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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6화
426화. 마지막, 재(17)
촬영은 순조로웠다.
가끔, 아니, 자주 불어치는 블리자드만 아니면 매우 수월한 촬영 일정이었다. 배우들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촬영장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스태프 전체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 드라마 판은 매우 혹독하다.
혹독, 가혹.
흔히 3D라 부르는 직종이 드라마나 영화 촬영 현장이었다. 근무시간? 그딴 건 개한테 줘버린 게 이 바닥이었다. 하지만 미국 시스템과 흡사하면서도, 포드에서 작정하고 돈 생각 안 하고 지원을 해줘서 이곳은 추위만 빼면, 천국이었다.
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게 있었고, 이쪽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게다가 주 6일에, 일요일 하루만큼은 반드시 휴식을 보장해 줬다. 보통은 로케 비용 때문에 스태프와 배우를 쥐어짜 일정을 소화하지만, 지원이 워낙에 빵빵해서 돈 걱정 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곳이 천국이 아니냐는 말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였다.
노래방, 당구장, 바는 기본이고, 지역 업체를 통해 눈에서 즐길 수 있는 익사이팅 스포츠 또한 전부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스케줄에 지장을 주면 안 돼서 실제로 스포츠를 즐기는 스태프는 아주 극소수였다.
그리고 당연히 지영은 예외였다.
스포츠를 즐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스케줄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지영은 쉬는 날에도 오히려 촬영 준비를 하며 보냈다.
일요일.
이번 주도 어김없이 휴식이었다. 지영은 일어나 몸을 풀고, 늦은 아침을 챙겨 먹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전 11시경, 훈련장엔 액션 배우들이 이미 와서 훈련이 한창이었다. 훈련을 감독하던 김진우가 지영이 들어오자 손짓했다. 지영은 배우들에게 인사하며 김진우에게 향했다.
익숙하지만, 아직은 어색한 선배가 앉아서 몸을 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김진우한테도 인사하고, 선배한테도 인사를 하자 그녀는 일어나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후배님.”
서로 깍듯한 인사.
김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너희 아직도 존대해?”
“음, 네. 선배님이시라.”
“어려운 후배님이시잖아요.”
그의 말에 거의 동시에 나간 대답.
지영이 선배라고 부르는 여성은 더 챌린지로 유명해진 이연두였다. 히든카드. 홍진아 감독이 시즌3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공을 들인 게 바로 학소양 역의 선동일, 학미 역의 예정, 그리고 제선 역의 이연두였다.
이연두.
더 챌린지 우승으로 스타덤에 오른 은퇴한 유도 선수이자, 현직 바텐더다. 더 챌린지를 통해 그녀는 진짜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방송도 출연하지 않았고, 그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가끔 대회를 주관한 사성의 광고에만 등장하며 바텐더 직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녀는 조금씩 잊혀갔다.
스타는 팬이 부유시킬 재료가 있어야 했다. 작품을 하든가, 예능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외부 활동을 활발히 하든가. 그런데 그녀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그녀의 바에 찾은 팬과 함께 찍은 사진을 빼면 그녀는 거의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사성의 CF와 팬과의 셀카로는 부유할 힘이 부족했고, 고고히 떠올랐던 별은 다시 천천히 그 빛을 잃어갔다.
그런 그녀를 홍진아가 찾아갔고, 삼고초려 끝에 작품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가장 첫 번째 조건이 대사를 최대한 줄여주는 거였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그녀다.
따라서 발성부터 전부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테스트해 본 결과 확실히 대사 연기는 약했다. 하지만 액션 연기는…… 진심, 최고였다.
몸 쓰는 것은 가히 천재적, 천부적이었다.
은퇴하고 꾸준히 몸을 풀었던 것 하나만으로도 현역 국대 1선발을 꺾는 기염을 토한 게 바로 이연두였다. 그런 그녀는 시즌3의 새로운 등장인물 중 하나인 제선 역에 정말 찰떡이었다. 계약서를 쓰고, 그녀는 곧장 홍진아의 추천으로 김진우 사단에 잠시 합류했다. 이연두를 가르친 김진우는 적어도 몸 쓰는 재능 하나만큼은 지영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그건 진짜였다.
