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3화
423화. 마지막, 재(14)
지영의 조금 늦은 대답에 다니엘 화이트가 하얀 치열을 내보이며 씩 웃었다. 2m에 가까운 덩치가 손을 흔들며 그렇게 웃자, 지영은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다행히 다니엘 화이트는 선을 넘진 않았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런 반응은 저기 나탈리에게 이미 천 번 정도 당해봤으니까요. 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실례를 했네요.”
“하하, 아니라니까요. 저기 나탈리 포드는요. 배를 잡고 뒤집어졌습니다. 그것도 저랑 처음 본 자리에서요.”
“…….”
진짜 그랬다고?
지영은 나탈리를 돌아보자,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지영의 시선을 피했다.
“흠, 철없던 시절 얘기예요…….”
“…….”
그러긴 그랬다는 소리다.
피식 웃은 지영은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한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요. 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그런데 나탈리 씨는 생각 있이 돌을 던졌네요? 앉으세요.”
“……호, 호호.”
어색하게 웃은 나탈리가 지영의 앞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다이넬 화이트도 지영의 앞에 앉았다. 의자가 낮아 그런지, 무릎이 가슴까지 올라온 다니엘이 다시 새하얀 치열이 드러나게 웃은 뒤 말문을 열었다.
“이 친구, 나탈리와는 대학교 동기입니다. 같은 동아리 출신이기도 하고요. 하하, 20년이 넘었으니 질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죠.”
“아아, 그 질긴 인연 덕분에 포드 후원을 그렇게 받았는데. 이제 와 그렇게 말한다고?”
“그 정도는 해줘야지. 네가 술 취해서 깜둥이 새끼! 라고 소리친 것도 봐줬으니까.”
워…….
흑인의 면전에 대고 깜둥이라고 놀렸다고?
지영은 자기가 이쪽 사회는 잘 몰라도, 그러면 총 맞고도 남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얘기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진짜 찐친이란 소리다.
“그래서 내가 미안해서 투자 대대적으로 해줬잖아. 어려울 때마다.”
“그랬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 내가 으슥한 골목을 들어갈 때를 기다렸을 거야.”
“웃기시네. 세상 가장 확고한 평화주의자가, 퍽이나 그러겠다.”
“흑인에 대한 모욕은, 그런 평화주의마저 무시하게 하지. 됐고, 미스터 지영. 우린 이런 관계입니다. 하하.”
다니엘 화이트의 말에 지영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살짝 살벌하긴 했지만, 그게 정말 감정이 섞여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였으면 나탈리 씨가 절대 그를 이곳에 데리고 오지 않았겠지.’
자신의 인맥이긴 하지만, 나탈리의 입장에서 지영은 절대로, 무조건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계약 기간이 3년이지만, 그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었다. 물론 그 3년이면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지만, 그건 매우 하책이다.
차라리 관계를 유지해 재계약을 노리는 게 훨씬 상책이고.
그걸 나탈리 정도 되는 수완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데리고 왔다는 것은, 그만한 리스크를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는 이야기겠지만, 영화감독인 자기의 친구가 얘기가 잘 풀렸을 시 훨씬 이득이다. 그런데 그건 잘 풀렸을 때고, 만약 안 풀리면? 심지어 서로 불편해진다면? 너무 생각이 앞서 나가는 게 아니라, 이런 미팅에서 불편해지는 경우는 차고도 넘쳤다.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데리고 왔다는 것은.’
그런 리스크를 감당하겠다는 것.
그걸 생각하면 다니엘 화이트를 충분히 믿고 있단 뜻이었다. 거기에 재작년 오스카 수상자라면,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감독이었다. 지영은 자기가 할리우드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이 감독은 분명 능력이 출중한 사람일 게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제 진짜 용건을 들어보며 더 정확히 판단할 때였다. 지영은 폰을 꺼내 임은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밖에 있던 임은진이 바로 들어와 지영의 옆에 앉았다.
이런 문제는 지영이 혼자 해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영이 소속사도 없고, 혼자 그냥 프리로 활동하는 거면 혼자 결정해도 되지만, 지영은 엄연히 소속사가 있었다. 그러니 소속사와 함께하는 게 맞았다. 임은진이 지금은 지영 전담으로 일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엄연히 비즈 엔터 소속이었다.
충분히 양쪽의 입장을 생각해서 생각해줄 게 분명했다.
