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4화
194화. 나의 무사님(8)
저기다! 저기 공주가 있다!
“젠장.”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짧게 혀를 찬 재가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연의 팔을 잡아채 냅다 뛰었다.
“재! 뒤는 나한테 맡겨!”
동료 송헌의 말에 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달리던 상태에서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붙어!”
“이러다간 전부 포위된다고!”
“황궁에서 그 많던 역도도 뚫고 나온 우리다! 이 정도 포위는 뚫으면 돼! 그러니까 남겠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
허락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골목에서 같이 뛰어놀다가, 그게 인연이 되어 어려운 형편의 친구들이 무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지만, 그 길을 열어줌으로써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줬다지만, 그래서 그들이 자신에게 가지는 고마움이 목숨을 걸어도 될 정도라지만, 그래도 용납할 수 없고,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동안 고마웠다. 재.”
“……송헌!”
“재를 부탁한다, 친구들!”
달리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던 재였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린 재의 시선에 가장 후미를 막고 달리던 송헌이 몸을 돌려, 활에 살을 먹이고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멍청이가!”
송헌은 사냥꾼이다.
하지만 동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은 아니다.
재와 제국의 앞을 막는 적을 잡는 사냥꾼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전투에서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송헌이 남았다. 그게 재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남은 동료들이 재의 시선을 막았다.
동료가, 친우가 뒤에 남았는데도 이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다 함께 자란 사이라서 형제나 다름이 없는데도, 이들의 눈빛은 지독히도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재, 앞을 봐라. 그러다 공주마마 손잡고 넘어질라.”
바로 뒤에서 같이 달리고 있던 백적파의 부단주, 관영의 말에 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극히 이성적인 관영이다. 단주도 냉정하고, 부단주는 더 냉정했다. 그런 관영이 막지 않았다. 이건 곧 얘기가 끝나 있었다는 뜻.
재는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가장 약한 순서부터…….’
그래야 마지막에 가장 강력한 친우들이 재와 공주마마의 뒤를 막을 수 있으니까.
지독히도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래서 과연 관영다운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관영, 넌 두고 보자.”
“후후, 지옥에서 보잔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개자식.”
“하하!”
재의 욕설에 관영이 크게 웃었다.
짧은 순간, 하도 뛰기도 많이 뛰어서 이미 송헌의 목소리와 역도의 비명, 욕설은 들리지도 않았다.
“재! 이대로 달리면 앞에 낭떠러지야! 진로를 틀어야 해!”
아차!
백적파에서 사냥꾼이 송헌이라면, 백적파의 추적꾼은 상원이었다. 가장 날래고, 눈길이 좋고,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주변 지형 모든 것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꼼꼼함까지 겸비한 친구다. 그런 상영이 바로 앞으로 치고 나왔다.
“이쪽으로!”
앞에 서자마자 즉시 해가 떨어지는 방향으로 경로를 비트는 상영.
재는 그런 상영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러면서 힐끔, 팔을 잡아끌고 있는 공주마마를 바라봤다. 다행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누군가의 희생을 등에 업고 도망치고 있단 현실을 제대로 깨우친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독기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요즘은 혼기가 차도 너무 차서 서화와 서적을 더 많이 보지만 적어도 한 해 전까지는 재의 수련을 따라 하려고 할 만큼 왈가닥이고, 몸 쓰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도 많이 늘었는데, 그게 지금 너무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평범한 아녀자였다면, 여기까지 스스로 달려 도망치지도 못했을 거다.
한참을 달리던 상영이 안내한 곳은, 절벽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였다.
그리고 그 흔들 다리를 보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재는 겨우 참았다.
* * *
컷!
이상익 감독의 외침에 재는 사라지고, 지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연도 사라지고, 이연이 들어왔다.
헉헉!
“후우, 후우.”
한참을 내달린 추격전이었다.
사실상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5분 정도를 불규칙한 지면의 숲길을 달려야 하는 신이었다. 무식한 신이었다. 지영에게 이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아니지만, 문제는 걸치고 있는 갑옷이었다.
