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59화
259화. 나의 무사님S2(6)
꾸벅.
재는 고개를 숙였다.
스쳐 가며 후가 한 말은 끝까지 뱉어지지 않은 미완성의 문장이었지만, 재는 그 의미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래서 고개를 세워, 후를 향해 물었다.
“이번 북방행. 승상의 작품이었습니까?”
“작품이라니요. 저는 그저 폐하께 북방 유목민의 행패에 대해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걸 아뢰는 게, 제 소관이니까요. 하고 가볍게 웃는 후.
재 또한 그 미소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상은 황제를 보필하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관직이자, 인간을 말함이다. 그 자리에 앉은 인간은 마땅히 제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데, 이번 북방행은 충분히 승상이 신경 써야 할 일이 맞기는 맞았다.
유목민의 준동이 심상치 않았다.
혹독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북방은 언제나 식량이 부족했다. 특히 산맥이 많고, 날이 추워 농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만큼, 약탈이 빈번한 곳이었다. 북방 유목민의 궁기병은 무서웠다.
말을 타고 전력을 질주하며 활을 쏘는데도, 과녁에 틀어박힌다. 한곳에 전부 박아 넣지는 못하지만, 과녁 자체에 박힌다는 게 중요했다. 과녁에 박히긴 박힌다는 것 자체가 그 과녁을 인간으로 바꾸면 몸에다가 어떻게든 꽂아 넣는다는 뜻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의 궁술이다.
쏘고 빠지고. 활을 쏘기 위해 멈춰야 할 필요가 없으니 치고 빠지는 데 엄청나게 특화되어 있었다.
우르르 몰려와 선회하며 화살을 십수 번을 쏘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런 궁기병이 약탈에 나서면?
일반적인 보병으로는 절대 상대 불가능했다. 애초에 보병이라 방패를 들었을 테니 쉽게 당하진 않아도, 궁기병을 잡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투입되는 게 중기병인데, 화살이 박히지 않는 중갑을 입고 가벼운 경갑을 입은 궁기병을 쫓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궁기병 주축의 이족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식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승상이 황제에게 아뢰며, 제대로 된 조사와 만약 준동이 확실시되면 처리까지 맡아 백적파가 투입됐다.
결과적으로 후의 정보력은 맞았다.
그래서 군을 일으키려던 중심 무리를 토벌했고, 돌아왔다. 어마어마하게 힘들었지만 끝내 승리하고 돌아온 재였다.
돌아온 재를 후는 신기하게 봤고, 재는 그런 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봐도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오롯이 제국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꺼려지는 인물이었다.
속내를 모르는 건 당연했고, 이제는 적인지 아군인지도 헷갈렸다.
특히 예전에 나눴던 대화 이후 그런 느낌은 더욱 올라갔다.
툭툭.
어깨를 두들긴 승상이 멀어졌다. 그 행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던 재는 표정을 굳히곤 다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그렇게 몇 걸음 뗐을 때.
“참, 백적 단주.”
“……예, 승상.”
“이번 북방행으로 백적파의 무용을 견식 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궁에 참 많아졌습니다.”
“예?”
“어떻습니까. 훌륭한 그 무예를 전파하는 건?”
재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백적파는 철저한 실전부대다. 그래서 ‘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걸 후가 모를 리가 없었다. 후가 백적파를 보고 났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마치 백정 같군요.
였었으니까.
그도 그럴 게 백적파 자체가 전문적으로 무예를 전수받거나 훈련한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전부 뒷골목부터 시작해 밑바닥에서 실전을 거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신상의 무력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린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형이 없고, 격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백적파가 수도에서 역도를 제압할 때 함께 했던 후가 한 말이 딱, ‘백정’이란 단어였다. 귀가 일반인 이상으로 좋은 단원이 들었던 얘기였고, 재는 당연히 그걸 믿었다.
그래, 후의 머릿속에 백적파는 백정 집단이었다.
그런데 뭐?
‘훌륭한 무예?’
그리고 그걸 견식?
개소리였다.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었다. 그런데 후는 마치 그랬던 자신의 말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까먹었나? 그럴 리가. 기억력이 비범 이상으로 좋아 3년하고 100일 전 자신이 읽고, 검토한 뒤 올렸던 상소문도 기억한다는 후가 ‘첫인상’을 까먹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데…….’
