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04화
204화. 나의 무사님(18)
정은정 작가의 눈빛은 반짝이면서도 단단했지만, 지영에게 나쁜 감정은 없어 보였다.
“잠깐 안으로 들어갈까요, 강 배우님?”
“네.”
저 멀리서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이쪽을 보는 이상익 감독을 뒤로하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은정 작가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년에는 역시 올림픽 준비로 바쁘죠?”
“네. 죄송합니다.”
이건 솔직히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 변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지영은 자신의 본분이 뭔지를 잊지 않았다. 사실 내년 올림픽을 생각하면 이번 드라마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선수의 폼은 꾸준한 관리가 없으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지영은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도복 운동을 못 하고 있는 게 뼈아픈 마이너스였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드라마를 찍는 건, 이 작품이 욕심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약속 때문이었다. 이연의 성의, 정은정 작가의 성의. 그걸 봐서 약속했고, 계약서도 작성했다. 아시아 선수권이 끝나면 바로 드라마에 들어가는 거로.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에 폼이 하락할 걸 알면서도 이 작품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딱 이 작품까지였다.
이 작품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게 올림픽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가 무리하게 시즌2를 하자고 하면, 지영이 너는 작품 안 할 거지?”
말투가 편해졌다.
작가가 아니라, 요즘은 편해져서 사적으로 누나, 동생 하는 사이에서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영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아니요. 작품은 끝까지 하죠. 그렇게 계약했잖아요. 하지만 내년은 정말 힘들어요. 후년도 그렇고, 그 후년도 그렇고요.”
“내년은 올림픽 때문이라고 쳐도, 그 뒤는 왜?”
정말 몰라서 묻는 순수한 눈빛이다.
하긴, 여성은 스포츠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올림픽도 막상 코앞에 닥쳐야 와 올림픽이구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정은정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내 후년에는 세계 선수권,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다시 아시안 게임이 있거든요.”
“아…….”
안타까운 게 아닌, 아아? 하는 느낌의 탄성이었다.
몰랐던 것을 알았다는 느낌. 지영은 그걸 느끼는 순간 정은정 작가가 왜 그게 궁금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 그게 끝나면?”
“네?”
이번 질문은 이연이었다.
“3년 후면, 지영이 넌 스물둘이잖아. 그 이후에는 어떤지 궁금해서.”
“……누나, 설마 그때까지 기다리시려고요?”
“대답이나 해봐. 그때는? 그땐 다시 올림픽 준비해? 아니면 프리해?”
이연의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영을 보는 정은정 작가.
뭐지?
안에서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지영은 두 사람의 이런 반응이, 분명 안에서 나눈 대화와 연관이 있을 거로 봤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둘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대답을 강요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툭,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임은진이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가볍게 툭, 지영의 허벅지를 쳤다. 지영은 당연히 눈치가 있어서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답은 임은진에게서 나갔다.
“두 분? 매니저인 저를 앞에 두고 우리 배우한테 슬그머니 접근하는 건 곤란해요?”
“아, 은진 언니.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닌 거 알아도요. 3년 뒤에 일을 대체 누가 알겠어요? 지영이가 그때는 배우일지, 운동선수일지, 아니면 그냥 독지가로 살지 아무도 모르는 건데. 괜히 책임감 강한 우리 배우님 입에서 엄한 구두계약을 하게 하지 마시고요. 딱 원하는 바를 말해보세요.”
역시 임은진.
이 사람이 있어서 정말 든든했다.
지영이 혼자 있었으면 진짜로 알았어요. 그땐 생각해 볼게요. 이런 대답을 했을 건데 나중에라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무리 구두로 한 약속이라지만 마음에 걸려서, 분명하겠다고 할 인간이 자신이라는 걸 지영도 알았다. 그리고 그걸 임은진이 더더욱 잘 알았다.