빠르게 도망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간헐적으로 날아드는 화살이 있다는 설정이다. 그런 상황에 갑주를 버리고 도망치는 건 미친 짓이라는 판단하에, 도망치는 중이지만 갑주는 벗지 않는다는 설정을 넣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아, 이건 그냥 납 조끼를 입고 뛰는 것 같네.’
경갑이지만 확실히 무게가 있었고, 최소 6㎏ 정도의 납 조끼 무게는 되는 것 같았다. 이런 우악스러운 훈련은 사실 이젠 하지도 않는 스포츠계였다. 그런데 그걸 드라마에서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는 지영이었다.
하지만 자신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다 같이 하는 거라 불만은 없었다.
이연의 매니저가 얼른 물과 수건을 가지고 왔다.
담당 매니저가 있는 배우들은 각자 케어받기 시작했고, 지영도 당연히 임은진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메이크업이 번질까 봐 살살 닦을 필요도 없었다. 이 작품은, 여배우들 빼고 남자 배우들은 민낯 그 자체니까.
그런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도망치는데 얼굴이 뽀샤시할 정도로 화사한 메이크업을 한다? 그건 지영이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 점은 이상익 감독이 배우들과 계약할 때 전부 조정을 끝내놔서, 남자 배우들은 아예 메이크업이 없는 민낯이었다.
화면에 고스란히 민낯이 나가겠지만, 그 자체로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단 판단이었고 지영도 동의했다.
그리고 이연도, 이연과 함께 출연하는 다른 여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궁중 생활을 하는 배역의 여배우, 내시 역의 배우들만 좀 하얗게 메이크업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수건으로 땀을 닦을 때 굳이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흐르는 땀을 죽죽 닦아낸 다음, 임은진에게 소감을 물어봤다.
“누나가 봤을 땐 어땠어요?”
“내 생각? 가서 확인하면 되는 걸 굳이?”
“네. 누나 짬 되잖아요. 딱 보면 알지 않나?”
지영이 그렇게 묻자, 임은진이 풋, 하고 작게 실소를 흘렸다. 비웃는 건 아니고, 얘가 장난칠 정도로 여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나온 실소였다. 그 정도는 이제 임은진과 함께한 시간이 제법 길어서 척하면 척! 알아볼 수 있었다.
“지영아! 가서 확인하자!”
호흡을 되찾은 이연의 외침에 임은진은 그러자는데?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배우의 연기에 사사로이 이래라저래라하지 않는다더니, 아예 느낌조차 얘기해주지 않을 줄은 또 몰랐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서운해하는 건 더 쪼잔한 거라, 지영은 이연과 함께 신을 확인했다.
잘 나왔다.
숲길 옆으로 레일을 깔아서 달리는 신을 찍었는데, 덕분에 배우들이 달리는 모습이 아주 생동감 있게 잡혔다.
달리는 와중에 친 대사도 뭉개지지 않고 잘 나온 것 같았다.
물론, 이건 지영의 생각이고, 이상익 감독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었다.
“어때요?”
그런데 이상익 감독은 꼭 이렇게 묻는다.
신을 확인할 때마다 배우들에게 어때요? 하고 묻는 건 이상익 감독 특유의 고집이었다. 자신은 이미 잘 나왔나, 잘 나오지 않았나. 이 양쪽에 관한 판단이 선 상태였다. 그런데도 묻는 건 자신의 연기를 보는 눈을 길러주기 위한 배려이자, 고집이라는데 확실히 예술가들은 일반인과 다른 괴상한 고집이 있었다.
영상을 몇 차례 확인하고, 먼저 말문을 연 건 이연이었다.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지영아, 너는?”
“저야 뭐 보면 아나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감독님은 만족스럽지 못하실 테고. 음, 괜찮은 것 같아요. 적어도 제 눈에 모나게 보이는 곳은 없어요.”
지영의 대답에 씩 웃은 이상익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왔습니다. 배우들 힘들게 추가 촬영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휴, 다행이다.
