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4화
424화. 마지막, 재(15)
지영은 일단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 신이 끝나고 2시간 가까이 좀 지나 있었다. 지영은 임은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영아. 뭐 필요하니?
“아 누나. 저 신 스타트 언제인지 확인 좀 해주세요.”
-응? 갑자기?
“네, 음. 척위준? 이 만화가 보고 싶어져서요.”
-그래?
그래? 하는 임은진의 대답에 지영은 아주 확실히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배우가 작품을 고르는 시기는 작품 도중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작품을 끝나고 휴식기에 정한다. 하지만 작품 중에 정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특히 레인 스튜디오의 작품처럼, 조건이 어마어마하게 좋을 게 분명한 경우에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알았어. 내가 금방 알아보고 전화 줄게?
“네, 그래도 신은 미루지 말고요.”
-그럼,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지영이 너 피해 주는 거 정말 싫어하잖아.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봐?
“하하,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무슨. 그렇게 돌다리를 두들겨 줘서 내가 고맙지. 그럼 바로 알아보고 연락 줄게!
“네.”
전화를 끊고 몇 분 뒤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지영이 안에 있는 동안 기상 이변으로 블리자드가 불어 신이 조금 딜레이 됐다는 소식이었다. 요즘 이곳에선 눈 폭풍이 생각보다 흔했다. 밤에는 한두 시간씩 기본으로 몰아치고, 낮에도 심심찮게 몰아쳤다. 그때는 촬영 준비를 할 수가 없으니 대부분 휴식을 취한다. 그렇게 30분쯤 쉬었으니, 30분의 여유가 생겼다.
지영은 그래서 안심하고 국내의 가장 큰 대형 웹소설&웹툰 플랫폼 어플을 실행했다. 검색창에 레인 스튜디오라고 치자, 레인 스튜디오에서 15년간 발간한 작품이 번역되어 올라와 있었다. 그중 가장 인기작은 역시 ‘무신 척위준’이었다. 다니엘이 말했던 것처럼 애초에 작정하고 한국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작품이었다.
초기에는 인기가 없다가, 나중에 레인 스튜디오 영화가 3년 차에 들어서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같이 떠오른 작품이었다.
지영은 플랫폼 결제를 하고, 무신 척위준의 첫 편을 보기 시작했다.
역사를 제법 좋아하는 지영도 알만한 인물이 첫 장 인트로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고려 무장 척준경.
한국인에게는, 특히 남자에게는 익숙한 네임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운 장군은 꽤 많았다. 충무공이란 칭호로도 익숙한 이순신 장군 말고도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만 따져도 굵직한 업적을 세운 무장은 양 손가락을 다 펼쳐도 세기 힘들었다. 하지만 개인 무력으로 따졌을 때, 가장 압도적인 무장은 단연 척준경이었다.
소드마스터.
실제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단 기록된 것만 봐도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이순신 장군이 책략으로 일본의 대군을 격파했다면, 척준경이 돋보이는 이유는 일신상의 무력, 그 자체였다.
그런 척준경이 인트로에 나왔다.
사실 척 씨 성은 한국에서 보기 힘들기에 지영은 척위준이란 이름에서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척준경의 일대기를 압축해 보여주더니, 말년에 유배당한 상황에서 반전을 묘를 줬다.
역사를 비틀었다.
실제로 척준경 사후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프롤로그 마지막에 한 여인이 척준경의 아이로 추정되는 아이를 안고, 유배지에서 떠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척준경의 자식이 분명한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이렇게 대가 이어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모든 아이가 ‘무’를 갈고 닦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척준경의 후손들은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려가 망하는 그 시기에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척에서 보았음에도 그 일신상의 무력을 조정을 향해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프롤로그 마지막에 나오는데, 아이를 안고 떠나는 여인을 등진 척준경이 한 말 때문이었다.
[무에 힘쓰라. 하나, 조정이 아닌 만백성을 위해 쓰라.]
이런 유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바뀔 때도 척 씨 집안은 나서지 않았다. 다만, 장성하고 척준경의 핏줄을 타고 강력하게 내려오는 무의 재능을 백성을 위해 썼다. 악랄한 산적을 잡고, 비열한 마적을 잡고, 간악한 왜구를 잡았다.
그런 선행을 펼치며 이름도 밝히지 않는 무사.
