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3화
213화. 가노컵(7)
전원 준결승 진출.
남자 셋, 여자 넷 전부 준결승에 진출했다. 생각지도 못한,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서 그런지 선수들은 오늘 아주 독하게 경기를 했다. 신기하게도 전원 아직 일본과 맞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전에 졌었던 선수들을 전부 잡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악으로! 깡으로!
쌍팔년도를 넘어 2000년대 초반까지. 아니, 2010년대에도 먹혔던 저 구호처럼 경기해서 악착같이 상대를 잡고 올라왔다. 그 결과가 전원 준결승 진출이었다. 물론 아직 입상이 결정된 건 아니었다.
여기서 한 판만 더 이기면 은메달은 확정이고, 지면 패자결승으로 내려가니 아직 기회는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난 좋지. 그보다 이제 슬슬 가서 컨디션 관리하지?”
황석의 말에 지영은 이번엔 정말 강하게 의견을 내보였다. 이전 같았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다 같이 컨디션을 망치면서 감량을 했기 때문에 이제 슬슬 가서 쉬는 게 나았다. 그런 지영의 기색을 읽은 황석도 이번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진에게 붙어 있던 강한결과 임효중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말하려던 강한결은, 그냥 지영의 어깨만 두들겨 주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그렇게 친구들이 떠나자 지영은 편하게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이미 제대로 먹기도 했고, 패자전이 진행되면서 시간이 좀 남았다. 7체급의 패자전이니 이건 절대 금방 끝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영의 체급은 가장 뒤쪽이라, 못해도 1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지금 최대한 쉬어둘 생각이었다. 이어폰을 꽂은 뒤 수면안대를 차고, 짧게 잠을 청하는 지영. 잠을 잘 자는 체질이라 다행히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흠칫! 너무 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벌떡 잠에서 깬 지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30분 지나 있었다.
“깼어?”
이어폰을 뽑고 수면안대를 내리자 김재성이 스태프들과 노트북을 보다 말고 말했고,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스트레칭을 시작하며 물었다.
“뭐 보세요?”
“야, 한국 난리 났다. 오늘 경기 중계 중에 갑자기 배영우 캐스터가 박충도 협회장님 저격해 버렸다.”
“네?”
이건 또 뭔 소리?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말 그대로야. 아까 중계 시작했는데 갑자기 긴급정보라고 하면서 배영우 캐스터가 협회장님 저격했어. 원래 일본 출신인데 귀화했고, 아직도 일본 지원받아 협회장에 오른 것까지 전부.”
“……정말요?”
“그래. 와, 장난 아니던데? 돈은 어떻게 받았는지, 이번 대회 대가로 도쿄에 건물 받은 것까지 전부 깠다. 그리고 그 정보는 전부 검찰에게 넘기겠다면서. 와, 난 이런 거 처음 본다?”
“……어디서 깠어요?”
“MBS지. 배영우 해설이 중간에 깠으니까.”
MBS.
MBS라.
지영은 촉이 왔다.
“제 차례는 아직 남았죠?”
“여유 있어. 아직 여자부니까. 그러니까 안 깨웠지.”
“넵. 그럼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그래. 기자 조심하고.”
“네.”
지영은 패딩과 장갑을 끼고는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우와!
나오자마자 경기장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지영이 시합할 때는 정말 죽은 것처럼 고요하던 경기장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환호성 소리가 잘도 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영의 경기력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회귀 이후 단순히 매트 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게, 바로 강지영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이런 수작에도, 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 선수라서 흔들릴 거라고 기대했겠지만…….’
지영의 정신은 고작 19살이 아니라, 이제는 옛날이었으면 이립(而立)이라 불렀을 나이에 도달했다. 즉, 세상을 충분히 알고, 겪었고, 이겨내고 있는 나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이런 수작은 교통사고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가장 지분이 컸다.
화장실에 들렀던 지영은 주변을 살피고는 조용히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폰을 꺼내 이선영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르, 뚜루르, 몇 번 신호가 가다가, 이선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지영아! 근데 왜 이 시간에 전화? 너 시합 아냐? 졌어, 설마?
