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49화
249화. 방송(18)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의 사과.
지영은 여인이 트리지아 파벨로란 이름을 가진, 라피앙 파벨로의 아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라피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봤는데 당연히 그중에는 가족에 대한 것도 있었다.
트리지아 파벨로.
결혼하며 라피앙 파벨로의 성을 이어받은 트리지아는, 학교 교사였다. 벌이가 라피앙보다 좋았던 것도, 그녀의 안정적인 직장에서 나오는 거였다. 그럼 그런 그녀는 왜 지영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을까?
당연히 처음 보는 지영일 텐데, 마치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왜 고개를 숙였을까? 그 이유는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보통 인간이 인간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잘못했기 때문이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거나.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진심을 담은 사과의 행동이 나올 수는 없었다. 지영은 반사적으로, 확 이해했다. 왜 라피앙 파벨로의 아내 트리지아 파벨로가 지영을 보자마자 이렇게 사과하는지. 거의 반사적으로 이해해버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에서, 왜 자신이 허리를 숙였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 남편이 당신을 너무나 모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용했어요.”
“…….”
영어.
억양이 좀 다르긴 하지만 지영이 이해하기 무리가 없는 수준으로 나온 말에, 지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내는 역시 알고 있었다. 가족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애초에 그 정도 확신이 없었다면 프랑스행을 택하지도 않았을 거다.
라피앙이란 한, 미친 예술가의 마지막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그래도 왜 자신이 그런 꼴을 당했는지에 관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지영이 대답하지 않자,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트리지아 파벨로가 말을 이어갔다.
“남편은 많이 아팠어요. 유전병이 있었고…… 거기에 암까지 걸려 있었어요.”
유전병에 암.
지영은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했고,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특히 기자들은 작은 목소리로 현장 상황을 데스크로 전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한국어도 끼어 있었다.
“그렇게 아프던 남편은 어느 순간 갑자기 병원에서 저도 모르게 퇴원하더니, 저와 딸에게서 자취를 감췄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다시 나타난 남편은 강지영의 목에 칼을 겨눈 테러리스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
지영은 역시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았다.
라피앙 파벨로는 전형적인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의 SNS를 봤을 때, 그가 진짜 광기에 빠진 미친 예술가까지는 아니었다.
예술가지만, 적어도 예인으로 살어리랏다의 도언 정도는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돌변했다.
갑자기 테러리스트가 됐고, 지영을 노렸다. 왜 그렇게 됐을까? 프랑스로 오는 내내 지영이 고민했던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왜, 왜 그는 갑자기 돌변해서 이런 짓을 저질렀고.
왜 자신이 말한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죽음을 택했을까?
‘자살도 타살도 아니야.’
그는 자연사였다.
더 정확히는 아마, 병사쯤 아니었을까?
아니, 그것도 확실치 않다. 병사가 아니고 일부로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경찰이 알 거고, 부검이 알려줄 것이다.
아니면, 이 눈앞에 파벨로 부인이 알려주던가.
그래서 지영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의 줄기가 조금 강해진 느낌이 들었을 때, 파벨로 부인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남편이 그렇게 한 이유를 저는 압니다. 남편은 유전병에 걸렸고, 암에도 걸렸지요. 살날이 많지…… 않았어요. 병원에서는 그에게 한 달을 선고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고, 주변을 정리하라고도 했죠.”
역시…….
살날이 많지 않다는 말에 지영은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에 대한 연민, 동정? 아니, 그런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그냥 좀 화가 났다. 그는 죽음을 이용했다. 어차피 죽게 될 목숨을 가지고, 지영의 입장에서는, 아니, 남이 보기에도 테러라고 보일 행동을 저질렀다.
숙였던 그녀가 허리를 폈다.
창백한 외모였다.
청순가련한 프랑스 미인.
라피앙 파벨로처럼 날카로운 콧대가 인상적인 파벨로 부인은, 좀 더 지영이 알고 싶던 진실을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이, 레나가 아프기 시작했지요.”
