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73화
273화. 나의 무사님S2(20)
서걱!
꽈드득!
앞서 살짝 베었고, 후로는 옆구리를 쪼개듯이 후려쳤다. 이족 전사들이 자유분방하고, 막 싸움의 대가에 가깝지만, 본능적으로 전황의 흐름을 볼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고가 만들고, 재가 벌려 놓은 틈이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이는 직감의 영역에서 받은 깨달음이었고,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 틈으로 우악스럽게 몸들을 날렸다.
퍽!
퍼억!
방패가 다시 모여들려고 하지만, 가장 먼저 몸을 비집고 들어간 이족 전사들은 다들 장사였다. 웬만한 중형 짐승 따위는 그냥 어깨에 걸쳐 업어 숲을 뛰어 활보가 가능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이족 전사가 맞붙어서 버티자, 한쪽 면만큼은 밀려나지 않았다.
진형이 한쪽으로 쏠리자, 당연히 방패의 방향이 옆으로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옆구리가 빈다.
그간 방패만 때려 답답함이 가득했던 이족 전사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짓이겨 들어갔다. 그에 화들짝 놀란 호위군이 다시 방패 방향을 정면으로 돌리자, 한쪽으로 벌어진 틈은 봉합되지 않았다.
틈이 생겼다.
재는 그 사이로 다시 몸을 날렸다.
텅!
퍼억!
어깨로 방패를 들이받은 다음, 바로 옆으로 난 작은 틈으로 칼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푸욱! 살을 뚫고 칼끝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재는 반동을 줘 한 번 더 찔러 넣은 다음, 그대로 비틀어 뽑았다. 놈이 작정하고 칼날을 잡으면 그것도 곤란하니 치명상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가 좋다.
그리고 제법 칼날이 들어갔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중상이고, 중상이면 얼마 못 가 출혈로 인해 전투력은 바닥을 치게 될 거다.
틈은 그렇게 하나씩 내고 있었다.
재는 자신을 밀치는 호위군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쭉 뒤로 물러나며 전황을 살폈다. 좌에서 우로. 빠르게 슥 훑어본 결과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밀집했을 때 최대로 힘을 내는 호위군을 일단 반으로 쪼갰다. 일단 그것만 해도 정말 큰 성과였다. 호위군이 무서운 이유는 저렇게 뭉쳐서, 뚫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재수 없이 안으로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기도 하고. 그런 연유로 저렇게 앞에서 딱 버티고 서 있으면 상대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천하의 백적파로도 못 뚫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승기를 잡았나? 그건 아니었다. 반으로 가르면서, 사태를 관망하던 제국제일검의 기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재는 뒤로 빠졌다.
제국제일검 진이 전장에 나서면, 그건 전황이 완전히 뒤집힌다는 걸 의미했다. 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놈이 움직여서 갑자기 이족 전사들을 치려고 하면 그걸 막아야 했다.
호위군과 전사들은 그냥 치고받게 둬야 한다.
두 집단 간의 전투는 승기가 이미 육 할 이상 이쪽으로 넘어왔으니, 이대로 흘러가면 이쪽이 잡는다. 문제는 저 제국제일검이고.
타다닷!
제국제일검 진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가장 가까이 있던 이족의 머리 위로, 검을 벼락처럼 내리쳤다. 끊어지지 않는 한 호흡에 훅 떨어지는 검인데 얼마나 빨랐으면 표적이 된 이족은 아예 그걸 자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이런 전장에서 감각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감이 좋지 않으면, 눈먼 칼날에 뒤통수가 뚫려 죽는 게 전쟁터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려주는 감각은 선천적이기는 하지만, 후천적인 경험으로 어느 정도 메울 수도 있었다. 이족 전사들은 이런 감각이 진짜 타고난 인간들이었다. 선, 후천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지조차 못 하고 있었다.
까앙!
재가 막으며 불꽃이 훅 튀는 순간.
“어흐!”
놀라서 몸을 푸들 떨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은밀한 이동이었다. 폭발적으로 뿜어지던 기세가 공격하는 그 순간에만 고요하게 변하니, 감각에 의존해서 저 공격을 읽어내지 못한 거였다. 단순히 그 정도가 끝도 아니었다. 손목이 저릿했다.
아주 단순한 공격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쭉 일자로 내리긋는 검격.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격을 막은 손목이 뻐근했다. 검에 담긴 힘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뜻이었다.
‘역시 제국제일검…….’
한 방이었지만, 제국제일검의 위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살이 떨렸다. 제대로 힘을 담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정도라면…….