그리고 두 사람도 그런 발칙한 목적으로 지영의 스케줄을 물어본 건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걸 알아도, 이 영역은 임은진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엄한 대답으로, 배우가 원하지도 않는 작품에 출연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곤욕스러운 것보다는 자신이 나서서 매정하단 얘기를 들어도 정말 원하지 않으면 잘라내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정?
연예계에도 우정은 있다.
하지만 우정만큼 연예계에서 피곤한 독도 없었다.
임은진이 보기에 지영은 아직 그런 걸 모른다.
하지만 지영이 아직 그걸 몰라도 괜찮았다. 그 부분은 자신이 해주면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기에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연예인에게, 이 바닥에 닳고 닳은 매니저가 붙는 거였다.
“지영아.”
임은진의 말에, 정은정 작가가 지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불렀다.
“네.”
“나 이 작품, 딱 시즌 3까지만 해보고 싶어.”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시즌3까지만. 너만 허락해 주면 시즌2는 아시안 게임 끝난 뒤에 찍어도 돼. 어차피 시즌 1의 엔딩을 대치 상황에서 정리하고 싶었거든.”
“……아니, 누나. 그렇게 해도 돼요?”
“기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거? 뭐 어때? 헐리우드의 유니버스나 멀티버스만 봐도 몇 년은 그냥 우스운 건데, 뭐? 우리라고 다를 바 있나? 넷플에서 잘나가는 더 킹덤만 봐도 알잖아?”
“그래도요.”
정은정 작가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딱 빛나는 만큼 간절했다.
“솔직하게 얘기할게. 조금 아쉬웠어. 나는 더 많은 얘기가 막 머릿속에 떠올랐거든? 처음부터 그랬어. 그런데 우리나라 미니는 길어야 24부작이잖아. 그래서 그 안에 이야기를 담다 보니까 너무 아쉬웠거든. 솔직히 어느 전쟁이 그렇게 짧게 결정이 나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길 수 있는데. 그렇게 팍팍 정리가 끝날 것 같으면 반란이 성공도 못 했고, 반란에 대항도 못 하지 않을까?”
지극히 현실적인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임은진도 생각이 비슷했는지 지영과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 얘기는 길었어. 그걸 좀 압축시켜 달라고 한 게 이상익 감독님이었고. 알지? 나는 대본이 아니라 소설처럼 쓰는 걸 좋아해. 그거 있는데 보내줄까?”
얘기가 살짝 딴 쪽으로 세자, 얼른 이연이 제자리로 돌렸다.
“언니, 본론부터!”
“아, 맞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되게, 길고 큰 얘기를 썼거든? 막, 선고랑 재랑도 알콩달콩하게 해주고.”
어? 선고?
러브라인이 재와 연이 아니었어?
지영의 눈빛을 읽은 정은정이 세상 맑게 웃었다. 자기 얘기에, 자기 상상에 의심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렇게 악착같이 지키다 보면, 오히려 싫지 않을까? 그리고 중간에 자기 의심까지 하는 여자잖아. 세뇌에 가까운 학습, 제국에 대한 충심 때문에 지키지만 나라면 되게 싫을 것 같은데?”
“…….”
것도 그렇다.
연은, 강한 여인이지만 올곧고, 정직하고,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깨물어주고 싶은 캐릭터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때때로 독하고,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느낌이 팍팍 나는 캐릭터였다.
재는 인간미가 없지만, 연은 인간미가 넘친다.
그래서 캐릭터 간에 대칭이 맞는다. 그렇게 설정이 됐다 보니 재는 그냥 천외천을 보듯 바라보지만, 연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 캐릭터와 러브라인을 만들면?
오히려 재가 욕을 먹는다.
아니 그렇게 고생해서 지키고, 의심받고 하는데 연을 좋아한다고? 여기서 팍! 깨버리는 거다. 정은정 작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러브라인을, 오히려 선고와 만들었다.
다만 이 부분은 아직 지영도 전달받은 게 없었다. 대본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말이다.
“언니, 본론, 본론…….”