“…….”
“네, 유전병이었어요. 남편이 가진 천형이, 딸에게도 옮겨간 거였어요. 남편은 하늘을 저주했어요. 몇 날 며칠을 틀어박혀, 그 저주를 컨버스에 옮겨 넣었어요. 그러면서 병증은 더욱 빠르게 남편을 악화시켰고, 얼마 살지 못할 거란 진단을 얻은 뒤, 그는 사라졌어요.”
왜?
에 대한 얘기다.
이 얘기는.
모두가 집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방송 장비가 마치 뱀처럼 주변으로 퍼졌고, 파벨로 부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남편의 유전병은 심하게 악화하지 않으면 증상을 어느 정도 완화 시킬 수 있었어요. 다만…… 그걸 위해서 먹어야 하는 약과 받아야 하는 기계 치료비는 굉장히 비싸요. 네, 보험이 안 되거든요.”
“…….”
“돈이 필요해졌어요. 남편은 처음으로 예술이 아닌, 상업을 추구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상업을 추구한다고 해서, 갑자기 이름을 얻는 게 아니잖아요? 없던 명성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남편은 잡히지 않던 허상을 추구한 지난날을 후회했어요. 그리고 그래서…… 당신에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요.”
“……하아.”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전병. 암.
딸에게도 시작된 유전병.
라피앙 파벨로의 죽음을 앞에 두고 돈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런 미친 짓을 벌였다. 이제야 왜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는 어차피 죽을 자신의 목숨을, 딸의 치료를 위해 버린 거였다.
이 일로 라피앙 파벨로는 명성을 얻었다.
그게 악명이든, 일반적인 명성이든 상관없이 그냥 근 며칠간 라피앙 파벨로의 이름은 전 세계를 확실하게 강타했다. 예술가에게 명성의 상승이란, 그간 자신이 만든 작품의 가치 상승과 똑같았다.
비록 좋지 않은 방식으로 유명해졌지만, 명성은 확실하게 올랐으니 그의 작품 또한 값어치가 확실하게 올랐다.
이미 그가 아주 예전에 그렸던 작품 하나가 온라인에 올라왔고, 7백만 원에 달하는 거금에 판매됐다.
진짜 억 소리 나는 고미술품에 비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몇십도 못 하던 작품이 7백에 팔려 나갔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과연 하나일까? 적어도 몇십 점은 있을 거다. 그가 여태껏 만들었던 작품을 모조리 폐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창고에 처박혀 있던 작품은, 이제 가치로 환산할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그가 노렸던 것들은 이미 이룩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뿌득.
그래서 화가 났다.
그는 딸을 위해서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자기 아내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딸의 치료비를 조금이라도 마련하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이와 같은 테러를 저질렀고, 그 테러에 휘말린 지영은 결국 과도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기까지 했었다.
솔직히 지금 컨디션도 매우 좋지 않았다.
의사들이 만류한 이유는 지영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확실히 그게 맞았다. 오랜 비행 때문에 컨디션은 나락으로 처박힌 것처럼 떨어졌다. 그 결과 몸이 정말 무거웠다. 안시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시작된 열병 같은 몸살이 아직도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치 한겨울에 밖에서 푹 땀을 흘릴 정도로 운동하고, 그 추운 밖에서 온기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아치는 바람에 덜덜 떨다가 몸살에 걸린 것처럼, 정말 무거웠다.
한계.
지영의 체력과 컨디션은 정말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회귀 전 사고 때문에 몸 관리가 철저한 지영이 이런 몸 상태로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것도 바로 라피앙이다.
그러니 아무리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오히려 분노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파랗게 빛나는 살기처럼, 지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확실하게 좌중을 압도했다.
파벨로 부인은 그러나 그런 지영의 눈빛을 똑바로 직시했다.
