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5화
195화. 나의 무사님(9)
저 새끼가!
“관영!”
홰애애액!
바람을 가르고 건너편 절벽으로 밧줄을 타고 날아가는 관영을 향해, 재는 이를 갈았다. 관영이 이런저런 얘기를 걸어 주의를 뺏더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른 동료들은 건너왔던 흔들다리를 되돌아간 뒤였다. 그리고 언제 묶어 놓고 왔는지 모를 밧줄을 잡고 관영이 냅다 뛰어 건너편 절벽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눈에 동료들이 관영을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어, 어째서……?”
연이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재를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재는 이를 갈 뿐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이미 눈치는 챘다. 이 절벽은 아예 양쪽을 갈라놓는 만장단애가 아니었다.
이 흔들다리는 가장 빠른 경로일 뿐, 우측이나 좌측으로 돌면 이쪽으로 건너올 수는 있었다.
그렇기에 동료들은 역으로 적을 타격하러 갔다. 최대한 숫자를 끊거나 지휘관을 죽여서 추적 자체를 힘들게 만들 생각 같았다.
이건 백적파로 활동할 시, 지극히 자주 쓰던 전술이었다.
‘가능하다면…… 우두머리부터.’
대장이 죽으면 지휘체계에는 당연히 혼선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장을 죽이면, 아군의 사기는 수직으로 올라가고 적군의 사기는 수직으로 하락했다. 이 때문에 백적파는 가장 먼저 적의 머리를 노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이제 숲 전체를 전장으로 설정한 뒤 철저한 타격전을 펼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지휘관을 죽여서, 적을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추적 자체를 막거나, 아니면 최대한 재와 연이 도망칠 시간을 최대한 벌어줄 생각이었다.
목숨을 걸어서…… 말이다.
그걸 아는 재라서, 이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딴 곳에서!”
고작!
화가 났다.
황궁이 불에 탈 때도, 제국의 황제와 왕자들이 줄줄이 죽었다는 소식을 백선 선생에게 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재였다. 그러나 친우들이, 목숨을 이곳에서 버리겠단 각오를 본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뿌드득!
뚜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하도 세게 주먹을 쥐어 뼈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화가 올라와서, 삐이이! 하는 이명마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재는 곧, 정신을 차렸다.
백적파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연의 길을 연다.
그게 백선 선생의 당부이며, 자신의 바람이기도 했다.
제국, 선.
간악한 승상 후가 삼킨 ‘선’ 제국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황제와 황자가 전부 죽은 지금 유일한 정통성을 지닌 연의 존재는 필수였다. 그렇기에 재는 연을 살려야 했다. 무조건 후의 지독한 추적에서 연을 무사히 제국의 밖으로 피신시켜야 했다. 그 완전한 탈출이 바로 이 산맥이다. 이 산맥을 넘으면 평야가 나오고, 평야 지대로 들어서는 순간 이족의 영역이다.
그때까지 재와 연이 도망칠 시간을 백적파가 벌어주었으니, 재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갑니다. 공주님.”
“……알겠어요.”
이를 까득 깨문 연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속으로 짜증 가득한 욕지기를 뱉으며 재는 끓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으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한참 앞으로 나갔을 때였다.
“여기로 울 줄 알았지.”
길목.
빌어먹을 산맥의 지형 때문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협곡에, 이미 제국의 추적자들이 도착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수는 대략 백.
그런데 복장이 낯익었다.
가슴 정중앙에 금색 원숭이가 보였다.
“금원대?”
“흐흐, 그래. 나다.”
금원대.
황금 원숭이들.
황궁의 외곽을 지키는 날랜 놈들이다. 이놈들은 어둠에 숨어서 외곽을 지키는데, 얼마나 은밀한지 웬만해서는 근처에 가도 숨소리는커녕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놈들이었다. 그런 금원대가 협곡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고서.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놈은 평소 백적파를 못 마땅해하던 금원대주 장원이었다.
비릿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원대주 장원이, 순간적으로 연에게 시선을 뒀다. 비릿함보다 더욱 더러운 감정이 순간 눈빛에 깃드는 게 보여 재는 바로 연의 앞을 막아섰다.
고결한 혈통.
연은 그런 시선으로 누군가의 시선에 담겨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이걸.”
