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72화
272화. 나의 무사님S2(19)
곤룡포.
오직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용포를 입고 마차에서 내린 후의 모습에 재의 머릿속에 두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 후는 역적이다. 역모를 일으켜 황제 폐하와 삼공의 일인이셨던 양부와 황가의 적자를 모조리 죽이고, 궐을 손에 넣은 자였다.
그러니 뭐 위치상으로는 승상인 놈에 버금가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이 황제인 건 아니었다.
“후…… 네가 감히!”
그런데 용포를 입었다.
특히 저 용포는, 황제의 상징이었다. 언젠가부터 용포에는 독특한 ‘황제’만의 문양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대 전의 황제가 학을 그리고 좋아하여 용포에 그려 넣었던 것부터 시작됐다. 용포가 허락이 된 유일한 황자에겐 오로지 용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되면 용 말고도, 원하는 것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전대의 황제는 매를 넣었다.
승천하는 용과 그 용을 뒤에서 쫓는 매의 형상을 가진 용포였다. 그렇게 두 가지 영물이 새겨진 용포는, 오로지 황제에게만 허락이 된다.
이런 용포 말고, 또 다른 황제의 상징은 바로 옥쇄였다.
이 두 가지가 황제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지금 후가 입은 용포에는 귀면탈이 새겨져 있었다. 귀면탈이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귀면탈이 승천하는 용의 꼬리를 물려 달려드는 꼴이다. 그만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단순한 용포도 아니고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두 가지’ 문양이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그게 재의 머릿속에, 무한한 분노를 일으켰다.
진짜 분노.
재는 양부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도, 백적파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 몰래 목숨을 걸었을 때도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아. 내가 그래도 제국에 충심이 남아 있구나. 이걸 알게 된 계기가 됐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평화롭던 제국을 피로 물들인 역적이, 곤룡포를 입다니.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따르는 제국제일검이라. 세상이 정녕 미쳐 돌아가고 있구나. 하하. 치세를 끝장낸 역적이 곤룡포를 입었어. 그것도 스스로! 이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하하하!”
분노로 인해 꼭지가 돌자,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재를 바라보던 후가 싱긋 웃었다.
“치세라.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백적 단주?”
백적파는 깨졌는데, 여전히 자신을 백적파라 부르는 후. 뭐, 호칭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치세였지. 내가, 내 친우들이, 그리고 제국의 수많은 장정들이 경계를 지키면서 유지하던 평화다. 당장 네놈이 역모를 일으킨 덕분에 북쪽의 유목민족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남쪽의 해적들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준동 중이지. 후. 빌어먹을 어떤 개자식이 역모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최소한 북방과 남해의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도 않았어.”
재의 나직한 말에 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건 역적의 목만 베면, 오래 걸리지 않아 진압할 수 있습니다.”
“역적?”
“몰랐습니까? 소식이 늦군요. 이미 저는 황제입니다. 제국의 이름은 ‘후’이지요.”
빠직!
후 제국?
이전의 제국은 ‘선’이었다.
그런데 후로 바꾸었다.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실제로 이미 제국의 이름은 바뀐 상태였다. 연을 죽이고 황제의 위에 오를 거로 생각했었는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후는 스스로 황제에 이미 오른 뒤였다.
그리고 이번 정벌에 나섰다.
황제가 된 이후, 첫 위업을 세우겠다고 천명도 했을 터다. 그쪽 소식이 뒤늦게 들어와 몰랐지만 이미 ‘선’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였다. 그러니 제3의 시선에서 본다고 했을 때도, 재와 연의 반항은 정당성은 있어도 반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 기가 막힌 재였다.
하지만 재는 곧 신색을 회복했다. 놈이 황제에 오르건 뭐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괜찮아. 너만 잡으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래, 저놈이 원흉이다.
후 제국? 그런 건 저 역적의 목만 따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게 분명했다. 본래 나라를 세웠을 때도 건국 초기가 가장 위태하다. 나라 자체가 깊이도 없고, 내구성도 탄탄하지 못해 구심점만 쳐내면 와르르! 정말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이는 어느 집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대로 정권 교체의 순간을 가장 중요시했고, 가장 경계했다. 지금 제국이 그랬다. 역모로 인해 일어난 어수선함이 아직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후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나라를 바꿔 세웠지만, 그렇게 건국한다고 해도 정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고장 난 마차 바퀴를 갈아 끼워도 처음에는 삐걱거리면서 돌게 마련이었다. 적당히 굴려서 길 좀 들이지 않으면 아귀가 잘 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국이 그랬다.