그런 꿍꿍이에 백적파를 노출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거절하려는 찰나.
우르르.
대신들이 갑자기 한쪽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후가 그 틈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백적 단주.”
“……예, 날을 잡아보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후 때문에 모두의 이목이 순간적으로 쏠린 상태라, 재는 그걸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해서는 안 됐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재가 거절하면 후의 부탁을 재가 거절했다는 얘기가 궐 안에 돌 것이고, 이는 결코 이쪽에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요즘 들어 백적 단주 재의 무예와 수완. 그리고 그 위용이 급상승했다고는 하나. 후에 비하면 아직은 보름달 앞에 반딧불이다.
당금 천하가 누리는 태평성대의 구할 이상의 후의 손에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 비교 자체가 민폐였다. 그런 후의 부탁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날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후와 헤어지고 나서도 재는 그런 날이 그냥 오지 않았으면 했다. 잊고 넘어갔으면 했다.
그러나 바람과는 반대로 그날은 생각보다 빠르게 잡혔고.
“재, 우리더러 지금 광대가 되라는 거지?”
재는 처음으로 친우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게 패착이었다. 승상 후의 친위대가 나왔는데, 이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의 중심에는…….
“아니 왜 제국제일검이 저기 있냐고…….”
“은거한 거 아니었어?”
“지금 할아버지잖아? 나이가 칠십이 넘을 텐데!”
“잠깐, 정말 제국제일검 맞아?”
“저 검 보면 모르냐! 사일검이잖아!”
“오직, 제국제일검만이 들 수 있는 검…….”
백적파는 철저하게 깨졌다.
모든 단원이 이미 검과 칼, 활과 창을 놓쳤다. 그리고 서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재뿐이었다. 하지만 재도 아직 제국제일검의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백적파와 같은 수로 나온 승상의 친위대에게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였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친위대 틈으로 보는 후를 노려보는 재. 백우선으로 살랑살랑 바람을 쓸어 내는 후의 모습에, 재는 처음으로 궐 안에서 진한 살의를 느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제국제일검이다.
당대의 제국제일검은 사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그 누구도 모른다.
말만 무성할 뿐, 실제로 누구인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걸 알아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바로 사일검이다. 사일검만의 독특한 문양은 오직 그 검에만 허락된 문양이다. 이걸 도용한다는 건 제국에 대한 도전이요, 제일검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것이며, 그 둘 이전에 제일검을 존중하는 검객들에게 척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 제일검이, 존중의 대상이자, 모든 검객과 칼잡이들의 꿈인 제국제일검이 승상의 사람이 됐다.
말도,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대역이거나, 거짓일 가능성도 없었다. 사일검을 수백 명이 알아본 오늘 이후 이 얘기가 이제 제국 전역에 돌 텐데, 후가 제국제일검을 거뒀다. 혹은 따르게 했다는 얘기가 돌 텐데, 이걸 거짓으로 한다? 당대의 제국제일검이 진짜 있고, 그가 찾아오면 정말 낭패를 보게 될 텐데?
‘그러니 거짓일 리는 없어. 그리고 저자는 진짜…….’
강하다.
힐끔.
친위대 너머, 후의 시선을 교묘하게 차단 중인 제국제일검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가히 태산과도 같았다. 경지에 이른 무인의 기세는 안으로 갈무리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 성향의 차이다.
갈무리된 기도가 더 고수의 증거다! 라고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저 그 무인의 성향에 따라 갈무리되어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폭발적인 느낌으로 전신을 감싸거나, 선택의 차이일 뿐이었다.
흡!
친위대 하나가 재가 한눈을 판 것 같자, 즉시 달려들었다.
퍽! 빠악!
“윽! 커억!”
그리고 칼등에 손목, 무릎으로 옆구리가 찍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들어왔지만, 이미 달려들 때 울리기 시작한 소리로 재는 완벽히 기습을 파악했다.
“시작됐네.”
“큭큭, 이긴 줄 알았지? 흐흐!”
“내가 저 새끼 이런 모습에 반해 이 빡센 부대에 들어왔지. 하하!”
“취향하고는. 처맞는 게 좋든?”
“넌 좋아하잖아?”
“응, 난 좋아. 특히 재의 검은…… 특히.”
“……미친놈.”