그렇게 척준경의 후예는 굵직하나, 이름을 남기지 않은 행보를 이어갔다. 왜란, 호란, 일제강점기 등을 계속 거치며 만백성을 위해, 척준경의 유지를 이어받은 행보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뭔가 뒤틀리는 게 나온다.
미블도 그렇고 DG도 그렇고 히어로가 되는 과정은 아주 많은 방법이 있었다. 태생부터 외계인 혈통이든가, 아니면 천재 과학자가 슈트를 만들든가, 어느 순간 각성한 초인이든가 등등, 아주 많은 설정을 입힌다.
척준경의 후손은 미국 대장과 결이 비슷했다.
일제 시대 때 투사로 활동하다가 사로잡힌 후손은 731부대로 끌려간다. 일본의 잔악한 세균전 부대인데, 이때 후손은 아주 극악한 실험을 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척준경의 DNA에 일제가 넣은 바이러스가 결합하며, 일신상의 능력이 대폭발한다. 미국 대장은 자진해서 슈퍼 솔저가 되지만, 척준경의 후손은 바라지 않은 상태로 히어로가 된다. 그러나 그는 곧, 그 힘을 집안의 유지를 잇는 데 쓰기로 정한다.
그렇게 일제를 부수기 시작했다.
동료를 구하고, 연인을 구하고, 일제의 군수창고를 폭파하고, 식량 저장고를 불태우며 어둠 속에서 우연의 산물이자, 운명이라 할 힘으로 저항을 계속한다. 이때도 후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나 성씨마저 다른 이름을 가명으로 썼고,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아내가 생겼을 때만 어머니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들었던 집안의 비사를 밝혔다.
그렇게 이어졌다.
강점기가 끝나고, 한민족이 갈라지고, 그렇게 다시 시간의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현대. 2004년.
척위준이 태어났다.
가장 강력한 유전자를 지닌 채로.
이게 길고 긴 프롤로그의 끝이었다.
“후우…….”
지영은 여기까지 읽고, 폰에서 시선을 뗐다.
짧지 않은 프롤로그였고, 지영은 완전히 몰입해서 봤다. 재미도 재미지만,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작품인데?”
작품 자체는 아예, 애초에 한국 시장을 정통으로 겨냥했다. 이순신이란 거대한 위인의 일대기와 집안 이야기 등은 비트는 게 쉽지 않았다. 잘못하면 고소로 이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특히 한국인에게 이순신 장군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래서 고른 게 척준경이란 고려 무장 같았다.
일대기가 그의 사후 끊겼다. 척 씨 집안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대가 끊긴 것처럼. 그래서 이야기의 각색에 부담이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지영은 예전에 이성진이 푸념을 늘어놓았던 게 떠올랐다.
히어로 시리즈의 팬인 이성진은 한국의 히어로가 없는 걸 항상 아쉬웠다. 일본의 닌자와 사무라이 같은 캐릭터는 선역으로도, 악역으로도 자주 출연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20년대 넘어서 미블은 중국의 히어로 무비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게 시리즈 2까지 나왔고, 흥행성적 또한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국의 히어로는 여전히 없었다.
이는 미블 뿐만이 아니라, DG도 마찬가지였다. 코믹스에는 있을지 몰라도, 영화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성진은 히어로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그 부분을 투덜거렸다.
그럼 이게 이성진만의 불만일까?
그 혼자만의 아쉬움일까? 아니었다. 프롤로그 아래 달린 수만 개의 댓글 중 베스트가, ‘제발 실사화 좀ㅠㅠ’ 바로 이거였다. 그리고 제발 무신 척위준이 영화화 되길 바라는 소망이 프롤로그 아래 그득하게 달려 있었다.
연재가 시작됐을 때가 2020년이었다.
레인 스튜디오가 세계관 작업을 10년도쯤에 시작했으니, 좀 뒤늦게 연재된 편이다. 그래도 근 5년간 이야기는 쌓이고 또 쌓였다.
정통 한국의 히어로 시리즈.
이는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다못해, 폭발시키고도 충분한 조건이 이미 갖춰졌다. 그래서 지영은 이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폰을 내려놓고, 다시 대본과 소설을 들었다.
마음이 끌린다.
더 읽고 싶었다.
하지만 지영은 본분을 잊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척위준에 관한 조사, 공부가 먼저가 아니라 재에 관한 고찰과 이해가 먼저라는 것을. 지영은 잊지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이라 지영은 금방 다시 몰입했다.
척위준도 척위준이지만, 지금은 재가 더 중요하고 소중한 지영이었다.
