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201화
201화. 나의 무사님(15)
컷! 사인과 함께 지영은 숨을 골랐다.
눈빛과 표정에 감정을 담는 건 언제 해도 힘들었다.
‘아, 액션이 훨씬 마음 편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액션 신할 때 남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워 제대로 하지도 못했었으면서, 지금은 또 액션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이렇게 휙휙 변할지는 또 모른 지영이라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연기를 확인했고, 오케이 사인을 받은 지영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번 장면은 회상 신이지만, 심적으로 힘들었던 신이었다.
중요도로 따지면, 아주 중요한 신이다.
왜?
재가 후가 역모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걸 연이 알게 된다.
이번 화는 6화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3, 4화가 이족을 통합하는 과정이라면, 5, 6화는 개전의 화였다.
본래는 이족이 연의 편을 들어주진 않았다. 하지만 후의 추격대는 기어코 이족의 땅까지 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하필이면 이족이 절대 용납하지 않는 아녀자와 어린아이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이족이 들고 일어났다.
추격대는 이족의 전사들에게 몰살당했지만, 이걸로 분이 풀리지 않은 이족의 전사들은 제국의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후가 추가로 보낸 추격대를 끝끝내 말살했다.
그 결과, 후는 이족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징병이 이루어지고, 이족과 제국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게 3, 4화의 내용이라면, 5, 6화의 내용은 첨예한 대립과 음모, 배신, 의심을 다뤘다.
좀 전에 지영이 찍은 신이 딱 그랬다.
이 회상을 연에게 재는 솔직히 얘기했다. 그리고 연은 재가 알면서도 역모를 방치했다는 의심을 시작했다.
재는 연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호위무사이고, 연은 그런 재를 원망했다. 재를 원망해야 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복잡한 심경의 변화였다.
그런 분란을 조장하는 게, 5, 6화였다.
시청자의 편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 재를 의심하는 연에게는 당연히 좋은 눈초리가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연은 강한 여자였다.
그 험난하다 못해 처절했던 추격을 자기의 발로 뛰어 대피한 것만 봐도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강한 여자라는 걸 이미 1, 2화에서 전부 보여줬다. 그러나 연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이런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욕 좀 많이 먹겠네…….”
지영에 이어 고민하는 신을 찍고 온 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번 편 나갈 때 누나는 인터넷 아예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이렇게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 나가면 욕이……, 아주 그냥 욕이! 어후. 나 장수하겠는데?”
“에이, 그래도 설마 그 정도까지 하겠어요?”
“아니야. 지영이 네가 몰라서 그래. 어긋난 팬심이 이런 장면에서 얼마나 터지는지…….”
“그 정도예요?”
“응, 그 정도야. 예인에서 도언이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데? 세상 욕이란 욕 다 먹었을걸? 민재 정도 멘탈이니 버틴 거지, 다른 배우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어.”
“아…….”
듣긴 들었던 것 같았다.
극 중 도언은, 진짜 답도 없는 캐릭터였다. 여자친구에게 폭언을 날리기도 하고, 이미 답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성공하려고, 주변 모든 것을 버리는 게 도언이었다. 그런 도언을 시청자들이 가만뒀을까? 아니었다. 아주 배 터지도록 욕을 먹여줬다. 장민재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 무덤덤하게 넘어갔지만, 멘탈이 약한 배우였으면 아마 혼이 빠져나가고도 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이연이 연기하는 연도, 이번에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너 이번 신까지 합쳐지면, 와, 답도 안 나온다, 진짜.”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연.
이다음 신이 뭐냐고?
오늘 마지막 액션 신이다.
연을 암살하러 온 자객과 맞붙는 신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재는 크게 부상을 당한다. 다행히 선고와 이족의 전사들이 들어오며 겨우 목숨을 구하는 재지만, 며칠이나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 장면이 나가고 나면, 연 역할인 이연에게 돌아가는 욕은 아마…… 배가 되지 않을까?
이연은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누난 시나리오 먼저 봤잖아요. 말 안 해봤어요, 정은정 작가님한테?”
“어딜 배우가 작가 대본에 이래라저래라해? 큰일 나려고. 아무리 내가 작가님이랑 친해도 그건 선 세게 넘는 거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이 작품 안 하면 됐잖아요.”
“야…….”
“하하, 알았어요.”
놀리려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눈을 부라려서, 지영은 얼른 항복 표시를 하고 물러났다. 가뜩이나 심란한 사람인데 여기서 더 놀리면 깨물릴 것 같았다. 심란한 그녀는 그냥 두고, 지영은 저 멀리서 손짓하는 김진우에게 얼른 다가갔다.
“합 점검해 봐야지?”
“네. 감사합니다.”
“감사? 왜?”
“이연 누나 심기가 매우 안 좋거든요.”
“아하. 하하. 드라마가 잘되어도 문제구나?”
“기분 좋은 심란함이죠, 뭐. 가요.”
지영은 김진우와 함께 오늘 찍을 자객 신에 투입되는 스무 명의 액션 배우들과 합을 점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 지영의 차례가 왔다.
* * *
촛불이 일렁였다.
그 촛불을 가만히 보던 연은,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알고 있다.
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재는 호위무사다.
제국의 정치, 내정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
100여 년 전, 당시 제국제일검이 손에 쥔 군권을 바탕으로 제국의 정치와 내정에 손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정말 최악의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삼권을 손에 넣은 제국제일검의 사태는 궐에 피의 강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진압됐다. 그때도 그가 아끼던 애첩에게 독약을 먹여 약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반란 진압이었다.
