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96화
196화. 나의 무사님(10)
대기실, 휴게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으로 후다닥 도망치는 배우를 보며, 왕주형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말문을 열었다.
“진우야.”
“네?”
“저놈, 저거, 진짜 물건이지 않냐?”
“하하.”
관장님의 말에 김진우는 소리죽여 웃었다.
안 그래도 지금 자기도 막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상익 감독은 작품의 미장센을 고려할 때 액션 아트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초반에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시각적 효과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작업을 그는 액션 아트로 잡았다.
김진우는 이미 그와 세 번째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와 작업을 할 때마다, 곡소리가 났다. 사극이든 시대극이든, 아니면 현대극이든 초반 1, 2화에 반드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을 액션 아트를 넣기 때문에 그걸 준비하는 액션 스쿨의 입장에서는 머리에 쥐가 나는 정도를 넘어서 때려치울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그만큼 이상익 감독과의 작업은 힘들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원테이크 액션.
끊어서 붙이는 게 아니라, 액션 전체를 긴 호흡으로 한 번에 보여주는 게 목적인 신이었고 이걸 짜는데 왕주형과 김진우는 정말 머리가 빠개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어떻게 겨우겨우 신을 만들어 냈는데, 문제는 배우였다.
멋진 합을 만들어 내도, 그걸 소화할 배우가 별로면 합이고 뭐고 때려치우는 게 나았다.
왜?
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단단한 소품으로 부딪치다가 제대로 어깨나 옆구리, 재수 없어서 얼굴이라도 맞으면 곧바로 은퇴 수순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 새끼처럼 아끼는 애들이다 보니, 둘은 합을 연습할 때 정말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합 연습이 끝나면 오히려 자신들이 지쳐 탈진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배우는 끝내줬다.
처음에는 유도 선수 출신이라길래 그래도 몸은 좀 쓰겠네. 했는데, 스쿨에 온 배우를 보니 세간에 가장 유명한 현역 국가대표였다. 그래도 드라마 영화 액션과 스포츠는 또 결이 달라서 처음엔 좀 긴가민가하며 걱정했는데, 몸을 쓰는 것 하나는 최고였다.
유연하기도 유연하고, 유도 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자세의 각이 제대로 살아 있었다. 그리고 합의 타이밍을 읽는 건 아예 도사였다. 그래서 합을 연습하면서 조마조마했지만, 보는 맛이 있었다.
액션은 시각적 즐거움이 최대 목표이고, 강지영이란 배우는 그 목표에 부합하다 못해 넘치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고도 걱정은 많았다.
현역 국가대표.
강지영에 관한 얘기는 인터넷에 이름만 쳐도 무수하게 뜰 정도로 많았다.
천재.
이 젊은 배우를 능력을 설명하는 가장 알맞은 단어.
인성갑.
이 젊은 배우의 인성을 설명하는 가장 알맞은 단어.
하지만 그래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액션 신이라는 것 자체가 긴 시간 동안 호흡을 계속해서 맞춰야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진행되고 나아가 신 자체가 살아난다. 그러니 합을 살리는 건 결국 연습이었다. 그리고 이 연습에서 배우들의 인성이 드러난다.
연습을 하도 보면 당연히 지치고, 지친 상태에서도 또 연습하다 보면 짜증이 올라온다. 액션을 전문적으로 하는 배우들도 피할 수 없는 순서였다. 그런데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어떻겠나.
짜증을 내면 더 냈지, 결코 적게 내진 않는다.
요즘엔 갑질이니 뭐니 해서 배우들도 조심하는 추세지만 순간적으로 올라온 짜증 때문에 인성이 드러나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그래서 걱정하면서, 강지영을 지켜봤다. 그러나 젊은 배우에겐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재능이 넘치면서도, 배우들이 다칠까 봐 각을 좁히고 줄여 안전을 추구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왕주형이 안 그래도 된다고 오히려 엄하게 다그쳤을 정도였다.
아까 선보였던 검을 타고 오는 합도, 자신을 걱정해서 그렇게 중간에 멈추던 친구였다. 날이 없지만 그래도 딱딱한 소품에 목을 잘못 맞으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김진우가 보기에 지영의 그런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몸 쓰는 재능을 타고나도 너무 타고나서, 거의 본인의 의지대로 통제가 가능한 친구였다.
즉, 멈춰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미 몸이 알아서 제동을 하는 단계라는 뜻이다. 한계까지 발달한 반사신경이고, 민첩성과 근력도 그만큼 따라주니 가능한 경지였다.
