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336화
336화. 파리 오픈(4)
훈련에만 집중하고 싶은 게 지영의 마음이지만, 사실 지영은 그럴 수 없는 몸이었다. 오후 운동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지영은 감독에게 허락을 맡고 잠시 선수촌을 나섰다. 지영이 향한 곳은 선수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카페였다.
선수들의 훈련 외 업무, 매니지먼트 쪽 업무는 보통 이곳에서 진행됐다.
카페에 도착한 지영은 곧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가장 안쪽 룸으로 이동했다. 룸 안에는 임은진과 제시카 비즈 감독, 그리고 메리 킴과 휴가 때 황금세대를 서포트해 준 포드의 직원들이 있었다.
고개 숙여 인사한 지영은 임은진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팀장님.”
“반가워요. 음, 지영 씨, 지금은 휴가 때와는 또 느낌이 다르네요?”
제시카 비즈 감독은 역시 영상을 찍는 사람이라 그런지 지영을 보자마자 변한 모습을 단번에 알아봤다.
“아, 이거요. 감량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아, 감량. 항상 느끼는 건데, 지영 씨가 운동선수라는 걸 자주 까먹네요. 매번 영상으로 접해서 그런가. 호호.”
제시카 비즈 감독의 말에 지영은 그냥 가볍게 웃는 걸로 받았다.
“오늘 여기까지 온 건, 일단 1차 편집이 완료되어서예요. 1차 편집본을 본 나탈리 씨는 괜찮다고 했고, 이제 배우님만 괜찮다고 하면 자잘한 부분을 좀 더 수정한 뒤에 방송으로 나갈 거예요.”
“빨리 됐네요?”
“돈의 힘이죠. 24시간 편집팀이 가동되니, 느리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답니다.”
역시 자본의 나라. 미국답다.
돈의 힘이라는 말은 결국 인력을 갈아 넣었다는 뜻이니, 포드가 얼마나 몸이 닳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총 몇 부작인가요?”
“2부작 예상해요. 러닝타임은 편당 70분 정도고.”
“적당하네요.”
70분짜리 두 개.
이 정도면 매우 적당한 시간이었다. 두 편을 합치면 딱 영화 한 편 분량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정도 분량이 나와요? 억지로 짜 맞추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찍을 때는 안 했던 걱정이다.
하지만 다 찍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조금씩 생긴 걱정이었다. 찍기 전엔 사실 자신이 있었다. 냉정하게 평가를 해봤을 때, 단순한 단발성 CF보다 오랜 시간 자신과 차가 노출되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찍는 내내, 자신의 선택은 틀린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다 찍고 나자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걸리는 게 있었다. 그때는 미처, 정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그리고 조나단은 어떻게 나가나요?”
“분량은 넘치니까 넘어가고, 조나단도 걱정하지 마세요. 지영 씨가 가고, 조나단에게 조심스럽게 허락받았거든요. 조나단이 그러던데요? 친구를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고.”
“아……. 하아.”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은 다큐를 찍는 중이었고, 그렇기에 자신과 함께 조나단이 그대로 노출되었다는 걸. 조나단은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런데 그게 다큐에 그대로 나가게 되면? 이건 무조건 지영이 다큐에 조나단을 이용한 꼴밖에 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자신의 트라우마도 자극되는 바람에, 그 부분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아예 떠올리지조차 못했다. 같은 처지에 있던 조나단을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지영은 나중에 알았다. 마리나 수녀도 허락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야 어? 하면서 생각이 나버렸다.
그래서 곧장 임은진을 통해 포드 측으로 연락했고, 포드의 연락을 받은 제시카 비즈 감독이 직접 조나단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다. 지영이 직접 하고 싶었지만, 그건 임은진과 포드 측에서 만류했다. 지영은 좋은 역할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 된다면서, 설득은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면서.
고민하던 지영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다행히 조나단은 지영의 사정을 이해해 줬다. 따로 메시지를 넣어야겠단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제시카 감독은 파일을 열어 영상을 재생했다. 1부의 시작은 아시아 선수권부터였다. 지영이 싱가포르에 입국하는 순간, 시합을 치르는 장면, 그리고 우승과 동시에 미국으로 출발하면서 본격적인 흐름을 탔다.