* * *
상서성에서의 일주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지나갔다. 아주 평범한 하루하루. 아니, 특별한 하루하루긴 했다. 제도를 떠난 이후 재는 이런 문명적인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의사소통과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갖춘 이족의 세계에서도 이런 편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생활 자체는 원시적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이후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었고,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스승인 학소양과 함께 할 때도 당연히 이런 편안함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오지 중의 오지인 곳이니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재는 이 편안함을, 문명을, 문화를 마음껏 즐겼다.
연극도 보러 가고, 사물패의 공연도 보러 다녔다. 호피를 판 돈으로 마음껏 맛있는 식사와 의복을 맞춰 입었다. 그렇게 마음의 풍요를 얻었으나,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밤에만 다녔다는 점이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충분히, 언제 또다시 누릴 수 없으니 듬뿍 누렸기에 제학 선생이 상서성에 도착했다는 얘기가 저잣거리를 돌 때쯤엔 아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재는 그날 저녁 바로 제학 선생을 찾지 않았다.
첫날은 분명 이런저런 환영 인사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는 이른 아침에 성주 거처의 담을 넘었다. 이른 새벽이고, 전날 환영회의 여파로 거처는 조용했다. 방이 오십 칸이나 되는 대저택이지만, 재는 금방 제학 선생이 머무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작은 방.
제학 선생은 큰방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양부의 저택에서 수학할 당시에도 가장 작은 방에 집착했던 선생이었다. 그런 버릇이 기억이 나, 재는 저택의 가장 후미진 곳을 찾았다.
면벽 수련에 어울리는 아주 작은 초가집.
새로 지어진 느낌이 풀풀 나는 이곳에 제학 선생이 있음을 재는 확신했다. 그래서 마루 문지방 앞에 무릎을 꿇고는 선생을 불렀다.
“선생님.”
“…….”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학 선생의 하루 시작은 이르다.
늦어도 묘시(05-07시) 초엔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같이 생활했기에 아는 그의 버릇이었다.
“선생님.”
“……이른 새벽에 누구신가?”
“선생님. 저, 재입니다.”
“……재?”
“예.”
양부를 대할 때처럼 공손히 대답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올라왔다. 잠시 뒤, 다시 제학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예, 선생님.”
들어오란 말에 재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어나다가 잠시 흠칫했다.
제학 선생은 당연히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그런 제학 선생의 옆에 계신 중년 여인은 처음 본다.
“안사람이네.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게.”
“……예,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선 재는 문을 닫고는 제학 선생의 앞에 공손히 앉아 인사를 올렸다. 양부의 제자다. 그것도 가장 아꼈던, 가장 양부와 닮았던 분이시다. 이런 예는 지극히 당연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다. 선생님.”
“오냐. 나야 잘 지냈다. 너는, 허허. 물어봤자겠구나. 내 제도에서 네가 죽었다고 들었다. 역적 재를 처단했단 방이 온갖 곳에 붙었었지. 그래서 내,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하지만 이리 살아있구나. 스승님께서 좋아하시겠어. 허허.”
재가 반가웠는지 빠르진 않지만, 그답지 않게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재는 그런 제학 선생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천운이었습니다. 저를 살려주신 분의 얘기로는, 절벽 아래 강가에 빠졌을 때 부력을 가진 뭔가가 바로 저를 받쳐 올렸을 거라더군요.”
“기억에 없느냐?”
“예, 떨어지면서 기억을 잃었습니다.”
“이런, 그렇다면 정말 천운이구나. 아니지, 아니야. 스승님이 보살피셨어. 그것밖에 이유가 없겠어. 허헛.”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재는 제학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어떻게 정말 살아났을까? 그에 관한 고민을 하다 보면 언제나 양부께서 보살폈구나란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르긴 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도 천운은, 천운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말이다.
“잘됐다. 잘되었어.”
제학 선생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학 선생의 옆에 부인은 인자한 미소로 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아주 호기심 어린 눈빛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은 부담스러워지려는 찰나.
“그래, 이 이른 새벽에 나를 찾아온 이유는 들어보자꾸나.”
제학 선생이 본론으로 들어가잔 말에, 재는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을 싹, 굳혔다. 그러자 반가워하던 제학 선생의 표정도 순식간에 진지해졌고, 그런 제학 선생에게 재는 찾아온 이유를 꺼냈다.
짧지 않은 이야기가, 위험천만한 이야기가 재의 입에서 풀려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