이연두의 몸 쓰는 재능은 지영이 보기에도 진짜배기였다. 그러나 그런 이연두는 지영보다 훨씬 선배님이었다. 같은 세대가 아닌, 두 세대나 위다. 여기서 두 세대란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3년 과정을 두 번이나 건너뛰었다는 뜻이었다. 이연두는 20대 후반이고, 지영은 이제 20대 초반이다. 그래서 학교 한 사이클을 전부 건너 위에 있는 선배님이었다. 그런 선배님이라,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지영의 반응에 이연두도 똑같이 응대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인사부터 서로 깍듯했다. 얼마 전에 합류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둘은 이런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그게 김진우로서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훈련하면서, 너희도 참 대단하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하겠냐. 서로 관계는 알아서 하고, 지영인 빨리 몸 풀고 와. 연두는 몸 거의 다 풀었다.”
“네.”
지영은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었다.
내일 새벽에 첫 신이, 이연두가 맡은 제선과의 대련 장면이다. 상서성을 떠나 야밤에 은밀히 샨 강을 건너 전장의 지척으로 향한 재는, 전장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제선의 실력을 점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새벽에 시작된 대련.
극 중에서 제선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검에만 매진한 검사로 나온다. 부모를. 정확히는 아버지를 잃은 이후부터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제선은 원수를 처단하기 위해 검을 쥔다. 여기서 하나의 설정이 더 나오는데, 제선은 제학 선생의 친딸이 아니다. 애초에 극 중 시간 흐름을 보면 제학 선생에게 제선 정도 나이가 찬 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제학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재가 안영 부인을 보고 놀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재혼.
안영 부인이 사별 후, 장성한 딸이 있는 상태로 제학 선생과 재혼한 것이다. 그런 설정이 하나 더 나온다. 그런 제선의 원수는 역적 후다. 이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제선이 전쟁에 참여하려는 걸 안영 부인과 제학 선생이 막고 있다가, 재가 오면서 그 고삐를 풀어버린 것이다.
언제까지고 잡아둘 수 없으니, 믿을 만한 인물인 재와 함께 보낸 것이다.
이런 설정이 함께 전장으로 향하며 몇 안 되는 대화 신을 통해 드러나고, 재는 그녀를 막을 수 없음에 실력을 점검하는 것이다.
내일, 첫 신이 바로 그 점검 신이다.
그러니 합을 맞춰볼 필요가 있었다. 지영은 준비를 끝내고 이미 김진우를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이연두에게 다가갔다.
“다 풀었어?”
지영이 오자 손을 들어 올리며 이연두를 멈추게 한 김진우의 질문에 지영은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연두도 지영을 향해 돌아섰고, 신을 맞추기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딱!
일단 지영이 먼저 검을 내려쳤다. 자세를 잡고 있던 이연두가 목검을 들어서 막았다. 힘을 과하게 주지 않아서 크게 무리가 가지 않는 정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연두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재의 힘에 제선이 밀려 힘에 굴복하는 느낌을 주기 위한 첫 합이다. 극 중 재는 학소양에게 수련을 받은 뒤, 진짜 괴물이 되었다. 근력과 근지구력, 민첩성에 유연성까지 한 단계 올랐고, 안법과 부동심의 장착으로 재는 한층 강력해졌다.
그런 재에게 제선은 솔직히 상대될 수 없었다.
그걸 재 본인이 알면서도, 실제로 제국의 무사들과 붙여도 앞서거나 비슷한 제선의 실력을 알고 있음에도, 강하게 밀어붙였다.
따악!
목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난 이연두에게 다가간 지영은 똑같은 공격을 한 번 더 감행했다. 검이 떨어지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이연두는 합을 위해 옆으로 데굴 굴렀다. 실제로 신에서도 저렇게 구르는 거로 나온다. 막자니 힘에 밀리고, 뒤로 빠지자니 다시 공격할 기회를 주는 거고, 그래서 옆으로 데굴 구르며 검을 지면을 쓸 듯이 휘둘러 지영의 다리를 노렸다. 실제 김진우가 짜준 합이다.
지영은 그걸 다리를 슬쩍 들어 피한 뒤, 엎어진 이연두를 툭 밀어 차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자 턱을 휙 치켜들며 옆으로 다시 데굴 구르는 이연두. 당연히 진짜 맞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합을 계속 맞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되는 횟수는 전부 같은 합이었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속도였다. 첫 번째 합보다 두 번째가 좀 더 빨라졌고,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렇게 속도에 익숙해지며 총 10번을 마치고는 연습을 끝냈다.