뒤에서 백적파의 단원들이 떠드는 헛소리가 들렸다.
재는 사실, 단주는 그다지 성미가 맞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서 움직이는 게 재는 더 편했다. 누구도 지킬 필요 없고, 누구도 살릴 필요가 없는, 그런 상황은 특히 더…….
‘좋아하지.’
반짝.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빛.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하자 피운 불빛이, 재의 눈빛을 저 높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해줬다. 물론 빛이 난다고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꾸로, 한없이 서늘한 느낌만 줄 뿐이었다. 그리고 한 친위대가 그 눈빛에 잠시 넋을 놓은 순간.
빠악!
벼락같은 일격이 그 친위대의 대가리를 깼다.
재가 평소에 훈련할 때 쓰는 철심 심은 목도였으니 이 정도지, 진짜 칼이었음 머리가 최소 절반으로 갈렸을 일격이었다.
그런 일격에 꺽!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친위대. 넘어가는 친위대를 넘어, 재의 신형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런 재의 포위망을 형성했던 일단의 친위대가 같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속도가 붙는 순간 급속 정지하는 재.
인간의 몸은 한순간에 멈출 수 없다.
특히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면 더더욱.
멈춘 재 때문에 덩달아 속도를 줄이며 삐걱하는 친위대의 틈으로, 재가 성난 이리가 되어 뛰어들었다.
까앙!
빡! 빠각!
형과 법, 격은 쓰는 법이다.
잘 쓰는 법을 구체화하여, 내리 전수하는 걸 말했다. 하지만 재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짐승처럼 살던 시절, 양부에게 거둬지기 전까지 스스로 눈대중으로 익혔던 것들을 조합하고, 갈고 닦아서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체득했기에 일정한 형태가 없었다.
그랬기에, 위력적이다 못해 치명적이었다.
턱! 턱!
두 번 막힌 칼.
재의 일격에 당황한 친위대가 한 걸음 물러나는 보폭에 맞춰 스윽, 귀신처럼 다가간 재가 주먹을 턱에 꽂아 넣었다.
빠악!
누런 이가 후두둑! 피 섞인 침과 함께 튀어 올랐다.
자신은 물론, 자신의 친우들을 광대로 만든 것에 대한 분노와 뒤통수를 친 것처럼 제대로 백적파를 상대하기 위해 합을 짜와서 이렇게 수백의 대신 앞에서 등신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분노도, 함께 피어올랐다.
“이익!”
“…….”
친위대는 역시, 한방에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목도를 역으로 쥐어 도장 찍듯이 쇄골을 내려쳤다. 우직! 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악! 하는 비명이 뒤따랐지만, 그게 그의 끝이었다. 회전해 뒤로 빠지면서 재가 팔꿈치로 턱을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음, 한 서너 번? 그 정도 깜빡이는 동안 둘이 쓰러졌다.
다시 허허, 그랬습니까? 아드님이 참 고생했겠습니다. 하하! 이 정도의 대화를 나눌 시간에 하나가 더 쓰러졌다.
턱과 복부에 한방씩 막고 숙인 순간, 무릎에 휘어 감겨 들어온 발차기에 으적!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피가 튀었다.
진검과 진짜 칼이 아니지만, 경지에 오른 재의 일격은 사실 그냥 주먹을 이용한 박투로도 몇 방이면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꽈득!
다섯? 여섯쯤 무력화했을 때였다.
“놈! 도망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히 붙자!”
동료가 여섯이나 박살 나자, 분기탱천한 친위대 하나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정정당당. 재밌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말을 지껄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온실 속에서 검을 휘둘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전쟁에서, 정정당당이라니.
기가 찬 일이다.
“그렇지 않아? 죽고 죽이는 게 전부인데 말이야.”
안 그래?
재는 옛날 생각에 피식 웃으며 분기 가득한 남부의 실질적 지배자인 제안 성주의 목을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갈랐다. 하지만 죽이진 않았다. 살이 갈라져 피가 나오지만, 아직 치명상은 아니었다.
뿜어지는 피, 경악하며 물러나는 적을 보면서 재는, 보급대를 겨우 정리하고 돌아왔는데 채 이 주야가 지나지 않아 다시 적진으로 보낸 공주를 생각하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성주의 친위대에게 포위된 지금, 재는 이번엔 힘들겠단 생각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