“정말 너무…… 더없이 큰 죄를 당신에게 저질렀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파벨로 부인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꼿꼿하게 세운 채로 무릎. 그리고 숙인 고개.
이게 맞는 그림이야?
하고 묻는 것처럼 빗줄기가 조금씩 강해졌다. 강해진 빗줄기는 분위기 자체를, 완전히 꺾어서 바닥에 처박았다.
지영은 화가 났다.
사과받았지만, 파벨로 부인의 양심 고백으로 진실을 거의 다 알게 됐지만, 그래도 그냥 화가 났다.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이야 알겠다.
유전병. 암까지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하필이면 저주스러운 유전병이 딸에게도 발병했다.
그 병마와 싸우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상당했고, 상업보단, 돈보단 예술을 추구했던 그 자신에겐 돈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당시 대유행의 중심에 있던 지영을 이용하는…… 짓이었다.
제대로 당했다.
지영은 라피앙이 왜 먼저 죽었는지도 깨달았다. 결국에는 명분이었다. 지영이 먼저 작품을 고르면 안 되니까, 그보다 먼저 자신의 숨이 끊어져야 했었던 거다. 그래야 결국엔 죽음으로써, 또 다른 사고가 만들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영은 그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게다가 그는 애초에 산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냥 살아나서는 오히려 정말 말 그대로 테러리스트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산다’라는 선택지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끝이, 결과가 정해져 있단 뜻이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결과도 마찬가지로…… 정해져 있던 거야.’
쓴웃음이 절로 흘렀다.
후우, 하아…….
폐부에서 밀려 나온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쉰 지영은,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들을 건 이제 다 들었다. 궁금한 건 이제 없었다. 지영은 꽃 한 송이를 챙겼다. 그리고 빗방울에 몸을 맞고 있는 라피앙 파벨로의 관을 잠시 보다가, 꽃을 던지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손가락을 떼고, 툭 던지기만 하면 되는데 지영은 꽃을 던지기가 싫었다.
지영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지영은 자기 자신은 신사가 될 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신사는커녕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후원?
그것도 그냥 개인, 자기만족이었다.
이전의 삶이 한 번 있었기에, 그 삶에서 받았던 상처를 내가 치유 받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거창한 이유도, 사명도 없었다.
연예계에서의 행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제작발표회 따위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 어떤 배우가 이런 미친 짓을 하겠나? 아무리 막 나가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지영은 그 정도를 자기 고집으로 무시했다.
CF도 그렇고, 어쨌든 지영은 스스로가 이기적인 인간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확실하네.’
그런 이기심이, 이 순간 라피앙에게 해주는 추모가 ‘싫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꽃을 던지면 그를 추모하는 게 되는 건데, 손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영은 그냥 팔을 내렸다.
“라피앙은 당신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끝끝내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
파벨로 부인의 말에 지영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라피앙은 아마 자신을 제법 철저히 연구한 것 같았다. 자신의 성향을 먼저 파악했고, 어떤 선택을 내릴지 유추했다.
24시간 타임 리미트를 두고, 라피앙은 결국 본인이 원했던 것을 전부 이뤘다.
이게 만약에 게임 같은 거였다면, 승자는 99.99%의 확률로 라피앙이었다.
그리고 이 게임은, 애초에 지영이 이길 수 없게 설계된 게임이기도 했다.
지영은 끝끝내 꽃을 던지지 않고, 돌아섰다.
파벨로 부인.
그리고 그런 부인의 손을, 언제 왔는지 꼭 잡고 옆에 서 있는 어린 여자아이. 슬픈 눈빛이었다. 지영을 보는 눈빛에 원망은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에, 실의에 가득 빠져 있어서 툭 건드리면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유전병에 걸렸다던 딸이다.
지영은 그런 파벨로의 딸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당신이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당신은 예술이 아닌, 다른 일을 했었어야 해.
지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다시 걸음을 뗐다.
씁쓸한 진실이었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