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38화
338화. 파리 오픈(6)
하지만 마지막 기회는, 그녀가 거절했다.
“뭐예요. 이렇게 도망가요?”
“……도망?”
“네, 솔직히 누나가 잘못한 게 맞잖아요.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했어도. 그게 실수면 잘못한 거잖아요.”
“난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는데?”
도은정의 말에 같이 따라온 지영은 물론 전원이 와, 감탄하고 말았다. 도은정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다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자존심, 혹은 자존감.
범인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진짜 대박이었다.
도은정은 말도 구구절절하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SNS에 올렸던 것처럼 깔끔하게 이성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후회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너에게 피해를 입힌 건 맞다. 그러니 그에 관한 사과는 하겠다.
딱 그런 느낌의 사과였다.
그리고 도은정은 말문이 막힌 이성진을 스쳐 바로 떠났다. 이성진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도은정을 잡지 않았다.
“야! 은정아! 도은정 인마!”
전기정 감독이 나와서 급히 달려가서 도은정을 붙잡았다. 하지만 도은정은 감독에게 몇 마디 말을 하더니, 다시 갈 길을 갔다. 뭔 말을 했을까? 무슨 말을 했는데 전기정 감독이 그녀를 잡았다가 놔줬을까? 지영은 순간 그게 궁금했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도은정은 대표를 그만뒀다.
하지만 아마 유도를 그만두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다. 중요한 건 결국 이렇게 유망한 선수 하나가 떠나게 됐다는 점이었다.
“하 진짜…….”
도은정은 그 길로 숙소로 향했고, 짐을 쌌다. 그리고 곧장 선수촌을 떠났다. 떠나는 그녀는 당당했다. 위축된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눈이 새빨개진 현소연만이 끝까지 도은정을 잡다가, 그녀가 떠나자 근처에서 지켜보던 지영과 친구들에게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이제 속이 시원하니? 어!”
방향을 잘못 잡은 분노 표출이었다.
현소연은 도은정을 정말 잘 따랐다. 예전에 더 챌린지에서도, 도은정은 현소연을 걱정했을 확실히 챙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분노의 방향이 잘못됐다. 하지만 저렇게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니, 뭔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성진이 나서서 뭐라고 하려는 걸 강한결이 막았다.
현소연은 다행히 주변 동료들의 말에 겨우 이성을 찾은 것 같았다.
“미안…….”
“아닙니다. 그럼.”
담담한 눈빛과 시선으로 현소연의 사과를 받은 강한결이 돌아서는 걸로, 상황은 종료됐다. 이 일은 곧장 SNS를 타고 퍼져 나갔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도은정의 선택을 꼴 좋다고 조롱하는 쪽과 과했다는 의견이 맞붙어 팽팽하게 싸워댔다.
“빌어먹을 여론.”
그리고 이성진은 정말이지 기가 질렸는지, 평소 잘 내지 않는 짜증까지 냈다. 지영도 비슷한 마음이었지만, 이제 이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어제 나온 대진표를 확인했다.
파리 오픈.
올림픽 레이스에 뒤처진 선수들에게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코리아 오픈도 있지만, 사실상 파리 오픈에서 올림픽 출전 선수 90%가 확정된다고 보면 된다. 지영도 이 대회에 우승하면 2,500점 대에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사실 지영도 안정권인데, 상황을 봐서 뒤에 대회 하나를 더 뛸지 말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지영이 이런 상황인 만큼, 다른 선수들도 같았다.
랭킹 2,000점대 선수들이 대거 나오는 만큼 포진된 이름 전부가 만만치 않기도 했다. 상위 선수들이야 전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점수가 안정적이라, 괜한 부상을 입느니 나오지 않는 게 상책일 수도 있었다.
대신,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있었다.
니카이도 마사루.
일본의 유도 소년.
고등학교때 신지, 안자이 히카리와 함께 왔던 야나기가우라의 차기 에이스, 니카이도 마사루였다. 지영이 마사루의 순박한 눈빛을 보고 처음 떠올린 건, 정말로 일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년’이란 이미지였다.
마사루의는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다.