싱가포르 도착에서 시합, 미국에 도착해 포드를 만나고, 제시카 비즈 감독 본인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10분 정도였다. 4일에 가까운 기간을 10분으로 압축한 거다. 그런데도 지영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단 생각이 들었다.
‘다큐 전문 감독님이라 그런가. 영상이 조금도 과하지 않아.’
극적인 느낌이 없다.
지영의 필모는 고작 세 작품이 전부다.
예인. 나의 무사님 1, 2. 이렇게가 전부인 지영이지만, 안목이 그 작품 수만큼 부족한 건 아니었다. 반대로 지영은 이런 쪽으로는 극히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보는 영상과 이전에 찍었던 것들의 차이점을 지영은 확실히 알았다.
예인은 지영을 극히 나른한 구도로 잡았다. 가끔 샷이 흔들릴 때도 있었는데, 이는 극 중 서건의 시선에 담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아주 소소한 장치였다. 보통은 안 쓰지만, 캐릭터 성을 살리기 위해 쓰는 의도적인 기술인 셈이다.
그럼 나의 무사님은?
지영의 파트는 굉장히 정적이다. 활동성이 극히 높은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홍 감독은 지영을 가능한 한, 아니, 최대한 정적으로 그려내려 애썼다. 이 경우 행동과 대비되는 구도와 장치로 인해 캐릭터와 상황에 이중성을 부여했다.
이런 두 작품은 화려하고 다양한 연출 기법이 쓰였다.
그렇다면 이번 다큐는?
뭐가 없었다.
그냥 정말 말 그대로…… 찍기만 했다.
그리고 찍은 걸 그 어떤 사심도 없이 담담하게 풀어냈다. 아무런 보정도 없었다. 보통은 좀 건드리기 마련인데, 이들은 편집점에서 정말 이야기의 ‘연결’만을 본 것처럼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그게 독특한 ‘멋’을 냈다.
그래서 지영은 영상을 정말 빠져들어 확인했다. 초반 10분 뒤 30분은 지영의 휴가였다. 미국이란 거대한 스케일에 좀 놀라며 휴가를 즐기고, 갑자기 일정을 바꿔 자기가 후원한 곳을 찾는 지영의 모습은 1부 후반부였다.
그리고 만나게 됐다.
서로 같은, 눈빛을 가진 둘이.
“이걸…… 언제 찍었대요?”
신기했다.
지영의 기억 속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왜냐면 조나단을 처음 바라봤을 때 자신의 시선에 카메라맨이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영상에는 지영의 옆모습이, 정확히는 정면에서 살짝 우측. 시야로 따진다면 1시 방향 쪽 구도에서 자신을 잡고 있었다.
“지영 씨가 너무 집중해서 못 보았을 뿐이에요.”
제시카 감독의 말에 지영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을 만났을 때 자신은 분명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트라우마가 멋대로 작동해 올라왔고, 그 결과 지영은 주변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여러모로, 참 자신답지 않았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물론 후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뿌듯했다. 위험에 처했던 친구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조나단과의 조우.
서로 알 수 없는 눈빛의 교환.
비슷하게 뚝 떨어진 잿빛의 눈동자.
“음…….”
신기하게도, 그런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같이 영상을 보던 이들 중에는 놀라서 침음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지영은 그저 담담했지만, 현재 지구에서 제일가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인간이 왜 저렇게 죽은 동태눈깔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저들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
심지어 이 부분은 강한결조차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지영은 이러한 사실은 누구에게도 오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 감이 좋은 이들은 지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지영은 그 시선을 조용히 감내하면서 어떤 티도 내지 않았다.
1부는 이렇게 끝났다.
“좋네요.”
사실 정말 별거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래서 좋았다. 지영은 이대로 나가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이쪽 업계에서 탑 레벨을 달리는 제시카 감독의 능력이 단연 돋보이는 편집이었다.
“그럼 이대로 나가도 되겠죠?”
“네. 그런데…… 영상으로 보내주셔도 됐을 텐데.”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최고긴 하다만, 이 영상 하나 때문에 한국까지 오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물었더니.