두 사람은 녹초가 됐다.
해도 이미 졌고, 뭘 더 할 기력이 없어 지영은 저녁을 든든히 챙겨 먹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4시 기상, 5주 차 스케줄이 시작됐다.
* * *
까앙!
“큭!”
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데굴데굴 구르는 제선을 보며 재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다가섰다.
“고작 이 정도로 복수를? 그것도 후를 죽이겠다고? 농담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크윽!”
눈빛이 이글이글 불탔다.
저 멀리 떠오르는 동녘의 하늘처럼, 선홍빛으로 불타오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저렇게 불탄다고, 적이 앞에 와서 얌전히 칼에 맞아주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저렇게 눈을 빛내면, 오히려 히죽 웃으며 다가와 가슴에 칼을 꽂아 넣으며 좋아하는 미치광이들이 넘쳐나는 곳이 전장이다.
까앙!
“이야아!”
악에 받쳐 휘두른 검.
그런 제선의 공격에 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슴이 훤히 드러난다. 뭐가? 약점이. 검을 강하게 뿌리려고 뒤로 당기면, 필연적으로 앞은 빈다. 재는 거리를 계산한 다음, 반 박자 빠르게 제선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파고들어, 어깨로 가슴을 쳐버렸다.
퍼억!
“컥!”
가슴에 정통으로 들어간 어깨치기다.
제선은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아가 컥컥거리며 숨을 터뜨리기 위해 바둥거렸다. 그런 제선에게 다가간 재는 가슴 한 부분을 툭 밟았다가 뗐다.
“커억, 하악! 으으…….”
“검을 강하게 휘두르려고 그런 자세를 취해? 죽고 싶은 거지? 심지어 흥분까지. 이건 뭐, 죽고 싶은 놈들이 흔히 하는 삼박자를 전부 다 갖췄군.”
“…….”
분한 눈빛으로 재를 올려보는 제선.
그러나 재의 눈동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이런 놈들? 지긋지긋하게 봐왔다. 재가 창단한 백적파의 신입 대원이 보통 저랬다. 그리고 대부분 재에게 처참하게 박살 났다. 재가 부재중일 시에는, 부단주인 관영이 처참하게 깨버렸고. 그럼 열에 아홉은 이런 분한 눈빛을 한다.
그럼 이후엔?
더 깨준다. 완전히 꼬리를 말 때까지.
자신이 갖춘 일신상의 무력에 정말 별것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상기시켜 줬다. 그렇게 가루처럼 깬 다음, 다시 회복의 여지가 있는 놈은 다시 훈련 시켜 단원으로 만들었고, 그걸 이겨내지 못한 놈은 내쳤다.
한 번 깨졌다고 정신이 나가는 놈?
그런 놈은 전장에 나가면 첫 번째로 칼 맞고 삼도천을 건너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아예 받지 않는 게 나았다. 끝까지 악을 쓰며 물고 늘어질 독기를 어느 정도는 갖추지 않는 이상은, 백적파의 단원은 될 수 없었다.
그럼 제선은?
다행히 자신의 무력이 재에게 처참하게 깨졌음에도 눈빛만큼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는 실망감보다, 복수심과 분함이 더욱 크다는 뜻. 이런 성깔이면 회복과 성장의 여지가 그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론.
“장담하는데 지금 네 실력으로는 전장에 나가봐야, 교전 세 번을 넘기기 힘들어.”
“……그 정도입니까?”
제선의 반문에 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도 많이 잡아준 거야. 내 얘기는 들었지?”
“……네.”
“나는 약관이 되기도 전에 전장을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전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너는 이대로 가면 반드시 죽어.”
“…….”
잘 쳐줘야 세 번이다.
재수 없게 진짜를 만나면, 아마 그 상대에게 목이 날아갈 거다. 아니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거나, 더욱 최악의 경우 사로잡혀, 더러운 꼴을 보게 될 거다. 그리고 그다음은 역시 죽음이고.
그런 곳이 전장이다.
“선생께서, 짐을 주셨네. 후우.”
절레절레.
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고, 재의 모멸적인 말에 이를 악문 제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치욕과 분노에 몸서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