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49화
149화.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1)
올해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히는 예인으로 살어리랏다는 한 분기 드라마로 딱 16부작이 끝이었다. 금요일 마지막 화 전 편은 18%의 시청률이었고, 순간 시청률은 20%를 찍으며 대미의 장식을 끝마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놓은 상태였다.
토요일.
지영은 종방연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상태였다. 종방연에 참가하기 전에 일단 회사부터 들른 지영은 오랜만에 뵙는 장세리 선배님과 가볍게 티타임을 가졌다.
“그럼 아시아 청소년? 그 대회는 아예 건너뛰는 거야?”
장세리 선배님의 질문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10월에 전국체전 뛰고, 11월에 선발전, 12월에 본 대회를 뛰기에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그래서 두 대회는 건너뛰기로 했어요.”
“잘했네. 보니까 감량 엄청 하더만. 시합 때 얼굴은 아예 뼈만 남았던데?”
“그래도 할 만해요.”
“말 그대로 할 만한 거겠지. 그래도 지금은 살이 조금 올라 그런가 보기 좋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게 본 모습인데. 그럼 다음 시합은 언제쯤이야?”
“음, 아마 3월 그쯤이지 않을까 싶어요.”
“3월? 그땐 뭔 대회인데.”
“선발전이요. 단체전만 나가기로 했어요.”
“단체전만?”
“네.”
다음 대회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비어서, 내년 초쯤에 있는 대회를 고르긴 골라야 했다. 그러다가 들어온 게, 선발전이었다. 이미 1차는 이번 달에 치러지고, 지영이 나가기로 한 건 2차 선발전이다. 다만 개인전은 나가지 않고 무차별 단체전만 나가기로 했다.
시합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내린 초지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직 어떠한 것도 결정 난 게 없었다.
“개인전은…… 맞다. 너네 맵이 있다고 했지. 그럼 어떡할 거야. 남는 시간 동안 작품 하나 더 할 거야?”
“음, 모르겠어요.”
방송 쪽 활동을 도와주는 장세리 선배님이시다.
지금부터 내년 3월까지면 적어도 넉 달 이상은 빈다. 가능하면 이 안에 작품을 하나 더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지금 확실히 지영에 대한 관심도 매우 증폭되어있는 상태였다.
“왜? 하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시합 준비하려면 드라마보단 영화가 낫겠고.”
“저 영화 시나리오 많이 들어왔어요?”
“많지. 지금 답 달라는 것만 못해도 다섯 개가 넘어.”
“어, 그렇게나요?”
“그럼. 운동선수 강지영도 강지영이지만, 이쪽 사람들은 배우 강지영을 더 좋아하더라고. 장민주 작가님처럼 너를 아예 롤모델로 놓고 쓴 작품도 꽤 되던데? 실제로 유도선수 출신을 베이스로 잡은 캐릭터도 있고.”
“아아…….”
사실 한동안 인터넷은 하지도 않았었다.
아시안 게임 이후 워낙에 지영을 까는 기사가 많았고, 그리고 바로 체전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인기를 전해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본방사수는 까먹지 않았었고. 어쨌든 그래서 지영은 예인이 어떤 화제를 낳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임은진도 대본을 많이 받았고 이런저런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아시안 게임 이후 지영에게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몇 개 들어왔겠지. 하는 생각은 했는데 그게 쌓일 정도일 줄은 몰랐던 지영이었다.
“오늘 갈 때 챙겨가서 틈틈이 봐. 그런데 해도 상관은 없고, 안 해도 상관없는 건 알지? 내가 어쩌다가 너희들 대표가 되었지만 나는 솔직히 운동에 더 집중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니까.”
“네, 잘 알죠. 그래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감사하지. 덕분에 회사 확장도 했고.”
서로 도움이 됐다는 말에 안심됐다.
받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서로 주고받는 게 있는 관계가 더 오래 간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몰라도, 지영의 생각은 그랬다. 그래서 마음의 빚이 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후후, 감사는 무슨. 슬슬 갈 시간이지?”
“네. 9시까지니까 슬슬 가봐야죠.”
“그래, 그럼 고생하고. 참, 기자들은 그냥 무시해.”
“네.”
지영은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하곤 대표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임은진이 바로 다가왔다.
“늦었어!”
“어? 진짜요? 9시까지 아니에요?”
“서울 무시하세요, 휴먼?”
“아.”
서울이다.
서울.
교통체증이 진짜 미친다는 서울.
지영은 임은진과 함께 얼른 내려가 바로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시나리오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양이었다. 그녀가 차를 출발시키자 지영은 설마 하는 마음에 말문을 열었다.
“설마 저게 다 저한테 온 거예요?”