“아, 따로 한국 MBS와 미팅도 있어서요. 이쪽 방영권을 그쪽에서 사고 싶다고 해서, 내일은 MBS 사람들 만날 거예요.”
“아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포드 팀이랑 같이 들어왔구나.’
하긴, 한국보다 외국에 팬이 더 많은 지영이고, 지금 당장은 미국 전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지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팬은 수는 적어도, 오히려 진심으로 지영을 좋아하는 팬은 당연히 한국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런 팬들을 위해 언제나 불철주야 노력하며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곳이 바로 MBS였다. 당연히 그들은 이번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나가기만 하면 최소한 중박은 확정될 테니, 소스를 받은 그들은 미친 듯이 포드와 접촉해 결국 미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거기 미팅 담당자가 기자던데, 지영 씨랑 매우 친한 사이라고 하던데요?”
제시카 감독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에 자신과 친하면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는, 은인과도 같았다.
“네, 이선영 기자를 말하는 거면 저랑 친한 사이 맞아요. 저한테는 누나 같은 분이고, 제가 이 자리에 올 기회 자체를 제공해 주신 분이세요.”
“어머, 그래요?”
“네.”
지영은 짧게 그녀와의 일화를 설명했다.
그녀가 자신의 일을 기사화했던 것, 그게 연이 되어 예능에 출연하게 됐고, 그 예능이 시발점이 되어 연예인의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얘기를 짧게 설명하자 제시카 감독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은인이네요?”
“네, 그렇죠.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이런 부탁까지 할 사이예요?”
“네, 은인이고, 누나 같은 사람이란 말은 진짜거든요. 그래서 힘든 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에요. 옆에 은진 누나랑 같이요.”
지영의 말에 분위기는 매우 훈훈해졌다.
관계.
지영은 따로 특혜를 달라고 한 건 아니다. 그저 잘 부탁한다는 말만 했을 뿐. 이 말은 분명 그 이상의 힘을 가지겠지만, 지영은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참, 방송 계획은 잡혔나요?”
조용히 있던 임은진의 질문에, 마찬가지로 조용히 있던 메리 킴이 대답했다.
“네, 1차 방송은 아마 일주일 뒤가 될 것 같아요. 마지막 편집과정 마치고, 컨펌 나는 즉시 바로 나갈 거예요. 그리고 2회차는 2주 뒤에 나갈 거고요.”
“곧바로 내보내는 게 아니네요? 음, 화제성이 연결될까요. 2주간?”
“그건 저희 포드 팀에 맡겨주세요. 호호! 그쪽은, 저희도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거든요!”
“하긴, 그렇겠네요.”
마케팅에 있어 기업만큼 진심인 곳도 없었다.
요즘엔 엔터사에 조금 밀리는 감이 있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아남은 기업 중 순위권에 드는 포드도 마케팅 영역에 있어서는 실력이 출중하다 못해 넘사벽인 인재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중 절반은 이번 운명 프로젝트 한에서지만, 오히려 프리랜서라서 이번 기획에 더욱 열정적이었다.
미팅은 여기까지.
시간을 보니 야간 운동이 거의 코앞이었다.
“누나.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훈련 시간이 다 돼서.”
“응. 나머지는 정리해서 보내줄게.”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꾸벅.
제시카 감독 일행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한 지영은 곧장 선수촌으로 돌아왔다. 별로 쉬지 못해 좀 피곤했고, 지영은 무리한 근력 운동보단 기술 연구를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도복을 챙겨 입고 도장에 도착했더니, 몇몇 선수들이 이미 나와서 연습 중이었다.
대부분 남자 선수인데, 그중 한 명만 여자 선수였다.
추미소.
그리고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지영이 다가가며 묻자, 한숨을 내쉰 이성진이 대답했다.
“은정 선배. 그만두겠대.”
“뭐?”
“현소연 선배한테 그랬대. 자기가 책임지고 나가겠다고. 이미 SNS에 올릴 글도 다 써뒀고. 내일 올리고 나갈 거래.”
“…….”
하아.
답이 없어 방치하고 있던 문제가 결국은 곪아서, 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