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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422화 (422/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2화

422화. 마지막, 재(13)

오케이 사인이 나자 한숨을 길게 내쉰 지영은 로케 장소로 알래스카가 정해지자마자 조성된 세트장을 둘러봤다. 잘 만들었다. 정말 잘 만들었다는 티가 나는 게, 이곳이 알래스카가 아니라, 정말 조선 시대가 생각나는 거리라 생각된다는 점이었다.

나무를 재료로 만든 주택, 저택, 전각 등이 지영이 지금 서 있는 세트장에서 바라보는 전망을 아주 죽이게 만들어줬다.

경치도 예술이었다.

시선의 끝에는 평야와 눈 덮인 설산까지 보였다. 완벽, 그저 완벽. 미술팀에서 작정하고 돈 걱정 없이 꾸민 이곳 세트장은 그냥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다만, 배우는 충원이 힘들어서 CG와 편집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상서성 세트장은 사실 그렇게 크진 않다. 하지만 화면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나와야 했다. 성에 드문드문 사람이 보인다? 그건 역병이 돌거나 적군이 바로 코앞까지 몰려와 피란을 갔다는 설정이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지만, 단역까지 이곳 알래스카로 부르는 건 무리고, 피부색이 다른 미국의 배우들을 쓰는 것도 애매했다. 어떻게든 티가 난다는 생각 때문에 필요한 장면의 세트를 고스란히 한국에도 옮겨 제작해서 그곳에서 단역 배우들과 함께 추가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런 복잡한 문제는 당연히 지영의 소관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고생하는 건 당연히 연출과 제작팀이다. 같이 한배에 탔단 뜻이고, 그런 그들의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대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지영은 신을 확인했다. 점소이 배역 때문에 아역배우로 온 연석이도 그렇고, 주변의 배우들 몇 명도 충분히 제 몫을 다해줬다.

“좋아요. 오케이! 다음 신 준비할게요!”

홍진아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지영도 옷을 갈아입으러 이동했다.

다음 신은 세트장에서 고심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다른 배우들의 추가 신이 먼저 있어서 지영은 2시간에서 3시간쯤 기다려야 했다.

배우 대기실로 내려온 지영은 곧장 옷부터 갈아입었다.

검은 야행복.

고심하는 재는 결국 제학 선생을 찾아간다는 설정이다. 옷을 갈아입고 대본을 다시 숙지하기 위해 소설과 함께 펼쳐보는데 임은진이 다가와 물었다.

“메이크업도 지금 손 볼래?”

“아니요. 번질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신 들어가기 전에 받을게요.”

“그럴래?”

“네. 누나도 좀 쉬세요. 다른 분들도 같이.”

“알았어. 근처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괜히 네가 뭘 찾으러 직접 움직이고 그러진 마. 알았지?”

“네.”

임은진의 말에 지영이 얌전히 대답하자, 그녀는 씩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훈훈한 히터 앞에 자리를 잡은 지영은 소설을 펼쳤다. 이미 머릿속에는 전부 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다시 확인하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었다.

[재는 고심한다.

본래 상서성에서 정보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재는 그런 마음으로 상서성으로 왔다. 하지만 제학 선생이 이곳의 신임성주로 온다는 소식에, 정보만 얻고 곧장 전장으로 향하려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이게 소설 속 지문이다.

‘그는 어쩌면 제국 내에서 유일한 아군이 될 수 있는 사람이겠지.’

제학 선생.

양부가 가장 아꼈던 제자 중, 가장 양부와 닮은 사람.

그렇기에 재는 고민했다.

떠날 것인가, 아니면 제학 선생에게 자신이 추론한 것을 알리는가. 이 문제였다. 물론 자기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는 그간 전쟁을 겪으며, 후라는 인간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후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후는 결코 후환을 남겨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건 연을 끝까지 쫓아와 이족과 전쟁을 시작한 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성격이 아니라면, 제국을 먼저 수습했겠지.”

신임 황제가 됐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뒷수습이 반란보다 더욱 힘들었다. 왜? 병권을 포함한 제국을 운영하는 전반적인 구조 전체를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 어떤 놈이 내란으로 황제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먼저 수습부터 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후는 그러지 않았다.