‘더 괴물이 됐네?’
재는 그간의 실전으로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단일, 개인 전투는 사실 제국제일검 말고는 져본 적도 없었다. 역모가 일어나기 전엔 유목민 최고의 전사라고 했던 놈도 잡았다.
그만큼 재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제국제일검의 한방에, 그 자신감은 와르르 무너졌다. 물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겁을 먹을 이유도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재의 눈빛이 돌변했다.
시린 빛을 토해내자 제국제일검 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재를 자극했지만,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세상에서 격리된 기분이 들었다. 그 격리된 세상에서 오롯이 진의 움직임만 색이 있었다.
모두가 흑백이고, 진은 색이 있다.
그렇기에 유난히 눈에 띄었고, 덕분에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보였다. 손등에 굵직하게 올라온 힘줄이 꿈틀거린 순간, 진의 신형이 쏘아졌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신기한 발걸음이다. 상체는 움직이지 않는데, 하체만 다다닷, 움직인다. 보통 내달리기 시작하면 상체가 살짝 앞으로 쏠리고, 팔이 움직이니까 좌우로 비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진은 그게 없다. 상체는 정말이지, 미동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뚝 떨어지는 일격.
상체의 반동이 없었으니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어야 정상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정수리를 쪼개오는 검격엔 상상을 초월하는 거력이 담겨 있었다.
쩌엉!
쇠와 쇠가 부딪치며 보통 깡! 소리가 나게 마련인데, 그 이상으로 단단한 소리가 났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인외의 힘이 담긴 건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재는 전에도 이런 공격을 받았고, 그때도 막아냈다.
그때 재가 패배를 시인한 건 순전히 호위군을 먼저 상대하느라 체력이 빠져서였다. 실제로 부딪치긴 했지만 재도, 진도 결국엔 진심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니 진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조건 재가 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쩡! 쩌적!
눈부신 빛살이 순식간에 가슴과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고 날아드는 매처럼 날렵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이를 악문 재가 상체를 틀어 가슴을 노리는 검격을 피하고, 그 빠른 공격을 손목의 힘으로 잡아, 비틀어 다시 쳐올린 검격은 예상했기 때문에 쳐냈다.
신기하다.
정말 빛살처럼 빠른 느낌인데, 그 빠름에 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건 시선으로 쫓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세에서 나오는 궤적을 예상하고, 반응하는 경지였다. 제국제일검 진의 경지는 확실히 놀라웠다.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정말 신선이 인간계에 잠시 놀러 내려와 유희를 즐기는 거로 생각해도 무방한,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을 상대하는 재도, 만만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한 번 검격을 받을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지만, 열 합이 넘어갔을 땐 이제 그 힘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제국제일검의 제대로 된 족보에서 내려온 무예를 익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재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재에겐 스승이 없었다.
스승이 없기에 족보도 없었다.
제대로 된 족보가 없으니, 막 싸움에 가깝게 무예를 익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재라는 인간의 족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 감각, 성향을 토대로 발전시킨 자신만의 족보 말이다. 이런 족보를 익힌 재도 결코 약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교하게 교정되어 가며 내려온 제국제일검의 족보는 분명 막강하지만, 오롯이 한 인간만을 위해 태어난 재의 족보도 어디 가서 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의 재능은 진짜였다.
특히 감각의 영역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휘익!
뒤쪽의 전투에서 튄 돌이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재는 틱! 소리와 함께 그 돌멩이가 날아올 때 이미 인지했고, 이어서 정면으로 정직하게 검을 찔러 넣는 진을 확인했다. 둘의 경로가 맞으니, 칼과 돌이 자기 몸과 만나기 전에 슬쩍 길을 열었다. 그러자 돌은 그대로 진의 얼굴로 날아갔다. 순간 돌이 눈앞에 나타났지만 놀라지 않고 고개를 트는 진. 그 찰나의 순간이 틈이다.
빠악!
뚝!
고개를 비튼 순간 재는 주먹을 진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제대로 들어갔다.
진의 몸이 붕 떴다가 떨어졌을 정도로, 제대로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몸이 뜨는 그 순간 진이 일검을 그은 것이다. 진의 상체가 뒤틀린다 싶은 순간 상체를 뒤로 뺀다고 뺐는데, 가슴이 제대로 갈렸다. 피가 훅 튀었다. 하지만 다행히 피륙에서 살짝 더 들어간 정도였다. 날카로운 지방과 근육까지 갈린 건 아니라서 화끈한 통증이 뒤따랐지만, 전투에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재는 이 일격을 허용한 걸 아쉽다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옆구리에 꽂아 넣었을 때 진은 팔꿈치로 막았다.