“응. 다 너한테. 다른 애들한테 온 건 따로 빼놨으니까 저거 다 너한테 온 거.”
“헐…….”
아까 장세리에게 좀 많이 왔단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영이 넌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어.”
“위치요?”
“응. 너 요즘, 연기계에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거든.”
“에이, 라이징 스타는 무슨…….”
“또 또. 누나가 다 자료조사 해보고 내린 결론이거든? 고작 한 편이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연기력. 그리고 그 연기력을 뛰어넘는 분위기. 연출하는 인간들은 이런 캐릭터를 그냥 못 넘기거든. 그리고 작가들도 그렇고. 일단 캐릭터 하나만 조형 잘해놔도, 스토리가 쭉쭉 떠오르기도 하고.”
“…….”
심하게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것 같아 좀 민망했지만, 지영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 때문에 너희 욕은 먹었어도, 드라마 시청률은 더 올랐어. 잘 모르던 사람들도 네가 뭐 얼마나 연기를 잘해서 이쪽 판에 발을 들였나 궁금해 한 사람들이 많았거든. 결국 그 자체로 시청률이 오른 거지. 뭐,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이었는데 오히려 잘 풀린 거지. 그리고 그거 보면서 인정할 사람들은 인정했고. 아 얘가 유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연기도 곧 잘하는구나. 이렇게. 여론이 이러니 관계자들이 안 찔러보고 배겨?”
“음, 누나가 그렇다니까,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누나는 저거 다 봤어요?”
“나? 보긴 했지.”
“제가 했으면 하는 건 있어요?”
“몇 개 추려놨는데, 넌 그래도 일단 다 봐야겠지? 나는 내 안목보단 배우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추천받아서 하려고 했는데, 역시 꼼수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 꼼꼼하게 살펴봐.”
“넵.”
뭐, 틈틈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차는 졸졸 달려서 겨우 9시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 그래도 핫했던 작품이라 그런지 역시 기자들이 나와서 대기 중이었다. 근처에 도착하자 임은진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지금 도착했어요. 바로 들어가면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지영을 향해 말했다.
“조금 있으면 임윤옥 선생님 오신대. 오면 같이 들어오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네.”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작진 측에서 신경을 써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국체전 2연패를 하면서 논란이 거의 가라앉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건 맞다. 그런데 지영이 여기에 혼자 턱 하니 내리면, 기자들이 아주 맛 좋은 먹이를 발견한 눈빛으로 침을 질질 흘릴 거다.
단순히 포토타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질문이 오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영이 내리는 순간부터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그 짧은 거리가 정글이 될 거였다. 이를 이 바닥에서 수십 년씩 구른 구렁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고, 배우를 지키기 위해 묘수를 생각해 냈으니, 바로 임윤옥 선생님이셨다.
대한민국 기자들이 막 나간다고 해도 설마, 임윤옥 선생님 앞에서 막 나갈 인간은 감히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임윤옥 선생님과 함께 들어가면?
곤란한 질문 따위는 시작하기도 전에 커트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건 제작진 측에서 정말 신경 써준 게 맞았다.
5분쯤 기다리자, 매끈한 세단이 한 대 앞에 와서 섰다.
“오셨다. 누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지잉.
열린 문으로 지영이 내리자, 앞에 선 차의 뒷문이 열리고 임윤옥 선생님이 발을 내미셨다. 지영은 얼른 가서 에스코트했다. 지영이 뻗은 팔을 보고 푸근히 웃은 선생님이 차에서 내리셨고, 이내 가볍게 팔짱을 끼자 지영은 임윤옥 선생님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금메달 축하해, 얘.”
“감사합니다.”
“중계 볼 때는 얼굴이 홀쭉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얘, 지금이 역시 보기 좋다.”
푸근히 웃으며 하는 말에 지영은 그냥 웃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회귀 이전엔, 세상이 잿빛이었다.
그때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있었지만 자신은 그 어떤 호의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신경 써주는 거겠지. 하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받았었던 정신과 진료에서도 그랬었다.
일종의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하도 심하게 남아서, 그때는 정말 그랬었다. 그런데 회귀 이후, 이상하게도 자신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친구들이야 다쳤을 때도 마음을 터놓은 유일한 애들이었다.
그러니 걔들은 빼고.
이선영부터 시작해서 임윤옥 선생님까지.
자신의 주변에는 이렇게도 좋은 사람이 득실했다. 새롭게 연이 닿는 사람들도 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같이 드라마를 찍은 이연도, 장민재도 사람은 좋았다.
이연은 알고 보면 엄청난 개구쟁이였다. 장난기가 하도 심해서, 그걸 컨트롤하느라 스스로 몸을 배배 꼴 정도로. 근데 그걸 빼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가식도 없고, 털털하고.