재는 허리춤에 꽂아 뒀던 짧은 단도를 연에게 조용히 건넸다.
연은 그걸 받아 가슴팍에 숨겼다. 무기 하나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았다. 게다가 재와 함께 무술을 수련했던 시기도 있는 만큼, 위급한 상황에서 방심한 적을 향해 일격을 날릴 정도의 실력은 됐다.
그리고 그게 끝이지만, 지금은 그 정도 무력이라도 있는 게 정말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상황이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반드시 나가야 하는 협곡인 건 맞지만, 폭이 워낙에 좁아 마차 한 대도 지나다니기 힘들다. 그래서 재가 막고 있으면, 뒤는 공격하기 힘든 구조였다. 따로 주변에 금원대를 숨겨두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당장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금원대가 아무리 잘 숨어도 재는 그들의 기척을 느끼는 경지에 다다른 무사였다. 그래서 이 협곡으로 겁 없이 들어섰다.
아쉬웠다.
이때 뒤를 받쳐줄 백적파 단원 몇 명만 있었으면 저것들을 걱정 없이 쓸어버릴 수 있는데.
“그런 눈빛,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들었지. 흐흐.”
장원의 말에 재는 피식 웃었다.
“나도 그래.”
“뭣이?”
“원숭이가 사람 꼴로 돌아다니는 거 보고, 기분이 별로였다고.”
“…….”
“주인이 기르는 가축이면 가축답게, 우리 안에 들어가 있어야지, 왜 기어 돌아다녀? 돌아다니긴.”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평소에는 이런 말을 쓰지 않는 재라서, 뒤에서 연이 오… 하고 상황이 상황인데도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그녀가 놀란 만큼, 도발은 그래도 제대로 먹혔다. 장원의 눈빛에 흥분과 살심이 팍 깃드는 순간, 재는 웃었다.
도망만 다녀서 안 그래도…… 좀이 쑤시던 참이다.
믿었던 동료들이 나 하나 살리겠다고 길을 열기 위해 남아, 화를 참을 수 없던 참이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승상 후에게 붙은 모든 것들을, 단죄하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 감정이, 재의 눈빛에 차디찬 진노가 스며들게 했다.
스르릉.
매끄러운 검명을 울리며 뽑혀 나온 재의 칼이, 장원의 명령에 가장 먼저 덤벼들던 금원대의 무사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뒤이어 떨어지는 칼을 막고, 면을 타고 제비처럼 짓이겨 들어가 다시 목을 벴다. 칼 한 자루 크게 휘두를 정도의 협소한 협곡. 놈은 실수했다.
‘적어도 밖에서 기다렸어야지.’
인원의 이점을 살릴 생각이었다면 이 밖이었어야 했고, 금원대의 장점을 살릴 생각이었다면 숲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장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다.
왜?
너른 터에서 제국 제일 무장이라는 재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금원대가 몸을 숨겨야만 힘을 발휘하는 집단이 아니라, 온 천하에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
백적파와 금원대는 결이 완전히 다른 부대였다.
백적파가 선봉에 서 적을 진압하고, 깨뜨리는 부대라면 금원대는 쳐들어온 적을 받아 암살전을 펼치는 부대였다.
즉, 백적파는 전쟁의 선봉에 어울리고, 금원대는 수성전에 어울리는 부대였다.
그러나 장원은 그게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하긴, 그림자로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거니까.’
나도 빛으로 나가고 싶다.
이제는 그만 어둠에 웅크리고 싶다.
이런 마음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이런 실수의 대가는, 크게 져야 했다.
재는 제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무사.
그래서 황제는 자신이 정말 아끼는 공주를 호위하는 역할을 줬다.
그런 재에게, 빛으로 나온 금원대는 정말이지, 맛 좋은 먹이일 뿐이었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오며 겪은 일들이 도화선이 되어, 그의 심기에 불을 질렀다.
쩡! 까강!
서걱! 푸욱!
막고, 베고.
칼등으로 때려 부수고를 반복하며 재는 피를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열이 죽었다.
그러자 금원대는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장원은 악을 썼다.
“밀어붙여! 몇 날 며칠 도망치느라 저게 마지막 체력일 거다! 더 밀어붙이면 분명 쓰러진다고! 들어가! 가라고!”
그러면서 제 놈은 뒤에 있고?
‘후의 안목도 별것 없군.’