뚝! 소리가 날 정도로 제대로 후려갈긴 일격으로 재는 확신했다. 분명 팔꿈치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재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뒤로 물러난 진은 재의 주먹을 막은 팔을 들었다. 그런데 근경련이 온 것처럼 바르르 떨리는 팔을 보니, 제대로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재는 피륙이 벗겨져 피가 튀었지만, 그래도 진의 팔 하나를 잡았다.
‘가죽 벗겨지고 팔 하나 깼으면, 남는 장사지.’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어도, 거꾸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이득인 장사였다. 검수고, 검객이다. 검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 칼날 위에 목숨을 저당 잡힌 불쌍한 영혼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팔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기본적으로 양쪽 다 검을 쓸 수 있다고 해도, 하나만 쓸 수 있는 것과 둘 다 쓸 수 있는 건 심적인 부담 자체에서도 천지 차이였다. 그런데 재는 진의 팔을 잡았다. 주력으로 쓰는 오른쪽 팔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걸로 이제 몸의 중심 자체를 흔들기 아주 좋아졌다.
팔 하나를 잡았으니, 여유가 생길 것 같았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뚝, 뚜둑.
팔을 끼워서 맞춘 진의 입가에, 처음으로 사나운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맹수만큼 포악한 느낌보다는, 굶주려서 한없이 예민해진 짐승을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그게 재의 머릿속에서 ‘이득’이라는 것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타닷!
한달음에 다가와 벼락처럼 검을 그었다.
이전보다 빠른…… 일격이었다. 익숙해져 있던 속도를 벗어나 가슴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서 미처 몸을 빼기도 전에, 서걱! 제대로 가슴이 걸렸다. 하지만 그래도 몸을 빼던 상황이었던 게 다행이었다.
세로가 아니라, 이번엔 사선으로 비스듬히 갈렸다.
벼락이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몸이 빠졌기에 망정이지, 안 빠졌으면 이마부터 그대로 갈렸을 뻔했다. 인지를 벗어난 속도는 아니었다. 그저, 익숙해진 속도보다 더 빨랐기 때문에 잠시 혼선이 왔을 뿐이었다.
스악!
그 속도로 다시 한번.
그러나 재는 이미 보았다.
쉬익.
쩌엉!
빠각!
막고, 비틀어 흘리면서 그대로 다시 옆구리에 한 방. 반사적으로 진은 이미 다친 팔로 막았고, 제대로 으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소한 뼈가 주저앉는 소리였다. 이걸로 이제 왼팔은 아예 기능을 상실했을 거다.
빠악!
하지만 진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몸을 띄워 그대로 발을 교차해 재의 목을 노렸다. 그걸 재는 막긴 막았지만, 온몸이 짜르르 울리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피가, 훅훅 튀었다. 반사적으로 가슴을 막았지만 이미 시작된 출혈이 심상치 않았다.
한쪽 팔이 망가져 덜렁이는 진.
가슴에서 피가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재.
둘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깊었다. 하지만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전투 중인 이족과 호위군도 알고 있었다. 진과 재의 전투가, 이 전투 자체를 결정지을 거라는 걸. 그래서 둘은 물러서지 않았다.
‘장기전은 위험해.’
제일검의 팔을 하나 접수했다고는 하지만, 이쪽은 하필이면 출혈이 일어난 상태였다. 출혈의 최대 적은 움직임이었다. 작은 움직임도 상처 부위를 자극해 피가 더 빠르고 많이 나게 할 것이고, 이 정도 출혈이면 오래 걸리지 않아 눈앞이 핑핑 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끝낸다.’
끝을 봐야 할 때였다.
시간을 끌어봐야 부담스러운 건 자신이니까. 그래서 재는 칼을 역수로 돌려 잡았다. 그 모습에 진은 씩 웃더니, 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상단으로 끌어올렸다. 재의 가슴을 갈랐던 ‘벽력일섬’의 준비 자세였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고함과 비명도, 갑자기 불기 시작한 광풍도, 전부 멈췄다.
오롯이, 진만 보였다.
꿈틀! 하는 느낌과 진이 손가락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강하게 검을 쥐는 순간, 재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벼락?
‘너만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지.’
경지에 오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쩌엉! 쩌저적! 쨍강! 스-! 가악!
막고, 깨지고, 부러지고, 베이는 소리가 한 호흡 안에서 주르륵 울리면서 승자와 패자,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