체력이 남들보다 훨씬 좋은 지영도 이번 신은 좀 힘들었다. 한 번은 괜찮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 체력은 빠르게 깎여나갈 게 분명했다. 반복훈련이 힘든 게,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하기에 힘든 거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감독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이번 신은 한 번으로 가길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 한 번에 끝났다.
“자! 조금 쉬고 다음 신 촬영합시다!”
힘들게 뛴 배우들에게 휴식을 준 이상익 감독이 다음 신 준비를 향해 자리를 옮기자, 지영은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로 들어갔다. 산속이라서 대기실이라고 해봐야 그냥 운동회 때 쓰는 천막이 전부였다. 여배우들은 그래도 사방이 가려지는 막사 비슷한 게 대기실이었고.
하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제대로 쉴 수 있는 곳도 있고, 숲속이라 바람도 선선하게 잘 불어서, 주변이 어수선하지만 않았다면 눈을 감는 순간 잠이 쏟아질 정도로 좋았다.
편한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는데, 김진우가 다가왔다.
이제는 지영의 공식 검술 선생님인 김진우의 등장에,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쉴래?”
“아니요. 충분히 쉬었어요.”
사실 조금 더 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조금 더 쉬면, 이따가 촬영한 액션 신에 누군가가 다칠 확률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니 시간이 있을 때 이미 숙지한 동작이라도 더 연습하는 게 맞았다. 지영이 일어나자 임은진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배우가 충분히 쉬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습.
하지만 김진우는 미안한 웃음을 보이면서도 그녀의 행동에 나중에 할까? 같은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지영은 그렇게 자리를 옮겼다.
수십 명의 액션 스쿨 배우분들이 모여서, 각자 무기 소품과 합을 연구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왕주형 관장님이 있었다.
“어, 왔냐?”
“네, 관장님. 안녕하세요.”
“오냐. 칼 들고, 몸 좀 풀고 있어. 난 합 마지막으로 점검 좀 할 테니까. 끝나면 바로 시작하자.”
“네.”
그 말에 얌전히 대답하고 챙겨 온 재의 전용검을 뽑았다.
궁중 무사.
그것도 공주마마의 호위대장 직인 재의 검은 당연히 다른 무사들이 쓰는 것과는 좀 달랐다. 화려하기보단, 유려하고, 칙칙한 모습이 더 강했다. 오히려 일반 무장들이 쓰는 검이 더욱 화려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재의 검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걸 노리고 뽑아낸 디자인이었다.
‘이젠 이것도 익숙하네.’
촬영이 시작되기 전, 가장 공들여 다뤘던 게 지금 손에 든 검이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어서 비전문가에서 최소 준전문가의 레벨까지 끌어올리려고 정말 노력했다.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잘 때도 옆에 두고 잤을 정도였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확실히 손에 익어 느낌 자체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영은 방심하지 않았다.
실수 한 번이면, 이 강철 소품이 누군가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슴에 새겼고, 혹여나 방심으로 지워지지 않도록 각별하게 유의했다.
오늘 신은, 근 며칠간 가장 공을 들인 신이다.
흔들다리를 건너는 순간, 갑자기 동료들이 되돌아갔다.
관영이 재의 주의를 끈 사이 말이다. 그리고 재가 그걸 눈치채는 순간 관영은 뒤로 돌아 달려서 미리 늘여놓았던 줄을 잡고, 끊어진 다리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곤 발로 절벽을 받쳐 서자, 건너편의 동료들이 관영을 끌어올린다.
물론 그 장면은 따로 스튜디오에서 찍은 다음 CG로 해결할 거고,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 재와 연, 이렇게 둘만 남는다는 거다.
이를 간 재가 어쩔 수 없이 연과 다시 탈출하다가, 마지막 추격자들을 만나는 신이 바로 오늘 찍을 액션 신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야간에 찍을 신이라, 지극히 위험한 신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공을 들였고, 지영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다른 배우들이 촬영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지영도 수없이 연습했던 합을 다시 한번 맞춰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