“쉬는 중이거든요. 준결승은 안 했고요. 오늘 속보 나간 거, 누나죠?”
-뭐, MBS에서 터진 거?
“네. 아무래도 누나 같은데?”
-응, 나지. 아니, 그냥 좀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이 양반이 일 처리를 너무 허술하게 해놨잖아. 마치 알아서 누가 꼬리를 팍 잘라 달라는 것처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이번 한정으로 써먹으려고 심었다는 소리지.
“……아니, 그렇게까지 해요?”
-일본이 스포츠 중에서 가장 진심인 게, 유도라며?
“…….”
그렇기는 하다.
축구, 야구 등에도 진심인 나라지만, 종주국의 지위를 가진 유도에는 더욱더 진심이었다. 그건 초중고, 유도 인프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절대 인기 종목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강제로 인기 종목이다. 축구나 야구만큼이나 인기를 강제로 만들어낸 게,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 일본이 유도로 라이벌이라 여기는 나라는 딱 하나, 바로 한국이었다.
-그래서 그냥 쉬웠어. 어차피 거기도 한 번 쓰고 버릴 마음이었나 보더라. 근데 일본 쪽은 철저하게 감췄어. 아마 찾아봐도 심증 이상은 찾지 못할 거야.
“……대단하네요, 진짜.”
-대단은 무슨. 그냥 삽질 한 번에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 건데. 별로 한 것도 없었다니까, 진짜?
별로 한 게 없기는.
지영이 아무리 저쪽 세계에는 무지하다고 해도, 이런 취재가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러니 충분히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우승하고 와. 와서 맛있는 거 사. 아, 술 어때? 너 이제 성인이잖아. 이틀 후면?
“아. 그러네요?”
-후후, 축하는 우승 축하랑 같이해 줄게.
“네.”
술은 마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엔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단 생각에 지영은 그냥 잠자코 대답했다.
-아, 부장이 또 부른다. 시합 잘하고! 파이팅!
“네, 누나. 고마워요.”
-응!
전화를 끊고 지영은 막 내리기 시작한 눈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좋게 잘 해결되긴 한 것 같지만, 그건 한국 쪽이고 이쪽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시합 중이고,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지영에게만 불리하게 이루어지던 판정이 어쩌면 성진이나 다른 선배들에게도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현저히 낮았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영은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보니 슬슬 몸을 풀어둘 시간이었다. 제대로 먹고 한숨 잤더니 컨디션은 완벽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90%까지는 올라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단 한국은 정리가 됐다니, 마음이 절반쯤 홀가분해졌다.
“어디 갔다 왔어?”
“화장실 갔다가 잠시 통화.”
스트레칭을 시작 중인 이성진의 말에 지영은 가볍게 대답하고, 같이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괴로운 시간이다.
심적으로 마음이 홀가분해진 건 홀가분해진 거고, 이건 또 이거다. 또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호흡을 터뜨리고 나니, 남자부가 막 시작됐다. 밖으로 나가니 -60의 패자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노컵.
패자전이지만 선수들의 얼굴에는 투지가 가득했다.
지영은 그런 선수들의 투지를 보며, 안타까움에 한숨이 나왔다.
‘저렇게 선수는 시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왜 그걸 대체, 협회가 나서서 깨거나 망가뜨리는 걸까?
선수는 대회 참가가 결정되면, 그게 큰 대회든 작은 대회든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 대진을 확인하고, 선수 스타일을 확인하고, 어떻게 해서 이길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 끝에 나온 답을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그러한 과정을 계속해서 거친다. 쉬지 않고, 정말 계속 말이다. 그러면서 체중감량도 한다.
대회 한번을 준비하면서 들이는 공은 그만큼 크다.
그런데 왜 선수도 아니면서, 선수의 대회를 망치려고 하는지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피해를 본 건 지영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언질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국 대회 준비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설마 한국만 빼고 전부 언질을 줬겠나?
아닐 거다.
말도 안 되는 스케줄 때문에 분명 피해를 본 선수가 있을 거다. 흔히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게, 선수를 죽이고 있는 거다. 그리고 괜히 휘말린 선수들도 있는데 그들에겐 정말로 미안했다.
