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12화
212화. 가노컵(6)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감량하면서도, 감량 중에 쉬는 시간을 선배들 상대 분석해 주면서도, 지영은 자신의 상대를 분석하는 걸 까먹지 않았다.
마켈리 아서.
캐나다 선수다.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마켈리 아서의 경기 영상을 지영은 보는 순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합 스타일이 진짜 지저분하다 못해 더러운 스타일이었다. 이런 스타일에 면역이 제법 있는 지영이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여성 심판이 지영을 힐끔 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는 수신호를 보였다.
‘하아…….’
아주 잠깐 마주친 심판의 눈빛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걸 보면서 지영은 오늘 대회 자체가 정말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저런 눈빛을 한 심판치고, 지영에게 제대로 판정해 준 심판은 드물다 못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속내를 숨기고 시합장에 입성한 지영은, 잡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그래, 이런 대회 뭐 어디 한두 번 하냐? 점수를 안 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던지면 돼.’
중거리 슛으로 골대를 통과한 골을 보고 심판이 노골을 선언할 수는 없는 것처럼, 유도도 제대로 던지면 최소한 절반은 줘야 했다. 그걸 안 줄 수는 없었다. 안 주게 되면, 그건 아예 유도라는 종목 자체를 부정하는 거라서 완벽한 한판 기술을 던지면, 최소한 절반은 줘야 했다. 그렇게 하면 된다.
마켈리 아서가 지저분한 스타일의 선수고, 스타일이 까다롭다고 해서 그가 세계 최강은 아니었다.
그가 최강이었다면, 이미 최강의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랭킹은 손가락 안에 들어도, 최강은 아니었다. 메이저 대회 성적도 마찬가지였다. 마켈리 아서는 준수한 실력을 냈지만, 세계 선수권, 올림픽을 제패하진 못했다.
그게 딱 그의 실력을 말해줬다.
그래서 지영은 공격적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메!
심판의 시작 소리에 지영은 상체를 숙였다.
지영 특유의 낮고, 등을 보이는 자세를 보이자 마켈리 아서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지영의 등깃을 깊숙이 잡았다. 그리고 잡으면서 곧장 모두걸기. 퍽!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렇게 두들겨 맞는 거야 뭐 너무 익숙해서 지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슥, 그리고 모두걸기가 작렬했을 때, 지영의 손은 안으로 들어가 마켈리 아서의 등 깃을 그의 팔 아래쪽으로 잡았다. 그러자 곧장 틀어서 앞으로 돌아 나오며 지영의 목을 꽉 죽여 왔다.
그렇게 되면, 장담하는 데 무조건 지도가 들어올 확률이 있었다.
적지다.
이미 이시카와 사오리로 인해 지영은 일본 유도협회 완벽하게 적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애매한 방어는 무조건 지도를 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가능하면 지도패로 조지고 싶겠지…….’
옛날에, 한국에서 유도를 하던 추성훈 선수한테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영은 전략을 공격적으로 바꿨다. 마켈리 아서가 돌아나가는 순간, 지영의 몸이 마치 잠수함처럼 가라앉으며 빗당겨치기를 꽂았다. 상대가 돌아나가는 틈을 탄, 깔끔한 빗당겨치기.
퍽!
소리가 나며 허벅지 안쪽에 아서의 무릎 옆면이 걸렸다. 툭, 댄 게 아니라, 밀어치듯 넣은 빗당겨치기였다. 상대의 중심이 무너져 앞으로 쏠리는 순간, 지영은 반사적으로 가슴 깃을 잡아 그대로 기울이기를 끝까지 먹였다.
홰액!
시작과 동시에 뱅글! 제대로 꽂힌 빗당겨치기가 마켈리 아서의 중심을 무너트리다 못해 그대로 아래로 처박히게 만들었다.
쾅!
매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악! 평소와는 다르게 기합을 내지른 지영이 심판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그렇게 올려다보면서도 솔직히 지영은 한판을 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와자리! 절반 선언이 나왔다. 이미 상대는 그사이 제대로 엎드린 상태라 지영은 추가로 굳히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필승 로더인 절반을 먼저 따낸 지영은, 짧게 숨을 내쉰 다음 제자리로 돌아갔다.
절반.
평소라면 이 절반을 가지고 상대를 천천히 요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에게 불리한 판정이 내려질 게 빤해서 지키기로 가면 아마 1분 안에 반칙 두 개는 먹을 거고, 다시 20초면 반칙 하나 더 받고 게임은 펑! 그대로 터져 버릴 거다.
그러니 무조건 공세로…….