미야모토 신지나 지영이 쭉 빠진 느낌이라면, 팔다리가 짧은 건 아니지만 적당하고, 삭발한 머리통도 동글동글하고, 눈동자도 소만큼 커서 동글동글하고, 전체적으로 동그라미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반대로 힘은 장사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였던, 장사라는 표현을 넘어 괴물에 가깝단 생각이 드는 엄청난 힘이 뒤따라 떠올랐다. 보통 어느 임계점 이상의 힘을 갖췄으면 그냥 힘이 세다는 표현보단, 신력을 타고났다는 얘기를 하곤 하는데, 마사루가 그랬다.
‘진짜 힘 하나는 타고났지.’
거기에 더해, 그 힘을 베이스로 한 업어치기까지.
일본 유도 주인공이 갖춰야 할 조건의 절반은 확실히 갖춘 게 바로 니카이도 마사루였다. 그런 니카이도 마사루의 국제 데뷔전이 바로 파리 오픈이었다.
“벌써 얘도 국대……. 아니지. 나보다 한 살 어리지.”
일본 나이와 한국 나이가 다르고, 학교에 들어가는 나이도 달라서 복잡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지영보다는 한 살 어리다. 그러니 한국 나이로 스무 살. 그때도 상당한 실력자였으니 천재성이 빛을 발할 시간이긴 했다.
그런 마사루의 데뷔전이, 파리 오픈이었다.
오픈 컵중에서는 메이저 중의 메이저인 파리컵이니 마사루가 받는 기대를 지영은 알 것 같았다.
그런 마사루와 붙는 건 준결승전이다.
“그럼 결승에 올라갔을 땐 반대쪽에서…….”
반대 시드에서는 누가 올라올지, 확실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전부 강했고, 나쁘게 말하면 다들 고만고만했다. 아마 그날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가 올라올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게 반대쪽 시드였다.
지영은 이어서 영상을 확인했다.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게, 그래도 세계유도연맹에 선수들의 경기 영상이 매우 많이 업로드된다는 점이었다. 영상을 몇 개 봤더니 벌써 운동시간이었다.
도은정이 떠난 뒤라서 그런지.
“분위기 끝내주네…….”
속된 말로, 그냥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지만 거의 대다수 선수가 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일시적이라는 것을.
떠난 사람은 잊힌다.
특히 선수촌은 사람이 떠나는 게 일상다반사인 곳이었다.
* * *
대표팀에서 누군가 들어오고 떠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실력에 상관없이 한 선수가 떠났지만, 그 자체가 워낙에 비일비재한 곳이 바로 선수촌이었다. 오늘의 동료가 선발전이 지나고 나면, 없는 곳.
새로운 룸메이트가, 새로운 동료가 들어오며 계속해서 경쟁해야 하는 곳.
애초에 선수촌 입촌 자체도 경쟁이었다.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아예 들어오는 것조차 불가능한 곳이 선수촌이었다.
그렇다 보니, 안타깝게도 도은정의 존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는, 거의 이전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냉정하고 냉혹한 현실이었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거기에 시합이 2주 뒤로 다가오자, 다들 도은정은 머릿속에서 밀어내고, 시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게 아니었다. 우선순위가 변해서 밀려났을 뿐이었다. 뭐든 당장 급한 걸 생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파리 오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몇 달 만에 찾은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 공항에 도착하자 역시 이번에도…… 엄청나게 많은 팬이 지영을 반겼다.
로비가 아죽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공항 측에서 자체 경비로도 부족해 사설 경호업체까지 고용했다는 얘기가 기사화됐을 정도로, 팬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지영을 사랑해주는 나라가 미국이라면, 유럽에서는 단연 프랑스였다. 라피앙 파벨로의 일로 프랑스 국민은 지영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나라인 만큼, 자국의 예술가가 지영을 목숨을 걸어 테러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지난번 파리에서 보여줬던 모습 때문에 아예 절정을 찍었다.
그런데 절정인 줄 알았던 게, 절정이 아니었다.
2주 전에 나간 강지영의 광고 다큐멘터리는 나오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끌었다. 사실, 모두 지영이 포드와 기존의 짧은 광고를 찍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력한 정보 통제 뒤 나온 건, 미국에서 강지영이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 1시간 분량의 영상이었다. 특별한 게 없는, 그런 영상이었다.