정정하고, 딱 부러지던 전대 금원대주를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잘라내고 저 인간을 앉히더니, 그게 실력 때문에 앉힌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대 금원대주가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자신은 몰라도 연은 아마 반드시 죽었을 거다. 전대 금원대주는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쇄액!
암기가 날아들었다.
재는 그걸 감각적으로 쳐낸 뒤, 다시금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이어지는 전투. 처절한 비명이 울리기를 한참. 금원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장원은 도망쳤다.
* * *
컷!
“후우…….”
귓가에 아련히 들어온 이상익 감독의 외침에 지영은 자세를 천천히 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강렬하게 박동하던 심장이, 이제 끝났어? 하는 것처럼 천천히 박동을 늦춰갔다. 동시에 피어나는 열기.
“와…….”
“이걸 원테이크에?”
“미쳤네, 진짜.”
주변에서 스태프들이, 배우들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지영은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지영은 아까 강하게 부딪쳤던 액션 스쿨 배우를 찾았다. 저 앞쪽에서 엎어져 있다가, 발라당 몸을 뒤집고는 옆구리를 문지르는 그에게 지영은 얼른 다가갔다.
“형, 괜찮으세요?”
“응? 끄응, 괜찮어, 괜찮어. 허허.”
지영의 말에 아픈 신음을 내다가도 허허 웃는 액션 배우.
제대로 걸렸다.
찌르는 비수를 피한 다음, 자세를 낮춰 어깨로 옆구리를 받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어깨에 제대로 걸리면서 쩍! 하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았다. 연기 중이었기에 그대로 다음 장면을 이어갔지만 그게 연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급히 왔는데, 괜찮은 것 같지 않았다.
“봐봐요.”
“어우야, 여기서? 아서. 글고 이런 일 촬영하다 보면 다반사여. 걱정 말어.”
충청도에서 올라온 자신에겐 익숙한 구수한 사투리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다.
“그럼 병원에 가요. 얼른.”
“아니, 괜찮다니까 정말?”
“안 괜찮은 거 알거든요? 어깨에 제대로 걸렸어요. 쩍 소리도 났고. 분명 뼈에 문제 생겼을 테니까 바로 가요. 안 가면 저 난리 부립니다.”
이래서 액션은 정말 조심해야 했다.
합을 맞춘 다음 하는 건데도, 간격에서 문제가 생겼다. 딱 한 보. 한 보 거리 정도만 더 멀어져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제대로 박히진 않았을 건데 그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액션 배우 장호준은 지영이 봤을 때 그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고작 어깨에 받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영의 육체는 그 몸에서 뽑아낼 수 있는 한계까지 단련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 체중이 제대로 실린 어깨치기에 갈비뼈 쪽이 제대로 걸리면, 이건 마백 선수나 플백 선수도 그대로 날아간다.
“장호준이! 배우님 걱정하잖냐! 얼른 일어나서 병원 가라!”
다행히 왕주형 관장이 장호준의 고집을 꺾어줬다.
그런데 그 순간 스쳐 가는 아쉬운 눈빛. 지영은 왜 그가 아쉬운 눈빛을 지었는지 바로 깨달았다.
액션 배우라지만, 장호준도 배우는 배우였다.
한 신이라도 더 나오고 싶은 배우의 욕심이, 고통까지 참아가며 더 촬영장에 있고자 고집을 부리게 된 이유였다.
‘하…….’
씁쓸한 현실이지만, 이건 지영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하나 가능성이 있는 게 있다면.
‘골절상만 아니기를 바라야지.’
그것만 아니면 빠르게 회복될 거고, 그럼 어떻게든 자신이 고집을 부려 장호준과 합을 맞출 기회를 더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왕주형의 말에 장호준이 일어나서 옆구리를 부여잡고 촬영장을 떠나자, 그제야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는 지영. 그런데 주변이 조용했다. 그리고 스태프들은 물론 배우들까지 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묘한 눈빛으로.
그에 지영은 잠시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수건과 물을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 임은진에게 물었다.
“왜들 이래요?”
그렇게 물었지만, 임은진은 기분 좋은 미소로 어깨를 으쓱, 하기만 하곤 답을 해주지 않았다. 계속 이어지는 민망하고 노골적인 시선에 지영은 슬그머니, 천막 아래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