그런 친구가 배우들을 걱정해서, 본인의 재능을 죽이고 있었다.
좀 전의 신만 해도 그랬다. 김진우는 공석인 부관장에 사실상 가까운 직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신에 참여하지 않고, 왕주형과 함께 지켜봤다. 신은 완벽하게 살았다. 그러나 딱 한 번, 사고가 났다.
지영이 목을 가로로 쳐오는 칼을 자세를 낮춰 피한 다음, 그대로 일어서며 어깨로 옆구리를 들이받아 날린 다음 역공을 하는 신이었다.
합은 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너무 제대로 이어졌고 거리를 빼지 못한 액션 배우의 옆구리에 지영의 어깨가 제대로 박혔다. 쩍! 하는 둔탁한 소리에 김진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깨로 박은 것뿐인데도, 뭔가 으적! 하는 느낌의 소리가 난 거다. 그 소리가 나고 복면을 쓴 배우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걸 확인한 김진우는 배우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대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신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제발 한 번에 끝나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 그가 봤을 때도 큰 문제 없이, 합은 다 끝났다. 그리고 이어진 지영의 행동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배우에게 달려가려던 그는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던 거다.
자기가 어깨로 받았을 때, 배우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그래서 신이 끝나는 순간 호흡을 정리하지도 않고 먼저 그 배우에게 가서 상태를 살피고 병원에 가라고 종용까지 했다.
그걸 보고, 들은 김진우는 왕주형의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탐이 나는 배우였다.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인성 그 자체까지 완벽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래서 탐을 내면…….
“혹여, 지영이한테 액션 배우 해보자고 할 생각이시면, 얼른 접으세요.”
“야, 왜? 한번 말해볼 수도 있는 거지?”
“이미 승천한 용을 호수에 가두려고 그러세요? 그랬다간 호수 터집니다. 쟤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애가 아니에요.”
“음, 그렇지?”
“네.”
안 되는 친구다.
강지영이란 친구는.
저 친구가 놀 물은 이곳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어야 한다. 검도로 세계를 평정했었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는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적어도 김진우의 생각은 그랬다.
* * *
후, 액션은 정말 힘들었다.
조금 익숙해지긴 했어도, 딱 그 정도뿐이라 더욱 힘들었다. 게다가 1, 2화는 거의 야외 촬영이라 불편함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지영은 다른 배우들이 묵묵히 촬영에 임하는 걸 보고, 이런 걸 불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또 하나 고무적인 건, 촬영 중 NG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NG가 없으니까 촬영이 정말 빠르게 슉슉 지나갔다. 딜레이 되는 것 없이 진행되니 흥도 나고, 흥이 나니 자연스럽게 현장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늦은 새벽.
신을 마무리하고 잠시 쉬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숲에서 나가지 않은 건 일몰과 함께 이틀간 숲속 신 촬영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때문이었다. 1화의 끝은 탈출에 성공한 연과 재를 담는다. 그리고 그런 둘의 뒤로 장엄하게 뜨는 해.
CG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이상익 감독은 진짜 해를 재와 연의 뒤에 담기를 원했다.
연출을 맡은 감독의 의중이 그러니, 당연히 지영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장면이 진짜 해를 담는 거라면, 배우는 연출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벽 3시쯤 신이 전부 끝났지만, 스태프들과 이연, 지영은 현장에 남았다.
다른 배우들은 전부 산을 내려갔지만, 지영과 이연은 남았다.
그래서 새벽에 침낭을 덮고 잠을 청하던 지영은 으스스한 한기에 잠에서 깼다.
혹독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9월의 숲속은 추웠다. 게다가 철책선에 가까운 지역이라 더욱 날이 찼다.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만했다.
지영의 나이는 이제 고3이다. 촬영은 분명 강행군이었지만, 충분히 버틸 몸과 체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지영이 추워서 잠에서 깼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나.
침낭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자, 중앙의 큰 천막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몽골의 게르처럼 안에서 불을 피워놔서, 다들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지영은 그쪽으로 갈까 하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다. 아까 3시 좀 안 돼서 잠들었으니 1시간 겨우 잔 거지만, 지영은 그 1시간으로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다.
자기 전에 야식으로 먹은 뜨끈한 국수 한 그릇도 체력 회복에 크게 한몫했다.