포드의 새로운 라인에서 출시된 차량을 받고, 그걸 타고 근처를 놀러 다니며 함께 하는 영상이었다. 친구들인 황금세대도 나왔고, 여기까지는 별거 없었다. 하지만 보육원을 가면서부터, 분위기가 변했다.
음악으로 영상의 분위기를 조금 비틀어준 것만으로도, 이전의 밝은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났다.
강지영은 포드를 탄다!
강지영을 포드에 태웠다.
이런 느낌이 싹 지워졌다.
운동선수 이전에 배우, 아니, 운동선수지만 배우기도 하니까 연기에 능하다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기라고는 해도, 보육원에 들어선 이후 카메라에 담긴 지영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분위기, 공기, 느낌, 이런 것들이 확연히 바뀌었는데 처음엔 그게 보육원이란 무거운 공간에 서 있기 때문인지 알았다.
하지만 거의 마지막쯤에, 지영이 보여준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영상에서도 느껴지는 지극히 확연한 변화.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감탄했다. 와, 연기 죽인다……. 유도뿐만 아니라, 확실히 강지영이 배우로서 연기를 잘하긴 잘하는구나. 이렇게 감탄했다.
새삼 다시 한번 지영이 배우라고 느끼는 연출이었다.
그리고 2부가 나왔을 때도 다들 강지영은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다.
이렇게들 생각했다.
힘든 일을 겪은 친구를 그냥 지나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가만히 옆에서 기다려 주고, 결국 문을 연 친구와 친구가 되어주고, 기운을 주고. 응원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고.
이걸 보면서 역시 강지영은 다르다.
이런 생각이 주류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시점은 지영의 행동보다는, 지영의 기분, 혹은 분위기에 맞춰져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이지?
-마치 다 안다는 저 눈빛이 이상하게 거슬려.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니, 나도 동감이야. 내 눈에도 지영은 매우 힘들어하고 있어.
-동질감을 느끼는 눈빛 같은데. 아닌가?
-동질감? 그게 가능한가? 강지영의 인생사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거라고. 그의 인생에 조나단이 겪었던 일만큼 힘들었던 일이 있던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어.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응. 음주운전 사고였다던데.
-그럼 그때의 아픔이 아직 다 치유되지 않은 걸까?
-죽음은 치유되지 않지. 그것도 가족의 죽음이라면. 나는 아직도 강도에게 나를 지키다 총에 맞은 형을 잊지 못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지. 가끔 나오는 내 눈빛이, 저 눈빛이야. 나는 조나단의 얘기를 들었을 때, 아마 비슷한 눈빛이었을 거야.
-공감, 공감이라.
-지영은 대체 어떻게 조나단을 공감하는 걸까? 역시 아픔을 느껴서일까? 그는 지극히 감성적인 사람이잖아.
-그렇지. 감성적이지. 하지만 그만큼 이성적인 친구기도 해. 일단 중심이 굉장히 단단하잖아. 그런 중심은 이성적인 사고력에서 나오거든. 감성적인 친구들은 나쁘게 말하면 줏대가 없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잖아.
-그렇지만 여러 사건에서 보면, 확실히 감성적인 모습도 보여주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지영이 감성적이다, 이성적이다로 싸우는 거야? 왜?
-어이 브라더. 이건 싸움이 아니라 토론이라고?
-미안한데, 난 여자거든?
-오, 쏘리 시스터.
대화가 중구난방으로 튀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다 같았다.
그러나 그래도 중점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째서 강지영은 소년의 우울한 눈빛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가.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영상은 어마어마한 화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홍보 효과로는 차고 넘쳤다.
효과가 넘쳤기 때문에 당연히 주문은 폭주했고, 주문이 폭주했기 때문에 또 기사가 쏟아졌다. 그래서 지영의 다큐는 제목이 없었음에도, 포드의 운명이란 제목을 네티즌들이 알아서 붙여줬다.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인 새로운 프로젝트의 대성공 운명이 이것 하나로 결정되었다는 뜻이었다. 모델 혼자서 제품의 흥행을 완벽하게 견인했다는 사실이, 현재 강지영이란 한 인간이 가진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이 모든 게, 지영이 다시 세상과 담을 쌓고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고, 어떻게 보면 고작 오픈 컵일 뿐인 대회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