그런 전적이 있어서, 제국은 호위무사, 무장, 그리고 군권을 쥔 이들의 정치개입을 철저하게 막아왔다. 이들은 하나의 단에 소속될 수는 있어도, 파벌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걸리면 곧장 역모로 몰릴 수도 있고 실제로 그 이후 역사에 두어 번 그랬던 적이 있어, 피바람이 불었었다.
그렇기에 재도 정치와 내정, 그리고 외교에는 절대 손을 대선 안 된다고 교육받았다.
또한, 무장들에게 손을 내미는 짓 또한 철저하게 금하고 있었다.
궐을 수호하는 무사들이 하나의 파벌에 속하거나, 한쪽으로 뭉치면 그 자체로 엄청나게 위험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재는 말할 수 없었다.
제국의 승상이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고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성격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말해줬다면.
후의 그 간악한 마음을 먼저 알았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를 원망하기에, 그가 보여준 헌신이 정말 고마웠다. 재는 후의 마수에서 자신을 살려줬다. 목숨까지 걸어서. 함께 하던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였다.
그건 옆에서 지켜본 연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맙고, 감사한데, 말해주지 않아 원망스럽고. 이런 이중적인 마음 때문에 연은 괴로웠다.
“안 돼. 연, 정신 차려야 해.”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날려버리기 위해 애썼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당장 내일,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
안찰사 감태와 비밀리에 접선하기로 했다.
그를 설득해 제국 내 사정을 알아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는 말처럼, 평소 후와 사이가 정말 안 좋았던 감태를 어떻게든 설득해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감태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자기 안위가 걸려 있을 때는 상처 입은 맹수보다도 예민하고, 까다롭게 구는 거로 유명했다.
제국이 완전히 후의 손아귀에 떨어진 건 아니지만 최소한 군권은 장악했을 터, 그러니 감태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성향의 감태를 설득하는 게 자신의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 설득에 관한 것만 생각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나 머릿속엔 온통 재에 관한 생각밖에 없…….
채앵!
꽈지직!
우득!
갑자기 객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연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남과 동시에 나무 문짝이 터지면서, 복면을 쓴 괴한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복면 괴한은 곧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철퍼덕 앞으로 넘어갔다.
그런 괴한의 뒤로 드러나는 차가운 눈빛의 재.
순간 마주친 시선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단단하고, 단호한 눈빛.
신념과 의지로 빛나는 눈빛.
그 눈빛을 보자 마음이 저절로 놓였다.
이, 갑작스럽고 급박한 순간에서도.
그러다 그녀는 흠칫했다.
‘나는…….’
이런 재를 의심했던 거야?
파르르……. 그녀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차오르는 자기혐오에 입술을 꽉 깨물어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렇게 격랑에 빠져드는 순간, 재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것들, 훈련이 잘되어 있다.’
특히 연수합격이.
쇄애액!
쇠사슬을 매단 낫이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걸 쳐냄과 동시에 어깻죽지로 송곳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시선을 잠깐 주는 사이 허벅지를 노리고 단창이 쭉 들어왔다. 삼면을 포위하고 차례대로 던지는 공격은 결코 하루 이틀 훈련으로 만들어진 합이 아니었다.
‘이놈들 설마?’
금원대가 궁의 외부를 지킨다면, 황제와 황족이 거하는 내부를 지키는 집단이 있었다. 재도 얘기만 들었던 집단이다. 이들에게는 백적파, 금원대처럼 이름이 없었다. 그냥 존재한다고만 들었다.
이들은 궁의 어디에나 있다.
내시, 시녀 할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섞여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정체를 특정하기 어렵고, 또한 그렇기에 궁의 내부를 은밀히 지키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다. 이들의 무기는 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젓가락, 수저, 과도, 빨랫방망이, 쇠그릇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무기로 써서 적으로부터 황제와 황족을 지키는 게 그들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무기술을 갈고 닦을 시간이 없고, 여자와 남자가 섞여 있어서 전투 자체는 막싸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나. 같이 힘을 모아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 집중적으로 가르쳤단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이게 무서운 점이었다.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무기로, 하나를 철저하게 상대한다는 점이.
그런데 이들에게 무기가 쥐어지니, 그 연수합격이 정말 너무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것들까지. 손에 젓가락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비수가 번뜩이면서 자꾸 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서걱.
‘큭.’
서걱!
결국 낫이 허벅지를 긁었다.
하지만 낫을 던진 자 또한, 순간적으로 뛰쳐나가 휘두른 재의 일격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부서진 문을 막기 전에 좌로 그은 칼이 단창을 든 적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지잉.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돈다.
‘독?’
어찌나 강력한지, 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눈앞의 전경이 핑 돌았다. 그래서 재는 혀를 으득 씹었다. 격렬한 고통이 일어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는 시야가 돌아오는 순간 거칠게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 행동을 예상하지 못한 적을 빠르게 베어 넘겼다.
가르고, 막고, 뒤로 빠지려는 건 몸을 회전시켜 베고, 순식간에 복도를 메우고 있던 적을 섬멸했다. 스물에 가깝던 적이, 열로 순식간에 줄었다.
하지만 그때 다시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큭!
일그러지는 표정에 독이 다시 돌기 시작한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역으로 적이 짓이겨 들어오기 시작했다.
챙!
푹! 푸욱!
까강!
거친 쇳소리와 함께 재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고, 적의 목과 가슴에서도 피가 튀었다. 그래도 재는 베고, 또 베었다. 뒤에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 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몽롱한 의식으로 칼춤을 추기를 한참.
눈앞에 서 있는 적은 없었다.
“아…….”
그리고 재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재. 지켰다. 문 너머에 무사한 모습으로 연이 서 있었다. 그러니 지켰다. 재는 자신이 지킨 연을 향해 작게 웃었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