임은진의 등장이 본론을 꺼낼 순간이라는 걸 알았는지, 다니엘이 서류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센스 있게, 두 부를 준비해줘서 지영은 임은진과 나란히 그걸 받아들었다. 이번엔 지영이 아니라, 임은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먼저 보고 얘기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미스 임.”
“제 이름을 아는군요?”
“지영을 섭외하려면, 미스 임의 허락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른다면 이곳에 앉을 자격도 없겠지요?”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싱긋 웃어준 임은진은 곧장 스크립트를 펼쳤다. 그에 맞춰 지영도 스크립트를 펼쳤는데…… 생각도 못 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지영도 놀랐지만, 임은진은 더 놀랐다.
“레인 스튜디오?”
“이번에 그쪽 작품을 맡게 됐습니다.”
“아…….”
레인 스튜디오는 지영도 아는 곳이었다.
미국의 대표 히어로 시리즈를 다루는 곳은 두 곳이다.
미블과 DG.
지영뿐만이 아니라 미디어와 접촉 가능한 곳에 사는 모두가 아는 아주 유명한 히어로 시리즈를 줄줄이 히트시킨 스튜디오다.
레인 스튜디오는 후발주자였다.
미블과 DG처럼 수십 년 전부터 만화로 세상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미블의 아이언맨1과 2의 대성공을 본 레인 스튜디오의 수장은 그때 바로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아이언맨2는 10년도 작품이다. 그리고 거기서 10년이 더 지났을 때, 레인 스튜디오는 그간 발간한 만화를 바탕으로 드디어 세계관을 실사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진 않았다.
후발주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류작 취급을 받았고 레인 스튜디오의 작품도 그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대놓고 초강세를 펼쳤다.
1년에 무려, 세 개의 시리즈를 내놓았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들은 처음 1, 2년은 욕먹었지만, 3년째는 평이 바뀌었고, 4년째는 확실한 흑자로 전환됐다. 그리고 5년째부터는?
아류라는 소리는 쏙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히어로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그게 레인 스튜디오다.
그런 레인 스튜디오의 스크립트다.
사락.
지영은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건, 캐릭터였다. 동양 특유의 무사 복장인데,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에게 익숙한 장군복 차림이었다. 그 캐릭터 아래로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신, 척위준.]
캐릭터의 이름이다.
한 장 더 넘겨 보았다.
이번엔 붉은 한복 같은 걸 입고, 거대한 장군검에 검붉은 가슴 갑주와 팔꿈치, 팔등, 무릎과 정강이 보호대를 독특한 무장 상태를 차고 있는 캐릭터가 보였다. 역시 무신 척위준이란 한글 단어가 표기되어 있었다.
“레인 스튜디오의 독립 시리즈 캐릭터네요?”
지영은 이쪽 만화를 안 봐서 모르지만, 임은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지영의 월드 활동을 위해 레인 스튜디오의 시리즈도 다 챙겨 봤다. 그런 그녀가 아는 체를 하자, 다니엘이 씩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대놓고 코리아를 겨냥한 이야기의 캐릭터죠. 이미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시리즈 3편까지도 가능하게 전개가 된 상태입니다.”
“음, 이 척위준을 지영이에게 맡기고 싶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레인 스튜디오에게 이 무신 척위준을 맡아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 머릿속에는 오직 지영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만화에서도 척위준은 굉장히 선이 고운 미남입니다. 중성적인 매력이 지독할 정도로 풍겨야 하는 캐릭터죠. 그런데 지영이 그렇습니다. 잘생긴 배우, 예쁜 배우는 많습니다. 하지만 지영에게는 그들에게는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건 미스 임이 가장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다니엘이 차분한 어조로 한 말에, 임은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맡은 강지영이란 연예인의 가장 큰 강점이 바로 그 중성적 매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여자 같지 않았다. 딱 보면 무조건 남자란 생각이 드는 배우였다. 하지만 그 남성미 안에 다소곳이 숨 쉬고 있는 여성스러움도 분명히 있었다.
이게 과하면 오히려 배척받는다.
남자에게 여자 같단 말은 때로는 칭찬이 아니라 욕으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영에게 하는 여성스럽단 말은, 무조건 칭찬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가 여성스러움을 제대로 중화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점.
다니엘은 제대로 지영에 대해 분석했다. 감독이 배우를 잘 분석해서, 이렇게 설명해 주면 배우는 마음이 동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생각 이상으로, 지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외모와 연기력 말고도 제가 지영을 원하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지영에게는, 다른 배우들에게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세계 최고. 정상에 선 자의 여유.”
“흠…….”