나가려고 했는데, 하지메를 했던 심판이 다시 맛테를 외쳤다. 그러곤 밖에 부심이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얘기를 잠시 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후 잠시 한숨을 내쉬곤 절반 사인을 바꿨다. 와자리, 취소. 잇폰! 마켈리 아서는 그런 심판의 사인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자신도 시작과 동시에 빗당겨치기에 꽂혀 날아갈 때, 그게 한판 기술이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한판인지 아닌지, 절반인지 아닌지, 점수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도 잘 알지만, 이 정도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은 수만 번을 넘게 넘어가면서 넘겨도 넘어가도, 점수인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아는 관록을 갖췄다.
지영만 해도 넘기면서 한판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마켈리 아서도 한판인 걸 알았을 거다. 하지만 절반을 줘서,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얼른 시합을 시작하려고 하지메 사인을 내기도 전에 다가오려고 했었다. 번복되지 않게 말이다.
그러나 번복됐다.
솔직히 도복을 고쳐 입으면서도 지영은 의외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뭐지? 알력이라도 생긴 건가?’
생각해 보니, 세계유도연맹 전체가 일본의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 대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은 많은 무리를 했을 거고, 그건 분명 그쪽 사람들도 불만스럽게 생각했을 확률이 높았다.
심판의 차가운 승자 선언 뒤에 지영은 인사, 악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생했다.”
“네. 근데 한판 안 줄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아무래도 심판 부회장이 화가 난 것 같던데? 아까 너 시합 전에도 저쪽 좀 시끄러워서 살짝 들어봤는데, 무리하게 대회 열었으면 더는 장난치지 말자고 하는 것 같더라고.”
“오, 진짜요?”
“응. 저기 보인다. 맥스웰 부회장.”
오, 풍채가 대단하다.
그리고 귀가, 전형적인 유도나 레슬러의 만두 귀였다. 그는 걸어오면서 지영을 힐끔 보더니 씩 웃고는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 모습에 좀 얼떨떨한 지영이었다. 솔직히 한국 협회도 자신을 싫어하는 판국이었다.
그런 판국에 생판 처음 보는 미국 유도 원로가 자신에게 호감을 주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씁쓸했다.
그리고 보니, 한판으로 승부를 냈는데 체육과는 조용했다.
완전한 침묵.
관중까지 이러는 걸 보니, 일본이 정말 작정하긴 한 것 같았다.
* * *
심판 부회장이 그렇게 간섭했어도, 지영에 대한 판정은 여전했다.
“아, 이건 아니죠. 이건 아닙니다. 이걸 절반을 주네요?”
3회전.
배영우는 일본협회의 거절로 현장 중계를 하지 못해 이원 중계를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황금세대의 대회는 특별하다. 일단 중계만 하면 시청률 10%를 찍는, 어마어마한 화력을 자랑하다 보니 이번에도 당연히 준비를 많이 해서 나왔다.
그런데 이원 중계다.
이것만 해도 짜증 나는데, 심판의 악의적인 판정은 해설을 보는 배영우의 이마에 김이 나게 할 정도였다.
“일본이 이번 대회에 정말 작정한 건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첫판의 절반은 번복이 되었는데, 2회전과 3회전 연달아 한판 기술이 계속 절반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 이거 참. 하하. 가슴이 아프네요.”
조인선 교수는 판정을 보면서도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얼굴로 화면을 바로보기만 했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한 것 같은 기색도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시합 다시 시작됩니다. 미국의 데이비드 선수! 빠르게 다가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업어치기! 아, 강지영 선수 타이밍을 귀신같이 빼앗아 도복을 끊어냅니다! 조인선 해설위원님. 이런 경우에는 반칙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네, 위장 공격이라고 해서, 저렇게 기술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도복을 놓치면 받게 되는 반칙입니다. 저런 경우에는 거의 90% 이상은 지도를 주는데…… 역시 경기 그냥 시작하네요.”
“하아. 정말 답답합니다. 이런 건 어떻게 제재가 안 되는 겁니까?”
“……”
조인선은 다시 침묵했다.
그런 조인선을 힐끔 본 배영우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곤 해설을 이어갔다.
“강지영 선수. 차분합니다. 표정을 보니까 흔들림이 전혀 없어요. 이 선수의 강점 중 하나가 강철처럼 단단한 멘탈 같습니다. 잡기, 아, 이번에도 가슴 깃은 먼저 내줍니다!”
“강지영 선수 특유의 잡기 동작이죠? 현대 유도에서는 잡기 싸움이 정말 중요해 누가 먼저 잡는가에 따라 경기가 잘 풀리고 못 풀리고가 결정되는데, 이 선수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요. 왜? 잡기를 안 하거든요. 이건 확실히 독특한 스타일이에요.”
“수비 유도라고 하는 거죠?”
“네. 수비 유도. 예전에 반칙을 잘 안 주던 시절. 그리고 지도 네 개를 받아야 반칙패이던 시절에나 먹히던 스타일이에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효과 시절이라고 하죠? 유효보다 먼저 없어진 점수인데, 효과는 점수로 따지면 1점 정도 되거든요. 반칙도 마찬가지로 네 개였어요. 그 시절에는.”