‘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네…….’
언질을 받은 선수들을 제외하면, 다른 선수들은 지영처럼 급하게 체중을 빼고 나왔을 테니까. 그래서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 시합을 망친 선수도 분명 여럿 있을 것이다. 아니, 많을 거다. 당장 지영이 보고 있는 경기가 그랬다.
보통 -60이면, 체력 끝판왕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지금 시합하는 선수들은 체력이 완전 꽝이었다. 프란시스코처럼 술 담배 때문에 체력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컨디션이 망가졌기 때문에 체력이 박살이 나고 만 상황이라는 게 지영의 눈엔 보였다.
패자전이다.
그렇다면 이미 몇 번의 경기를 통해 호흡은 충분히 트여 있어야 맞다. 그런데 두 선수는 아니었다. 고작 경기 시작 2분인데, 체력이 다 털려서 헉헉거리고 있었다. 한 선수의 낯빛은 아예 하얗게 질려서,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들이 피해자였다.
술 담배를 하는 선수들이 아니라면, 지영의 예상대로 무리한 감량으로 컨디션이 박살 난 거라면, 저들은 전부 피해자였다. 그것도 너무나 선량한 피해자였다. 낯빛이 이미 질렸는데도 시합을 포기하지 않고,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선수를 보고 있자니 지영은 속이 다시 끓었다.
“야.”
그런 지영의 기색을 읽은 이성진의 부름에, 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눈빛에서, 야라는 부름에서 진정하라는 마음이 가득 느껴져서였다.
“쏘리.”
“뿔나도, 막 풀면 안 된다? 지금 시합 중!”
“응.”
이성진의 말처럼 지금은 시합 중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잘못 흥분하면, 시합 중에 이성을 잃어 카운터를 맞을 수도 있었다. 강지영이란 가진 선수가 가진 강점 중에는, 분명 평정심이라는 게 있기에 절대 거기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었다.
패자전이 끝났다.
결국 낯빛이 하얗게 떴던 선수는 졌다.
그리고 악수를 하고 나옴과 동시에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예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건 아니었지만 몸에 문제가 생긴 건 확실한 것 같았다. 패자전이 끝나고, 준결승이 이어졌다. 당연히 정수원도 들어갔다.
정수원의 상대는 이번에도 일본 선수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아시아 선수권에서 맞붙었던, 타카토 나오히사였다. 아직 이 선수는 정상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었고, 그래서 꽤 많은 일본 선수들이 바뀌어서 출전했는데 오직 혼자만 그대로 나왔다.
그리고 또 정수원과 붙었다.
이성진은 아시아 선수권 때 했던 질문을 또 했다.
“지영아. 수원이 형이 이길 수 있을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아시아 선수권 때는 선배님이란 호칭을 썼는데, 오늘은 형이란 호칭을 썼다는 거? 그거 하나만 달랐다. 지영은 이성진의 질문에 잠시 고심했다. 주변 코치와 스태프들도 지영의 대답을 기다리는지, 눈빛이 간절했다.
사실 대표팀에도 분석관이 있다.
그러나 재밌는 게, 분석관의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데도 대표팀에서 가장 분석 실력이 좋은 게 지영과 강한결이었다.
그리고 두 번의 대회를 거치며 이제 이러한 사실은 전부 다들 알고 있었다.
분석관도 지영이나 강한결에게 한 수 배운다며 말할 정도로 긍정적이었고, 그래서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확률이다.
정수원이 타카토 나오히사를 이길 확률. 그 승산이 지금은 가장 중요했다.
지영은 잠시 고민 끝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
“하아…….”
안다.
안타깝다는 거.
하지만…… 스포츠는 원래, 잔인하고 안타까운 법이었다. 지영은 두 선수의 실력을 냉정히 살펴본 뒤에, 딱 이렇게 결정 내렸었다.
천운이 따르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다.
실력도 나오히사가 조금 더 앞서지만…… 나오히사의 스타일 자체가, 정수원의 천적이었다.
지영의 이런 예측은 그리고…… 틀리지 않았다.
패배.
정수원은 2분 만에 업어치기 한판으로,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