지영은 막사로 가서 인사를 할까 하다가, 일단 스트레칭부터 했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하자 몸을 더 풀고 싶어졌다. 몸을 푼 지영은 안으로 들어가서 가방에서 운동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익숙한 촉감과 몸이 살짝 조여지는 압박감이 들자 대번에 정신상태가 변했다. 몸에 이렇게 압박감을 줄 때는 지영이 운동하기 전밖에 없었고, 그럼 부상을 방지하고자 언제나 시작은 정신 무장이었다.
그런데 이건 지영의 정신에 기본으로 박힌 스킬이었다.
부상 때문에 운동을 그만뒀었던 과거가 있으니, 알아서 절대 다치지 말자는 방어심리가 발동하는 거였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지영은 산을 도로 내려갔다.
낮에 주변을 둘러보면서 보아두었던 곳이 있었다. 절로 가는 길인데, 그곳은 그냥 숲길이 아니라 낮은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몸을 풀고, 계단을 타면 딱 적당할 것 같아서 지영의 기억에 자연스럽게 남은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지영은 몸을 제대로 더 풀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가볍게 걷기지만, 천천히 속도를 올려 왕복하다가 나중에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뛰어 올라가고, 뛰어 내려온다.
그렇게 30분만 뛰어도 몸은 완벽하게 풀린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5분 정도 걸리는 코스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자 몸에서 열이 나면서 정신이 아주 말끔해졌다. 조금 남아있던 졸음도 사라지고, 새벽의 숲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왔다.
이게 새벽 운동의 장점이다.
이른 새벽.
도시의 매연도 가라앉아 있을 시간에 이렇게 운동하면 하루 중 가장 상쾌한 공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억지로 하는 훈련에는 그걸 느낄 여력이 없겠지만, 지영은 좋아서 하는 운동이라 매일같이 새벽 운동마다 이 상쾌함을 즐겼다.
그런데 그걸 몇 주간 못 해서 좀 아쉽던 차였다.
지영은 아마 자신이 운동을 그만둬도, 새벽 운동만큼은 놓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두 번 왕복한 뒤, 지영은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계단의 높이 자체가 크게 높지 않아 무릎에 부담도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설설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비슷한 속도로 뛰어 내려오고.
“후우, 후우.”
다섯 번쯤 왕복하고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그쯤에서야 입에서 거칠어진 호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가 제일 힘들다. 흔히 호흡이 터진다고 하는 과정에 이제야 들어선 거다. 이 과정을 지나쳐야, 호흡이 터져서 육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과격한 운동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지영이 시합 전에 호흡을 터뜨리는 게 바로 이 과정이다.
계속해서 계단을 뛰는 지영.
종내에는 최고 속도까지 올라갔다.
팟! 팟! 팟!
운동복이 휘날리며 날카로운 소리가 날 정도로 계단을 타는 지영의 속도는 빨랐다.
“훅! 훅! 훅!”
숨이 턱끝까지 찼다.
그리고 허벅지 근육도 이제 그만 좀! 하고 소리를 지를 때쯤 지영은 뛰는 걸 멈췄다. 몸은 그렇게 힘든데도, 지영은 상체를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세워서 숨을 골랐다. 호흡 회복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상체를 숙이지 않는 게 최고였다.
“고생했어. 자, 여기.”
어느 순간부터 내려와 자신이 운동하는 걸 보고 있던 임은진이 내민 수건과 물을 받은 뒤 고맙다는 말 대신 살짝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스태프들 몇몇과 이연, 이상익 감독도 서 있었다. 이미 운동할 때부터 눈치챘지만 중간에 끊기 애매해서 무시하고 끝까지 달린 지영이었다.
“이게 프로 선수의 훈련이구나. 와…….”
이연이 넋을 놓은 것처럼 하는 말에 지영은 피식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진짜 프로의 레벨로 가면 무식하단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괴로운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지영은 굳이 그걸 정정해 주지 않았다.
몸을 풀고, 올라가서 옷을 다시 갈아입은 지영은 모든 준비가 끝난 촬영장으로 향했다.
일련의 준비가 끝나고, 레디! 액션!
숲 끝에서 내려다보니 광활한 평야. 그곳에 도착한 두 사람은 멍하니 그 끝을 바라봤다. 괴로운 시간, 힘든 시간이었다. 추적을 따돌리고, 포위망을 돌파하고,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달리고 또 달려서 겨우겨우 도착한 곳엔, 안도와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털썩.
힘이 빠질 대로 빠져 지쳐 쓰러지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의 앞으로, 고생했다고 위로해 주는 것처럼 따스함을 품은 해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