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39화
339화. 파리 오픈(7)
시합 날은 금방 왔다.
프랑스 유도협회는 강지영의 출전으로 팬이 많이 몰릴 거라고 예상했는지, 아예 경기장을 중간에 바꾸는 수를 썼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무려 4만을 넘게 수용하는 체육관인데, 관중석이 가득 찼다.
올림픽도 아니고, 월드컵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랑스 국민이 사랑하는 축구도 아닌데 경기장이 가득 찼다. 아니, 정확히는 좌석이 매진됐다. 계체가 끝난 날 저녁 프랑스 방송에서 아이돌 공연도 아닌데 경기장이 가득 찬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뉴스를 내보냈을 정도였다.
그런 관심과 기대 속에서 시합 날이 밝았다.
프랑스 측은, 지영의 이 인기가 강지영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보통 경량급부터 하는데 이걸 거꾸로 뒤집었다. 중량급이 앞, 경량급이 뒤. 심지어 경기를 3일로 나눴다. 속이 빤히 보이지만, 지영은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영은 유도인이었다.
유도인으로서, 유도의 인기가 이렇게 올라가는 건 바랄 일이지, 싫어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첫날, 장대호와 황석의 경기가 있었다.
이 열기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에, 대회를 3일로 쪼개서 내일 모래 시합인 지영은 황석의 파트너를 자청했다. 황석은 이걸 매우 부담스러워했지만, 지영은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때, 부담스럽지?”
“어, 음……. 그러네?”
“하하, 그래도 받고 넘겨. 나는 내일 시합이고, 컨디션이랑 체중도 전부 맞춰서 괜찮으니까. 그래서 성진이는 아직 간당간당해서 못 내려오게 했잖아.”
“그건 잘했다.”
“은정이랑은 통화했지? 좋은 꿈 꿨대?”
“응. 잘하고 오라던데?”
“그럼 문제없겠네.”
이건 황석의 징크스였다.
어차피 부부가 될 사이라 그런가? 한은정은 신기하게도 황석의 시합 날만 되면 재미난 꿈을 꿀 때가 있었다. 꿈이라는 것 특성상 그냥 대중없이 막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뭔가 의미 있는 게 종종 있을 때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특징적인 색깔이었다.
예를 들어 곰이 나오는 꿈인데, 곰이 누렇다.
으헝! 누런 곰이 앞발을 든다거나 이런 느낌이었다. 사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영도 솔직히 완벽히 믿는 건 아니었다.
‘은정이 성격이면 석이를 위해서 기꺼이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도 남을 친구다.
강하면서도, 연인 황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오욕을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다. 도은정과는 다른 의미로 여장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영은 예전에 황석이 한은정을 돕기 위해 주식을 판다고 했을 때, 그때 회귀한 이점을 살려 돈을 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걸로 한은정을 돕는 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은정이도 도움을 받는 것에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고.’
부담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게 한은정이란 친구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황석의 징크스가, 한은정이 만들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하면서도, 그냥 믿어줬다.
“몸 좀 더 풀자.”
“응.”
황석의 부딪치기를 받아준 지영은 경기가 시작되자 수건과 물병을 챙겼다. 프랑스 측은 확실히 신경을 써줬다. 경기를 직관할 수 있는 선수대기석 라인을 만들어주고, 몸을 풀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줬다. 경기장은 두 개였고, 9시 땡! 하자마자 시합이 시작됐다.
파리 오픈은 메이저 대회다.
오픈 컵 중에서도 가장 점수가 높고, 그래서 실력자들이 대거 나오는 경기였다. 그리고 이번 오픈 컵은 메이저 컵 중, 올림픽 앞에 있는 가장 마지막 대회이기 때문에 열기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참가 선수 중 태반이, 아니, 90% 이상이 올림픽 레이스에서 탈락한다.
그러니 이 악물고 경기에 임하는 건 기본이었고, 이 기본 때문에 대회의 열기는 시작부터 어마어마하게 타올랐다.
게다가 분위기란 게 있었다.
휑한 경기장은, 공연장은 무대에 서는 이들의 마음을 꺾는다. 유도선수들이야 원래 시합장에 관계자들이나, 소수 팬만 찾는 걸 알아서 휑해도 그러려니 한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관중이 가득 차면?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지.’
