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5화
425화. 마지막, 재(16)
일다경도 걸리지 않아 재의 얘기가 끝났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만에 풀어놓은 재의 얘기에, 제학 선생의 표정은 한없이 진중해졌다.
“음…….”
재는 그런 제학 선생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침중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이었다.
‘씁쓸하다?’
이런 감정이 드러난다는 것은.
“알고 계셨군요.”
“흐음, 그래. 눈치는 얼추 채고 있었다. 상서성의 성주는 제법 좋은 자리다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 아니냐. 나는 학사이나, 관리 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걸 황제가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나를 이곳으로 보냈지. 그래서 무언가가 숨은 속내가 있진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계시다니 그럼 되었습니다. 후…… 황제의 계략을 막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흠.”
제학 선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학 선생은 재가 전에 알던 때와는 달라졌다. 예전이었다면, 그는 황제의 명이니 고지식하게 알면서도 따랐을 것이다.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는 않아도, 아마 오래 고민하지 않고 황제의 말에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재는 그게, 가족의 존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야 할 게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지금은 가족이 있으니, 황제의 계략에 걸렸을 때 자기 혼자 잘못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부인은 물론, 자식이 있다면 분명 십 중 십 같이 화를 입을 게 분명했다.
‘후는 절대 후환 따위는 남겨두지 않으니까.’
그걸 제학 선생도 아는 거다.
알아서 이런 고민이 드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가족 전체가, 아니,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니까 저렇게 고민 중인 것이다.
“물자 이송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으로도 힘들겠지. 그건 이번의 계략을 막는 것일 뿐. 분명 황제께선 다른 계책을 준비할 게다.”
“맞습니다. 선생께서 무너질 때까지,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재는 황제란 호칭을 버렸다.
그에 고지식함이 남아 있는 제학 선생의 눈매가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발언을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았다. 이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말문을 여는 제학 선생.
“황제가 작정했다면, 막기 힘들 것이다. 한두 번은 막아도, 서너 번은 막기 힘들게 분명해. 가족만이라도 피신시켜야겠구나.”
제학 선생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저를 지조도 없는 여인으로 만드시려 하는군요.”
“음, 그게 아니라 부인. 이곳에 있으면 당신과 선이가 위험하오.”
“알고 있어요. 저도 같이 들었으니. 하지만 지아비를 두고 떠나지는 못하겠습니다. 정 저를 내치시려면, 은장도를 준비해주셔요.”
“…….”
차분하지만, 단호한 그 말에 제학 선생은 침음도 흘리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 제학 선생이 양부 아래서 수학할 당시의 고집을 고스란히 갖춘 부인을 들이셨다. 그래서 그 사실에 재는 감사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설득의 여지가 다시 생기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말하게.”
“병에 걸리십시오.”
“……뭐라?”
재의 말에 제학 선생은 그게 뭔 말이냐는 표정으로 재를 바라봤다. 재는 잠시 대화 중에 학소양 학미와 함께 약초를 따러 숲과 산을 돌아다닐 때가 떠올랐다. 학소양은 약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학미는 딸이니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다.
같이 돌아다니며 재는 많이 배운 게 있었다.
그 대화가 바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이게 내란초다. 이걸 먹으면, 속에서 난리가 나지.]
[독초입니까?]
[아니다. 장기 기능을 확연히 느리게 해 멀쩡한 사람도 병자로 만든다. 그런데 독초가 아닌 이유는, 장복해도 사망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끌끌. 아파야 하는 상황이 오면 너도 꼭 챙겨 먹어라. 하루면 너를 내일 삼도천을 건널 것처럼 만들어줄 테니까.]
[그렇군요. 그럼 과다복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재가 그렇게 물었더니. 쥐고 있던 지팡이가 머리 위로 인지도 못한 사이에 뚝 떨어졌다.
[악!]
[독초가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장복해도 무리가 없고, 한 번에 많이 먹어도 일정 약효 이상을 발휘하지 않는다. 하나를 달여 마시나, 두 개를 달여 마시나 같단 얘기다.]
[으…… 그렇군요.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이런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알아두면 언제고 쓸 일이 있을 것이다. 끌끌.]
[네, 스승님.]
[언제고 떠날 때 말려 놓은 걸 챙겨주마. 제국에서는 나지 않으니 찾기 어려울 게다. 이건 이 산에서만 자생하는 놈이니까.]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그놈 넉살은 좋구나. 끌끌.]
그렇게 마무리된 대화.
내란초.
속에 내란을 일으킨다는 약초.
그러나 장복해도, 과다복용해도 일정 이상은 인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기이한 약초. 그런데 심지어 귀한 것도 아니다. 제국의 산천초목에서는 나지 않는다. 따라서 제국에서는 아주 생소한 약초다.
이건 웬만한 이족조차 알지 못하는 약초다.
약초학에 능한 선고가 언젠가 신기한 약초를 막 주절주절 떠들어 댄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 약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족조차 모르는데, 이족과 교류 자체가 없는 제국에 알려졌을 리가 없었다. 물론 고문헌에는 언급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 언급 자체가 극히 적을 게 분명했고, 그럼 아는 사람도 극히 적다.
제국에서도 가장 여러 학문에 능통한 제학 선생에게.
“내란초라는 약초를 아십니까?”
“내란초? 음…… 처음 듣네만.”
이것 봐라. 제학 선생조차 모른다.
약학에 정통한 약사나 의원이 아니라면. 아니, 그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후는?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제학 선생이 병에 걸렸고, 성주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게 중점이다.
재는 이어서 약초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제학 선생은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몸에 이상이 없는 건가요?”