정말 옛날 옛적의 효과였다.
“하하, 옛날…… 허리 후리기! 한판! 한판입니다! 절반 두 개 합쳐서 강지영 선수가 한판을 따내고 준결승으로 올라갑니다!”
“정말, 잘해주었습니다. 강지영 선수!”
“시원시원합니다! 일본의 판정 테러를 이겨낸 우리 강지영 선수! 자랑스럽습니다! 패자전, 준결승은 30분 후에 시작됩니다. 시청자 여러분. 30분 후에 뵙겠습니다.”
배영우는 거기서 곧장 커트했다.
헤드셋을 벗고 조인선 교수를 바라봤다. 오늘 배영우는 어제저녁부터 있었던 이슈를 제대로 건드렸다. 일본협회 측의 이해 안 가는 대회 스케줄 통보, 한국 협회의 반응 등을 경기 시작 전부터 제대로 꼬집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인선 교수는 완전히 함구했다. 특히 한국 협회 측 얘기할 때는 아예 입을 앙다물었다. 절대 뭔가를 말할 수 없다는 의지. 그게 의문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고 있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제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인선 교수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배영우는 그 미소를 보며 곧장 이유를 깨달았다.
함구령.
모종의 압박이 조인선 교수를 옥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녀가 이럴 정도면? 배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넨 진짜 힘들게도 운동한다. 하…….’
조인선 정도의 레전드도 입을 다물었다?
그럼 압박이 상상 이상이란 뜻이었다. 배영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계하면서, 솔직히 이번만큼 안타깝고 화가 났던 적도 드물었다. 올림픽, 월드컵 등을 수없이 중계했지만, 이 애들은 어려서 그런지, 더욱 안타까웠다.
담배가 당겼다.
본래도 흡연자이지만, 중계할 땐 당연히 냄새가 날까 봐 철저하게 참는데 이번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배영우는 양해를 구하곤 정장 상의를 챙겨 곧장 부스를 벗어났다.
그리고 찾은 흡연실.
철컥.
후우…….
연기에 짜증과 안타까움, 답답함을 한껏 담아 흘려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툭툭 쳤다. 그에 흠칫 놀라 뒤돌아봤더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어, 이선영이?”
“오랜만이에요?”
“이야, 오랜만이다. 서울 올라온 지 한참 됐는데 코빼기도 안 내비치더니, 어쩐 일이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이라고 해놓고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있어요?”
“하하, 쏘리. 용건 있을 때만 움직이잖냐, 넌?”
“그래도요. 아, 몰라요. 좋은 것 좀 챙겨왔는데. 그냥 갈래요.”
“어허!”
배영우는 얼른 돌아서는 이선영의 어깨를 잡았다.
이선영은 참 맹랑한 느낌이 강한 후배였다. 하지만 그 맹랑함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한 게 팩트에 대한 집착이었다. 한때는 거대 그룹의 뒤를 캐다가 진짜 요단강을 건널 뻔한 적도 있는 게 이선영이었다. 그런 이선영이 자신을 찾아왔으면?
‘뭔가 들고 왔다고 했으니…….’
팩트.
100%다.
이선영이, 자기가 아끼는 동생을 위해 챙겨온 팩트.
“약속해요. 중계 중에 터뜨려주기로.”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뭔지 어떻게 알고 중계 중에 갈겨?”
“그냥 별거 없어요. 현 협회장의 과거 이력 정도? 신분 세탁 좀 한 거 같은데…… 제가 다 털어왔거든요.”
“응?”
“현 유도협회장 박충도. 일본 이름은 야마모토 유이치로. 도쿄대 나왔고, 30살에 한국으로 귀화했네요. 이후 한국 유도에 종사. 밑바닥부터 차근차근이 아니라 그냥 낙하산 타고 내려와서 10년 뒤인 올해 마흔의 나이로 협회장 당선. 올해 일본에서 받은 돈이 꽤 되던데요?”
입이 쩍 벌어질 만한 사안이다.
“이걸 다 조사했어?”
“틈틈이 해놨던 건데. 어제 전부 캐냈죠. 이 정도야 기본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거, 해줄 거예요. 말 거예요? 최초로 스포츠 중계 중에 초대형 특종을 터뜨리는 아나운서가 되는 건데, 어때요. 안 끌려요?”
“…….”
씩,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이선영에게 배영우는 잠시 고민 끝에, 손을 내밀었다. 씩, 비슷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배영우에게 이선영은 메모리칩 하나를 건네고는, 흡연 부스를 떠났다. 동생이 받는 공격에, 간만에 이선영의 눈빛에는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