흥분, 고양감이 관중 덕분에 폭발한다.
쇼맨십이 느는 거야 당연한 거고, 기본적으로 이런 열기는 실력 자체를 기존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역할도 했다.
“석아. 알지? 이런 분위기.”
“알지. 한 번 호되게 당해봤고.”
지영의 말에 예전 더 챌린지가 떠올랐는지, 표정이 조금 굳었다. 당시 황석은 이벤트 매치에서 꽤 고전했다. 만원 관중 버프를 받은 상대가 실력 이상의 모습을 보이며 황석을 몰아붙였던 거다. 그 결과, 당연히 지지는 않았다.
상대는 은퇴 선수였다.
황석은 현역 중에서도, 세계급에서 노는 선수였고.
피지컬이야 우승까지 했을 정도니 크게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폼과 체력에서는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게다가 마백 체급은 체력이 아주 중요해지는 체급이었다. 마백, 플백의 경기 상당수가 체력에서 갈리는 경우가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황석이 이기긴 했지만, 그래도 고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이 있는 황석인지라, 시작부터 전의를 강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황석이 들어갔다.
황석의 첫판은 우크라이나 선수였다.
슬라브 계열 특유의 느낌이 강해, 마치 백곰 같았다. 모습만 보면 설원에서 순록을 사냥해 질질 끌고 갈 것만 같은 그런 위압감이 느껴지는 선수였다.
세르게이 보르조프.
이름도 딱 그쪽 이름이다.
세르게이는 황석과 마주 보고 서자,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눈빛이 번들거리는 게 유도가 아니라 뭔 옥타곤에라도 들어가기 직전 같았다. 그리고 저러는 이유는 빤했다.
‘자신의 위협적인 모습으로 상대의 기세를 꺾기 위한, 전초전.’
거짓말 같겠지만 이 전초전에서 실제로 승패가 날 때도 있었다. 이런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상당히 뛰어난 선수들이다. 그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가끔 실력과 멘탈이 따로 놀 때가 있었다.
시합용이다. 연습용이다. 이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황석은 전자였다.
황석은 지영과 함께 전형적인 시합용 선수였다. 연습 때 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합 때 더 잘한다는 뜻이었다. 황석과 붙어본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면.
야 황석이 그나마 제일 약하다.
오히려 강한결이나 임효중이 어려워.
황석은 잘하면 잡을 수 있겠는데?
쟤는 천재 사이에 낀 수재 같은 느낌인데?
이런 말이 많이 나돌았다.
그만큼 해볼 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뜻인데, 이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본다면 황석의 실력이 가장 약한 건 맞다. 체급에서, 가장 압도적인 경기력이 부족하단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선수들치고, 고1 어느 순간부터 그 누구도 황석을 꺾지 못했다.
‘잊지 말아야지. 황석도 지금까지 무패 행진이라는 것을.’
그런 황석을 이기려고 아주 많은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 대표팀에서 황석을 철저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당시 국가대표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름의 정보를 얻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철저하게 대비하고 선발전에 나왔지만, 그 선수는 한 번도 황석을 잡지 못했다.
‘왜냐면, 시합 때 더 강하거든.’
쿠웅!
와자리잇!
발음 끝이 살짝 늘어지는 심판의 절반 선언. 밭다리 되치기였다. 기세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심판이 하지메를 외치는 순간 세르게이는 강하게 황석을 압박해 들어왔다. 덩치는 비슷하지만, 신장은 머리 하나는 세르게이가 컸다. 신장과 팔다리도 기니까 덮치듯이 들어오면서 기를 죽이려고 한 거다.
그런데 황석은 그걸 그대로 받아줬다.
물러나지 않고 받아주니 제대로 잡은 세르게이는 순간적으로, 밭다리를 찍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황석의 노림수였다. 들어오는 순간 상체를 앞으로 확 숙이며 그대로 되치기를 찍었다.
그리고 그 되치기에 당한 세르게이의 신형이 붕 떠서, 아예 지갑 접듯이 접혀 떨어졌다. 그런데 그게 너무 접혀버려서, 한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절반을 땄다는 건, 매우 의미가 컸다.