걱정되었던 부인의 질문에 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스승님에게 전해 듣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실험이 필요하니 제가 직접 오늘 밤에 복용해 보겠습니다. 스승님의 말로는, 복용하고 삼일, 사일이 지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부인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렇게 답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부진 표정으로 재를 향해 말했다.
“제게 주세요. 제 부군을 지키는 일이니, 제가 해봐야겠어요.”
“안 될 말입니다.”
재는 단박에 그 말을 거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학 선생님의 부인이? 선생께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재도 다른 사람에게 이 약초를 실험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재는 스승 학소양을 믿었다. 절대로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재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학소양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신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인은, 제학 선생이 고른 분이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같은 성향을 가져 끌렸던 건지 부인도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다.
“부군의 동문이시고, 평소 부군께서는 그대를 얘기할 땐 언제나 조카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군이 조카라면, 저는 어떤 존재입니까?”
“…….”
어……?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재가 오랜만에 당황해 바로 대답을 못 하자 부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럼 숙모가 아닙니까. 숙모가 어찌 조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을 맡기겠나요. 더욱이 그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부군을 지켜줘야 함은 물론, 이 제국을 바로잡을 이가 아닌지요.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일은 제가 하는 게 맞습니다.”
“……선생님.”
재는 이건 자신이 어떻게 못 하겠다는 생각에 제학 선생을 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제학 선생의 표정 또한 부인과 비슷했다.
“숙모라 부르거라. 아니면 안영 부인이라 부르든가.”
“…….”
“선이는 나중에 따로 소개해 주마. 부인도 준비해야 할 게 있으니 삼일 뒤 다시 찾아오거라.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
“……후우, 알겠습니다.”
재는 한발 물러섰다.
조카라는 단어, 숙모라는 단어에 흔들리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은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고집을 꺾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좀 주고, 다시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먼저 실험하면 돼.’
내란초는 객잔 숙소에 있었다.
삼 일 후면, 이미 실험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애먼 생각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보셨겠지만 저는 천하의 제학 선생도 손에 쥐고 산답니다. 어린 조카에게는 더없이 엄해질 수 있어요.”
“……네.”
눈치가 귀신이시다.
결국 재는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고집을 꺾은 건 아니었다.
확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재는 해가 뜨기 전에 물러갔다.
그리고 돌아가는 즉시, 약초를 달여 복용했다. 숙모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에게 혼이 나는 건 혼이 나는 거고, 확인은 확인이었다.
“음…….”
일다경 정도가 지나자, 몸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품질이 좋지 않은 동경 하나를 사서 얼굴을 보자, 이미 얼굴색은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재는 몸 상태를 일각마다 기록했다. 설사가 나거나, 구역질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몸이 무거워지고 뜨끈한 물에 풍덩 빠뜨린 것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얼굴에 확실히 병색이 완연해졌다.
그러나 정말 죽을 것 같고 그러진 않았다.
그게 하루가 지나자 절정에 올랐고, 하루가 더 지나자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3일이 지나지 확실히 풀렸다. 푸르죽죽했던 병색도 완전히 사라졌다. 신기했다. 세상은 넓고, 기화이초가 널렸다던 스승의 말이 역시 맞았다.
재는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온 걸 확인하곤, 약초를 챙겨 다시 이른 묘시에 제학 선생의 저택 담을 넘었다.
성주의 저택치고는 확실히 느슨한 경비를 피해 다시 찾은 제학 선생의 거처. 이 역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원이 한 명 늘었다.
묘령의 여인인데, 안영 부인의 얼굴을 똑 닮았다. 그런데 그것보단,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 무릎 위에 한 자루 칼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손등에 알알이 박힌 굳은살과 다부진 체형을 보아하니, 제대로 수련한 게 분명했다.
선이라고 했던가?
재는 차분한 여염집 규슈를 생각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이쪽은 내 딸아이, 선이다. 너와 함께 보낼 것이니 그리 알거라.”
“……선생님. 저는 전장으로 갑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제국을 바로잡겠다고 난리를 치던 아이다. 기회가 있을 것이라 내 설득해 데리고 오긴 했다만, 더는 고집을 잡아주진 못할 것 같구나.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이미 내 너를 얘기했고, 이 아이는 너를 따라다닐 채비와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태다.”
“…….”
부담스럽다.
열심히 수련한 흔적은 분명히 보이나, 전장은 그걸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재에게 위험한 이유를 대라면 구구절절, 하루 온종일 댈 수 있는 게 전장이다. 그러나 제선은 눈빛은 이미 뭔 말을 해도 들어 먹을 생각이 없는 각오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그 선생님의 그 부인, 그리고 그 딸이네.’
고집들이 진짜, 어후…….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러는 조카님도 고집이 참 만만치 않습니다.”
“네?”
“…….”
빤…….
안영 부인의 눈빛이 재를 훑었다. 폐부 깊숙이, 뚫어보는 눈빛이었다. 재는 깨달았다. 안영 부인은 자기가 이미 내란초를 복용했음을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눈빛에 재는 그냥 봇짐에서 내란초를 스무 뿌리를 꺼내 밀었다.
“우리가 만난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내 종아리를 걷으라 했겠으나, 이번이 두 번째라 봐주는 줄 알아요.”
“……부인.”
“숙모라 부르세요.”
“…….”
네, 숙모님.
시큼 달달한, 이상한 마음이 가슴속에서부터 새하얀 도화지에 먹을 뿌린 것처럼 퍼져 나갔다. 용처와 방법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제학 선생이라면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런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재에게.
“우리 선이, 잘…… 부탁해요.”
“……네, 숙모님.”
마지막에서야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는 안영 부인. 그런데도 제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제선과 저택을 떠난 재는 이틀 뒤, 전선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