폭력과 권력을 휘둘러 강제로 병력을 동원해, 연을 쫓고 쫓다가 전쟁까지 일으켰다. 그 전쟁이 장기전이 되어가자, 이제 와 방향을 수정한 것이다. 수습하며, 자신에게 반기를 들 싹을 쳐내는 방향으로.

이런 이야기 전개였다.

재는 결국 제학 선생을 만나기로 한다.

제학 선생은 재가 도착하고 일주일 후에 상서성에 도착하고, 재는 그런 제학 선생을 찾아간다. 그렇게 제학 선생을 돕고, 이야기 중후반 반전의 묘를 만들어낸다.

지영은 그런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복기했다.

이렇게 이야기 전반적인 것을 담아두면, 감정을 잡기가 더욱 수월했다. 지영은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연기하는 배우였다. 타고난 감각, 센스 등으로 캐릭터를 조형해, 그걸 바탕으로 캐릭터를 내보이는 편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지영이 특별한 건 절대로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영이 이런 방식을 택한 건 사실 시간이 없어서였다. 지영은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지영의 본업은 유도고, 감사하게도 예인으로 살어리랏다를 집필한 장민주 작가의 눈에 들어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그래서 아무런 경험도 없이 그냥 배우를 시작하게 됐다.

물론 캐스팅이 확정되고, 연기 연습을 하긴 했지만 몇 년이나 연습한 배우들에게 비하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메소드 연기 비슷한 방식으로, 캐릭터를 자기의 색으로 조형하고, 지영이 대본을 보며 상상해 낸 세계에 캐릭터를 입혀, 거기에 동기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지영은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온전히 재가 될 수는 없었다.

지영은 몰입감이 강한 배우지만, 자신을 반드시 남겨뒀다. 임은진이 지영의 연기 방식은 위험하다고 하면서 언제든지 여지를 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온전하게 몰입하지 않는 대신, 정은정이 창작한 세계를 그 이미지 그대로 머릿속에 담아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재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연기했다.

다행히 이 방식은 지영에게는 참 안성맞춤인 방법이라, 보는 데 위화감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영은 시간이 나면 지금처럼 계속해서 재가 사는 세계를 점검했다. 그런 점검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 찍을 신은 제학 선생을 만나는 게 끝이지만, 시간이 있을 때 내일 찍을 신도 확인해 두는 게 좋았다.

지영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와 목을 축이고는, 대본과 소설에 다시 몰입했다.

제학 선생을 만난다고 해서, 모든 게 잘 풀리는 게 아니었다. 정은정 작가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 사실 선호하지 않는 작가였다. 이는 그녀가 본인의 입으로 한 얘기는 아니지만, 소설을 보면 그 부분이 참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나의 무사님의 주인공인 재와 연은, 시작부터 참 고난 길을 걷는다.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그냥 불타는 황궁이었다. 따로 재나 연, 그리고 후에 대한 설명도 없이 곧장 불부터 지른다. 연은 도망치고, 재는 역도를 처단하고, 후는 불타는 황궁을 가로질러 권좌로 향하고.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작된 이야기에서 황제는 죽고, 양부도 재에게 연을 부탁한 뒤 죽으며, 그 뒤로는 백적파와 함께 시작되는 처절한 제도 탈출이다. 남으로, 때로는 남서로, 도망치고 또 도망쳐 샨 강을 건넌다. 샨 강 너머는 광활한 평야와 산맥이 이건 뭐, 이런 땅이 다 있어? 싶을 정도로 복잡하게 섞여 있어 제국도 토벌을 포기한 곳이다. 후는 재와 연의 목적지가 그곳인지 알았고, 추격대를 편성해 끈질기게 뒤쫓는다.

이 탈출의 과정은 시즌1 1, 2화를 통해 보여줬지만, 진짜 저렇게까지 굴리나 싶을 정도로 내용적인 면에서는 처절했다.

그 뒤로 그럼 편하냐?

그것도 아니었다. 이족을 규합하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샨 강을 넘은 제국군이 이족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서 이족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대회의를 가지고, 연합해 제국에 맞서기로 한다. 이게 다시 시즌1 초중반이다. 그러고는? 전쟁이다.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치고받는다.