고장 난 바퀴를 빼내고, 새 바퀴를 교체한 직후였다.
아직 뻑뻑하고, 제대로 아귀가 맞지 않아 굴리는 데 몇 배의 힘이 드는 그런 상황이었다.
‘후도 이걸 알아. 그래서 제국을 길들이기 위해 직접 전장에 나선 거야.’
그래야 제국의 백성과 병사들이 황제 ‘후’에 익숙해진다. 재는 솔직히 좀 감탄했다.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정말 대단한 인간인 건 맞았다. 아마 이곳 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도 지금 재가 파악하지 못한 이유가 더 있을 거다.
‘그런 능력을 계속 제국을 위해 썼으면…….’
이전의 태평성대는 더더욱 오랫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후가 안에서 지키고, 자신이 밖을 지키면 적어도 최소 수십 년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주 예전이었다. 재가 중심이 된 백적파가 황제에게 직접 궁의 임무를 받는 정식 부대로 인가받기 전, 낭인 시장에서 의뢰받아 활동할 때 재는 후와 한 번 연계를 맞춰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 날을 세우기 전이었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둘 간의 호흡은 아주 좋았다.
당시 목적은 동부의 비옥한 토지를 지배하는 토호세력의 조사였다. 그리고 조사 결과가 안 좋으면 직접 토벌까지 가는 작전이었다. 당시 재와 후는 아주 뛰어난 연계로 독립을 꿈꾸던 동부의 토호세력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수만의 자치 병력을 가진 토호는, 고작 수백의 백적파에게 섬멸당했다. 후의 계략과 재의 무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 작전은 후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매우, 참으로 유감이었다.
스르릉.
그리고 그런 마음이 짧게 드는 걸 끝으로, 재는 생각을 정리했다. 후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됐다. 용포를 입은 미친 모습까지 보았으니, 더더욱 됐다.
‘죽여야 할 자.’
아니.
‘반드시 죽여야 할 자.’
재는 본래는 족쇄를 푸는 욕망으로 인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가짐이 조금 변했다. 그런데 변하긴 했지만, 더욱 근원적인 목적으로 변했다.
재가 칼을 뽑자, 공기가 변했다.
호위군이 두꺼운 방패를 앞세우며 후의 앞을 막았고, 그런 후의 앞으로 제국제일검 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제일검이 후미에 있어 줬으면 했던 마음도 있었는데, 역시나 후의 지척에 있었다.
흐흐…….
전장을 타고 흐르는 낮은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는 이족의 전사들이 전투에 들어가기 직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족의 전사들은 통제 따위는 불가능하다. 이들의 전투 방식은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성향에 맞춰 최적화시켜 진화한 형태이기 때문에 따로 교정하거나, 아니면 하나로 뭉쳐서 단합된 능력을 보여주는 건 오히려 전사들의 능력을 깎아 먹는 짓이었다.
그래서 재는 그냥 이들의 통제를 풀었다.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에 돌입하면 야생동물이다. 경험과 본능, 감각에 의지해 전투를 치르는 짐승 말이다.
그런 짐승을 통제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러니 딱 하나, 목표만 설정해 주면 된다.
“적장 후의 목이 목표다. 저 새끼 목만 따면, 알아서들 부대로 복귀해. 딱 그것만 생각하고 우린 싸운다.”
지극히 간단한 목표고, 그 말을 들은 후가 싸늘한 미소를 처음으로 빼 들었다.
“호위군은 들어라. 여기서 제국의 역적 재를 죽이고, 나아가 연을 죽여 이 전쟁을 끝낼 것이다. 이번 출정의 목적 중 하나가 스스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니 나의 자랑스러운 호위군아. 적장의 목을 가지고 오너라.”
후의 차가운 말에, 호위군의 기세가 흉흉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그런 호위군을 노려보는 이족의 전사들의 눈빛엔, 광기가 차기 시작했다.
모두가 안다.
호위군의 뒤에 있는, 제국제일검이 지키고 있는 후를 처치하면 이 전쟁이 끝난다는 사실을. 반대로 호위군도 알고 있었다. 재를 잡으면, 연을 잡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이 전투의 승자가, 이번 전쟁의 승자가 된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서로가 마주 선 곳은 백척간두를 뒤에 둔 배수진이었다. 흉흉한 살기가 풀풀 나며 서로 노려보며 전의를 예열하던 어느 순간.