“아! 그래서 이번에 시즌 얘기 나왔을 때, 솔직히 기분 좋았거든. 아, 이렇게 되면 내가 상상하던 얘기를 다 풀어낼 수 있겠다. 그래서 사실 후반부 대본을 좀 정리해 보고 있었어. 16화 안에 딱 대치 상태를 만들어서, 서로 치고받는,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얘기를 마무리하고 싶었거든.”
“시즌2는 완전한 전쟁을 담고요?”
“응. 제국을 되찾는 게, 단순히 승상 후하나 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그에 주동했던 인간들이 얼마나 많겠어? 당장 줄줄이 소시지일 건데 그걸 본래 마지막 시나리오처럼 기습적으로 죽인다고 해도 또 몇이나 죽일 수 있고. 그동안 아군이 다 죽지 않을까? 죽인다고 해도 그 아래 소시지가 어차피 역모에 가담했으니, 정권이 뒤집히면 참수일 게 빤하니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을까?”
“…….”
반짝반짝.
자기 얘기를 하는 정은정 작가의 눈빛은 정말이지, 너무나 빛났다. 남들이 들어도 재밌는 얘기를 자기가 상상하고 있으니, 그렇게 눈빛이 반짝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니 애초에 재가 몰래 들어가서 후를 죽인다고 해서, 이 이야기는 끝날 수가 없었거든. 사실 이게 가장 마음에 걸려서 매일 밤 좀 울고 그랬는데.”
울기까지?
근데 정은정 작가의 눈빛을 보니 거짓말 같진 않았다.
“아쉬웠어. 캐릭터에 딱 부합되는 배우도 있고, 연이도…… 제 몫을 잘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끝내는 게. 그래서 고민했던 거야. 그런데,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더 하고 싶어. 지영아. 시즌3까지만 하면 안 될까? 4년? 내가 4년간 팬들이 기다리게 할게. 너만 약속해 주면 시즌1 그렇게 끝낼게. 응?”
정은정 작가의 말에, 지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후우…… 길게 내쉬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솔직히, 마음이 흔들린다.
특히 간절함에 지영은 약했다. 자신이 아주 간절하게 원하고 원했던 시절이 있어서, 이런 쪽으로는 솔직히 많이 약했다. 물론 완전히 망가졌었던 그 시절의 자신과 지금 눈앞에 정은정 작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때 자신은 다 잃었지만, 지금 정은정은 더 가지고 싶은 걸 갖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간절하다는 것, 그것 하나는 같았다.
지영이 간절히 경기를 원했던 것처럼, 정은정은 간절하게 이야기를 원했다. 자신의 상상이, 잘리지 않고 전부 현실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간절함만큼은 그래서 비슷했다.
그래서 임은진은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뺐다. 그 행동 자체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것과 같았다. 그리고 선택 자체를 지영에게 넘겼다고 봐도 좋았다.
“이거, 당장 답 드려야 해요?”
“적어도 며칠 내에는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대본을 수정할 테니까.”
“……그럼 이번 주까지만 고민해 봐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고마워, 그래도 고민은 해줘서. 단칼에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헤헤.”
바보처럼 웃는 정은정.
나사 하나 빠진 천재인 그녀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솔직하게 오픈하고, 안되면 딱 포기하는 성격. 정말 ‘수’라고는 조금도 쓸 줄 모르는 순박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더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큰 문제는 당연히 회사와 상의가 필수였다. 지영은 일어나기 전, 이연을 바라봤다.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이연. 정은정의 지금 솔직함은 분명 이연의 코칭이 있었을 거다.
어쭙잖은 말보다는, 그냥 솔직하게 진심을 꺼내고 팍! 부딪쳐 봐, 언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함께 촬영하며 정도 들었고, 그녀 또한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 이렇게 하는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대화로 문제가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상익 감독이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걸기 전 정은정 작가가 이상익 감독을 채갔다.
“하.”
스트레스다.
감독과 관계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딱 나는데, 이건 지영이 성미대로 풀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이어지는 촬영에서 역시나, 지영의 성질 건드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뭐?”
“안 합니다.”
지영의 차가운 대답에 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