다니엘은 씩 웃더니 이전보다는 조금 더 커진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지영은 만화를 안 본 것 같아 모르는 것 같지만, 레인 독립 시리즈의 무신 척위준은 제목 그대로 무신의 무력을 보여줍니다. 세계관 파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죠. 그렇기에 척위준은 여유가 있습니다. 시종일관, 느려터지지 않은 선에서 느긋함을 보여줍니다.”
“…….”
“이런 여유? 배우들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짜 정상에 선 세계 최고의 선수, 지영만큼 여유를 보여줄 수는 없을 겁니다.”
다니엘이 단호한 어조로 한 말에 임은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영은 말은 이해했어도, 완전히 인정하긴 힘들었다. 여유. 그건 포장된 거다. 지금의 지영이 여유가 있긴 해도, 솔직히 그걸 외적으로 전부 드러내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정상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이 자리는 방심하면 반드시 쫓겨나는 자리다.
미야모토 신지라는 천재가 바로 등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솔직히 유도에 관해서도 크게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있다면, 금전적인 여유뿐인데, 세상에 돈 많은 배우들은 쌓이고 쌓였다. 취미로 배우 일을 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다니엘의 말은 일부만 맞고, 일부는 틀렸다.
하지만 지영은 산통을 깨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에게 약점이 될 만한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이미 예전부터 받았기 때문이었다.
약한 모습은 약점이고, 그건 곧 계약 시 불리하게 작용 될 수도 있다는 게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그냥 얌전히 따르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는 이 캐릭터를 지영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이 기획을 받았을 때부터, 지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계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평소에는 절대로 연락하지 않았을 거고, 빚을 지고 싶지 않은 나탈리에게 연락까지 하면서요.”
“아…….”
“그러니 저는 지영이 아니면, 이 작품은 찍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만두면 다른 감독에게 연락이 갈 것이고, 다른 배우에게 이 스크립트가 전달될 겁니다.”
“흐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그만큼 우리 배우가 간절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임은진이 툭 치고 들어간 말에, 다니엘은 씩 웃더니 호쾌하게 웃음을 이어 터뜨렸다.
“하하! 물론입니다. 질질 끌면서 간 보고 그러는 거, 우리는 참 별로거든요.”
“음, 알겠어요. 그런데 바로 답을 줘야 하는 건 아니죠? 저희 쪽에서도 검토라는 것을 해봐야 하고, 우리 배우님 의중도 들어봐야 하거든요.”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네요.”
“음, 심각한 겁니까?”
“아마도요?”
임은진의 말에 다니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스케줄에 관한 거니까.”
“아, 스케줄. 그렇군요. 음, 마음의 준비가 됐습니다. 지영, 얼마나 바쁩니까?”
“많이 바쁘죠. 올해는 나의 무사님 시즌3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옆에 계신 친구분의 회사 다큐가 예정되어 있죠. 그리고 내년엔…….”
“내년엔?”
“세계 선수권과 아시안 게임이 있어요. 4월이나 5월에 세계 선수권, 9월 말에 아시안 게임이 있는데, 내년엔 이게 최우선이에요.”
“음…….”
1년 가까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곧.
“그럼, 아시안 게임 이후는 어떻게 됩니까?”
정말 지영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다니엘은 정확히 스케줄이 없는 시기를 골라 물었다. 그래서 임은진은 웃음으로 답을 했고, 다니엘도 웃음으로 답을 받았다. 10분 뒤 정해진 건 없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니엘은 일어났다. 미팅이 끝났다. 그러자 내내 조용히 있던 나탈리가 지영에게 와 사과했다.
“미안해요. 말도 없이 바로 들이닥쳐서. 솔직히 말하면 저도 지영이 연기하는 히어로를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영이 이곳, 미국에도 뿌리를 내려주길 바랐고요.”
“이미 포드 모델 하고 있는데요?”
“음, 그건 씨앗만 뿌린 정도잖아요. 저는 좀 더 깊이. 이쪽에서 활동해 주길 바라거든요. 그래야 작품도 자주 보니까. 후후.”
“음, 생각해 볼게요.”
“역시, 신중하다니까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일, 정말 미안했어요.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잘 받았습니다. 얼른 가봐요. 친구분 기다리니까.”
“후후, 그래요. 그럼 촬영 잘하고, 몸조심해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탈리 포드가 다니엘 화이트와 떠나고, 지영은 그가 두고 간 스크립트를 다시 펼쳤다. 무신 척위준이란 캐릭터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