퉁!
쉬이이익!
촉이 바람을 가르며 뱀의 울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화살을 진이 가볍게 검집째 휘둘러 막아냈고, 이는 시발점이 됐다.
“으하하하! 죽어라!”
육중한 덩치의 타오가 내달리자, 마치 멧돼지가 달리는 것처럼 땅이 진동하는 느낌이 났다. 타오는 힘이 장사다. 그래서 그가 쓰는 도끼는 막는 것보단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호위군은 피하지 않았다.
쩡!
두꺼운 방패와 뭉뚝한 도끼날이 부딪치며 마치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게 교전의 시작이었다. 이족 전사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틈에 섞여 재도 함께 몸을 날렸다.
호위군은 방패로 막고, 검으로 찌르는 전형적인 보병이었다.
혼자서는 약하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뚫는 게 정말 쉽지 않은 밀집 전법을 구사했다. 이런 방패병은 기병에게는 약해도, 같은 보병이나 궁병에게는 아주 강력했다. 그러나 이족 전사들도 이런 전투에는 이제는 이골이 났다.
상성 상 밀려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밀리지 않았다.
치고, 빠지고.
치고빠지고를 반복했다. 절대 무리해서 치지 않았다. 방패의 밀짚에 갇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호위군을 뒤로 몰았다. 재는 그 틈에서, 틈을 노렸다. 모든 진형은 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호위군만 해도 기병에게는 상성 상 확실히 밀렸다.
그러니 그것도 틈이라면 틈이었다.
재가 노리는 건, 기병 상성 정도의 틈까지는 아니었다. 아주 작은 틈. 실낱같은 틈 하나면 됐다. 그럼 그걸 파고들어서, 강제로 찢어발기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눈을 빛내고 있는데, 호위군의 밀집 틈에서 불쑥 창날이 튀어나왔다.
시린 빛을 토해내는 창날은 정확히 재의 명치를 노렸다.
이게 호위군의 무서운 점이었다. 방패의 틈 사이로 훅 들어오는 창. 방패에 검을 들어서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 익숙해짐을 노리고 검의 간격의 두 배나 되는 창을 불쑥 내지른다.
‘처음에도 이 공격에 제대로 당했지.’
딱 한 번 호위군과 맞붙어봤을 때, 이 공격을 모르는 백적파는 처음에 정말 신나게 호위군을 두들겼다. 그렇게 일각쯤 지나 방패와 검에 익숙해졌을 때, 불쑥 방패 틈 사이로 창날이 튀어나왔다. 이때 백적파의 삼분지 일이 제대로 명치와 얼굴 등에 솜뭉치를 단 창의 일격을 허용했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한번 무너진 진형을 백적파는 쉽게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재만 남기고 전부 탈락하고 말았다.
그걸 이미 한 번 겪어본 재였다.
“두 번 당하겠냐고…….”
턱!
창대를 잡고 쭉 잡아당기자 역시, 버티는 대신 그냥 창을 놓는 걸 택했다. 괜히 안 뺏기려고 발버둥 치다가 진형이 무너지느니, 아예 버리는 걸 택한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빌어먹을 현명한 공격에 이족의 전사 열이 허물어졌다. 불쑥 튀어나온 창을 미처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피해가 누적되면 결국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틈, 틈을 찾아야…….’
쉬이익!
퍼억!
선고가 쓰는 화살이 재의 머리 위를 통과해, 그대로 빈틈에 꽂혔다. 그리고 윽! 하는 비명이 들렸다. 아주 작은 틈이었다. 겨우 성인 사내 주먹만 한 크기였다. 그런데 거길 정확히 노리는 선고의 사격술은 가히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퍼억!
퍼억! 퍼억!
이어지는 사격에 전열의 호위군들이 놀라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심전심이라, 재는 선고가 자신이 틈을 찾는 걸 알고, 틈을 만들어주는 사격이란 걸 깨달았다. 몇 번의 저격이 더 이어지고, 재가 노리던 틈이 결국 만들어졌다.
순간 주춤거리면서 물러나며 열린 하나의 틈.
재는 눈을 빛내며 그 틈으로 파고들어, 강력한 검격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