연도 연이지만, 재도 미치도록 구른다.

시즌2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이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재는 결국에 절벽에서 떨어진다.

정은정 작가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시청률은 당연히 보지만, 그렇다고 시청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었다. 시즌제로 바꾸며 세계가 풍성해지기 시작했지만, 그 안에 시청자의 요구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요구 자체를 보는 성격도 아니었다.

마이페이스로, 마이웨이를 걷는 게 정은정 작가였다.

그렇기에 제학이란 캐릭터 또한 만만치 않았다.

고고하고, 대쪽 같던 양부와 가장 닮은 제자라는 설정을 품었다. 그런 설정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런 제학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지영은 이 부분에 관해 깊게 고찰했다. 당연히 정은정이 내준 답은 있었다. 그러나 그걸 이해하고, 가슴에 담는 건 지영의 몫이었다.

“흐음…….”

똑똑.

지영아?

사색하며 길게 한숨을 흘리는데 노크와 함께 임은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부름에 지영은 정은정이 창조한 세계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타인으로 인해 깨졌지만,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임은진이 자기가 뭘 하는지 빤히 알면서도 노크를 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네, 누나.”

“손님 오셨는데, 문 열어도 될까?”

“어…… 네. 그럼요.”

손님이?

누굴까?

이 먼 알래스카까지 온 손님이라면, 임은진이 노크할 만도 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건 임은진의 뒤에 길쭉하게 솟아난 여성이었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포드 씨.”

하이.

나탈리 포드였다.

지영과의 빅딜을 통해 자사의 신차를 어마어마하게 팔아먹고 있는. 나탈리 포드가 반가운 표정으로 들어와 지영과 가볍게 아메리칸 식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지영은 아직 낯선 인사법이지만, 그냥 가볍게 받아줬다.

“잘 지냈어요? 어머, 얼굴 봐. 또 반쪽이 됐네요? 방송에서는 그래도 보기 좋았는데.”

“캐릭터에 맞추려면 감량해야죠. 시즌1, 2도 다 봤으면서. 알면서 일부로 그러는 거예요?”

“호호, 설마요.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요. 우리 모델이 너무 핼쑥해져서. 그래서 걱정하는 건데요?”

“음, 아닌 것 같은데…….”

“호호, 진짜라니까요?”

“알았어요. 그렇게 받아줄게요. 그보다 어쩐 일이에요? 세계에서 가장 바쁜 기업인 세 손가락 안에 드시는 분이?”

“어머, 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나탈리.

실제로 그녀는 매우 바빴다. 기업 가치 자체가 급성장함에 따라, 그녀는 당연히 일이 많아졌다. 신차 데스티니에 관한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녀는 요즘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대륙마다 공장을 세우고 있는데, 이 때문에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부지 선정 자체가 나라 선정이라서 그에 관한 협의를 하느냐 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서류로 충분히 할 수도 있지만, 복잡하고 진지한 얘기는 역시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한다. 그래야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냥 찔러보는 건지.

실제로 원하는 건지.

이런 건 직접 얘기를 나눠보지 않는 이상은 알기 어렵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전세기를 타고 세계 각지를 쏘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알래스카에 등장했다.

그냥 지영이 보고 싶어서?

설마, 절대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곧.

“음, 인사가 끝났으면 나도 들어가면 될까. 나탈리?”

굵직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문을 보자, 아직 들어오지 않고 서 있는 흑인 사내가 보였다. 시원하게 민 머리. 편한 복장으로 손을 앞에 모은 그를 보며 저 사람이 나탈리 포드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영. 소개할게요. 다니엘 화이트. 제 대학 동기이자 재작년 오스카 수상자인, 영화감독이에요.”

소개가 끝나자마자 다니엘 화이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지영의 앞에 섰다.

신장은 거뜬히 2m쯤 되어 보이고, 손바닥은 가장 보태서 솥뚜껑만 했다. 그런 그가 내민 손을 지영은 반사적으로 잡았다.

“하하, 반갑습니다. 다니엘 화이트입니다. 화이트라고 불러줘요.”

화이트라고 불러 달라고?

“……어, 네.”

이런, 대답이 한 템포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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