알려줬다. 친절하게 시범도 보여주시고, 그래서 큰엄마 말고 작은 엄마와 함께하는 게 그녀는 좋았었다.
그랬던 작은 엄마가 강지영의 어머니를 보자 떠올랐다.
지금도 그랬다.
자기 손을 꼭 잡고 있는데, 그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저울추가 기울어지게 했다.
문득, 또래 아이들과 따로 간 레미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함께 간 아이들도, 이렇게 좋은 사람일까?’
무조건 그렇다.
라고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과 함께하니까…….”
“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을 알아들은 자매의 부모님만 의미심장한 미소로 웃을 뿐이었다.
* * *
레미는 정말 신기했다.
이 모든 게 정말로. 눈앞에서 투덕거리는 자매와 자기를 여전히 빤히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저 언니도, 정말 신기했다. 레미는 사실 저 언니를 보는 순간 누군지 알아차렸다. 사실 한국에서도 되게 유명한 사람이었다.
현실판 신데렐라.
일본에서는 아직도 먹히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현실 주인공이 바로 저 언니였다.
이미 일본의 언론이 질리게 조명했었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의 가족사까지, 인생 전반에 걸쳐 이미 전부 알려져 있었고, 그건 레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의 연인이면서, 그 본인은 여전히 공장에 다닌다는.
일본 언론에서 그건 전부 ‘쇼’라고 단정 지었던 주인공이었다.
‘거짓말. 절대 쇼가 아니야.’
레미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언니가 자기에게 보여주는 저 눈빛, 저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말을 못 해 답답해하는. 자기 연인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고 스포츠 스타인데도, 조금도 도도하지 않은 저 사람. 입고 있는 옷은 고급으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기를 정말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고, 책만 좋아하는 본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니까, 오빠가 좋아하는 거구나.’
눈빛이 순진하다 못해 투명했다.
조금의 악의도 없고, 심지어 자기를 불쌍하게 보지도 않았다. 일본에서는 아주 가끔 봤던, 간호사 언니들이 보여줬던 연민도 없었다. 그냥 자기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란 느낌이 났다. 얼른 한국어를 익혀서, 이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앞에서 신나게 투덕거리는 자매도 비슷했다.
레미는 눈치가 좋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자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과하게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았지만, 그래도 고마워서 그녀는 알아차렸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대화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긴장이 풀렸으니까. 자기랑 동갑이란 유리코? 이 아이와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잘 맞을 것 같았다.
마음이 녹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풀릴 줄은 몰랐다.
‘오기를…… 잘했어.’
일본에는 어차피 살 곳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한국어를 배워, 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 사르르, 풀어져서, 얼굴 가득 미소가 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리고 그런 레미를 빤히 보는 황금세대.
통유리로 된 쉼터 안의 레미는 이제야 그 나이 때의 소녀처럼 보였다.
“다행이다. 유정이랑 유진 누나가 잘 돌봐주겠어. 이제 지영이 마음 놓을 수 있겠지?”
“……응.”
강한결의 말에 지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처럼, 지영은 좋은 인연들 덕분에 이제야 마음이 놓였고, 안심하고 촬영장에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