장민재는 연기에 욕심이 많은 걸 빼면, 좋은 형이었다.
지영이 감량에 들어가자 자신이 평소 먹던 브랜드가 진짜 좋다면서 닭가슴살과 닭가슴살로 만든 핫바 등, 친구들과 다 같이 한 달을 먹어도 될 정도로 엄청나게 사줬다. 그 외에 건강보조제도 함께 보내줬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고마워서. 그게 끝이었지.’
뭐가 고마웠는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임은진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지영을 향한 질투심을 연기력 상승으로 승화시켰고, 그게 고마웠다고. 지영은 한 것도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꼈고, 잘 이겨내고 한 계단 더 올라갔다고. 그래서 고마웠단다.
임윤옥 선생님은 뭐, 그냥 좋으신 분이셨고, 박지상 감독님도, 장민주 작가님도 전부 감사한 분이셨다.
그런 인연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오니 솔직히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좋았다.
“무슨 생각 하니?”
“네? 아, 죄송합니다.”
“호호, 누가 혼냈니? 그냥 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표정이 어쩜 그리 시시각각 변하니? 난 변검 보는 줄 알았다, 얘. 호호!”
“그냥 잠깐 딴생각을. 죄송해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자 이제, 표정 관리하고. 기자들 우리 봤네.”
“네.”
촤자자작!
셔터 터지는 소리가 잠깐 몇 초 사이에 빠르게 흘러갔고, 식당 앞에 선 두 사람. 지영은 가만히 기자들을 살폈는데 역시 몇몇은 눈에 아쉽다는 감정이 그득했다. 지영 혼자 왔으면 물어뜯으려고 시나리오를 열심히 짰을 텐데, 감히 임윤옥 선생님과 함께 있으니 다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지영은 몇 가지 문답에 성실히 답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기자가 마지막 질문이라며 다급히 잡았다.
“그, 예인 이후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되십니까?”
다음 행보라.
솔직하게 대답해야겠지.
“운동이요, 아니면 방송이요?”
“하하, 가능하면 둘 다 알려주시면 좋겠죠?”
“음…….”
시합 얘기는 하지 말자.
어차피 단체전을 빼면 내년 스케줄은 아직 잡히지도 않았다.
“내년 시합 스케줄은 보통 12월에 코치님과 상의해 정해서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방송은 어떻게 됩니까? 시나리오가 많이 간 걸로 알고 있고, 몇몇 감독님이나 작가님이 대놓고 애정 표현도 했는데, 그 작품은 혹시 생각 없으십니까?”
“시합 준비로 인터넷을 한동안 안 해서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시나리오도 오늘 받았으니까,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거기까지 대답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지영은 임윤옥 선생님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삼겹살집. 아주 좋은 고기를 쓰기로 유명하고, 그래서 비싸기로도 유명한 집이었다. 스태프까지 포함해 인원이 많지만, 자리도 넉넉해서 전원 착석해서 지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영의 도착으로 시작된 종방연.
종방연이라고 뭐 특별할 건 없었다.
감독님, 작가님이 소감 얘기하고, 배우들도 소감 한마디씩 하고, 먹고 마시다가 마지막 화를 같이 보는 걸로 화룡점정. 이런 순서이다.
지영도 축하한다는 인사와 가볍게 드라마를 찍은 소감을 얘기하는데 저 끝에 있던 임은진이 전화를 받더니 인상을 팍 구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와서 앉은 지영은 기다릴까 하다가 임은진을 찾아 나갔다. 문을 열었는데 볼 일은 다 봤는지 기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지영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런데 왜 기사를 그렇게 내요! 이거 정식으로 항의할 거예요! 정 기자님? 저 임은진이에요! 제가 이 바닥에서 몇 년 굴렀는지 모르세요? 지금 우리 지영이 가지고 클릭 수 올리려고 하는 거잖아요! 어쨌든 얘기했어요, 전? 네! 그러시든가요!”
뚝.
화를 있는 대로 쏟아내고 전화를 끊는 임은진,
“누나, 무슨 일이에요?”
“어?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요. 다 들었는데.”
지영은 대충 예상이 가서, 폰을 꺼내 자신의 이름으로 검색해 기사를 확인했다.
-(예인 종방연) 운동은 모르겠고,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다.
-[예인 종방] 배우 강지영. 운동보다 연기에 집중할 것!
-(예인 종방) 운동은 생각 없다. 대신 연기로 좋은 모습 보일 것!
하…….
주변에 너무 좋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그래서 그 울타리 너머엔 악의로 가득 찬 자들이 득시글대는 걸까?
따끈따끈.
올라온 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기사를 보며 지영은 그냥 피식, 실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