우와!
함성이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리자, 세르게이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위압적인 모습은 사라진 거로 보아, 역시 초반의 저 모습은 작전이었다. 옛날과는 다르게 유도도 이제 다양한 작전이 도입되고 있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그러니 본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시합은 이제부터란 뜻이었다.
이제는 전략이 아니라, 각자 갖춘 실력으로 그저 맞붙는 거다.
좀 더 원초적인 경기.
인간이 투기에 열광하는 건, 매우 근거리에서 치고받으며 피어나는 열기의 탓도 컸다.
“흐아아……!”
심판의 하지메 사인에 크게 기합을 넣은 세르게이가 자세를 바짝 낮춘 곰처럼 접근했다. 어슬렁어슬렁. 앞발을 들어 올려 휘두르기 직전의 모습처럼 접근했다. 그러나 위압적인 느낌보단, 신중하단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저게 본래의 시합 스타일이라는 뜻인데…….’
지영은 냉정하게 상대의 스타일과 황석의 스타일을 비교했다. 황석은 친구 중에서도 가장 노력파였다. 본인 스스로가 일신의 재능 자체가 지영이나 친구들에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아서, 노력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화 자체에도 적극적이었다.
황석은 전형적인 허리기술 선수였다. 체격 때문에 업어치기보단, 밭다리부터 시작되는 발기술과 허리기술이 주력이었다. 업어치기는 그저 깜짝 기술로 사용했다. 그러나 요즘엔 전부 연마했다.
특히 업어치기를 주력으로 팠다.
그렇게 업어치기만 판 이유는, 전력이 너무 노출되어서였다.
한국 선수들도 황석이 가장 만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세계 유도인들의 시선이라고 달랐을까?
똑같았다.
그래서 황석은 집중 해부 대상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으니까 언젠가 파훼법 자체가 진짜 나올 수도 있었다. 황석은 그걸 경계했고, 그래서 스타일에 변화를 시도했다. 물론 그전에 감독, 코치와 충분한 회의를 거쳤고, 황석은 조금씩 자신의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것에 성공했다.
아시아 선수권 때는 아예 변화된 스타일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지영은 별로 변한 것 같진 않지만, 황석의 잡기 자세가 조금 변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합 중 상황이 여유롭지 않은데도 실력을 숨기는 건, 매우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변화를 준 스타일을 실험해보기도 아주 좋지.’
만약 변화를 준 스타일이 별로라면, 그걸 고수해야 할지 아니면 밀고 가야 할지도 정해야 하는 테스트였다.
그걸 테스트하기에 세르게이는 아주 적당한…….
상대였다.
[업어치기!]
장내 해설의 외침처럼, 황석이 벼락처럼 업어치기를 시도했다. 22년도에 너무 한국 패시브화가 됐다고 금지 기술로 지정됐다가, 다시금 풀린 말아업어치기였다. 빙글! 역방향으로 몸을 말았다.
‘걸렸다!’
세르게이의 반응이 느렸다.
황석은 업어치기를 거의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 기술 목록에서 빠져있었을 게 분명했다.
쿠웅!
제대로 말린 몸이 처음엔 좀 저항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빙글 말려서 똑! 떨어졌다. 이것도 금지되었다가 풀린 조항이었다.
멈칫, 했다가 힘에 밀려 넘어가도 점수를 주진 않았는데, 이렇게 하니까 경기의 박진감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결국 6개월도 가지 못해 폐지된 조항이었다.
잇포-온!
심판이 열기에 취한 듯, 첫판부터 매우 열정적인 한판 선언을 내렸다. 황석은 1분 만에 1회전 한판을 거두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2회전도 업어치기, 3회전도 업어치기, 준결승에도 업어치기로 한판을 거두더니 결승전에도, 업어치기 한판승을 따내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준결승부터는 업어치기를 그렇게 경계했는데도, 황석은 우직하게 업어치기로만 게임을 끝냈다.
“으아아아!”
포효하는 황석을 금메달 소식 기사의 헤드라인은, 업어치기의 달인? 이었다. 그리고 황석의 경기를 본 마백 랭킹 10권 내 선수들의 머리가 그대로, 배배 꼬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