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35화
135화. 결실의 계절(4)
점심시간은 아직 30분쯤 남았다.
황석과 임효중이 옥상문을 막았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고, 선생님에게 알리든, 경찰에게 알리든 할 생각이었다.
일단 강한결만 남겨두고 지영도 이성진과 함께 옥상 문 쪽으로 이동했다.
“잘했다, 지영아.”
“후, 깜짝 놀랐네.”
황석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어?”
임효중의 질문에 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재차 대답했다.
“우연. 눈빛을 봤는데, 완전히 죽었더라고.”
“그게 본다고 딱 알게 돼?”
“너도 봤으면 알 거야. 진짜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날 때가 있었어. 마치 삶의 의지가 전부 꺾인 것처럼 보였거든.”
“하긴, 넌 눈치 하나는 진짜 좋으니까. 근데 진짜 다행이네. 지영이 네가 만약 못 알아챘으면…….”
임효중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고다, 사고. 초대형 사고. 사립 명문 연희고 옥상에서 투신 자살사고가 일어나는 대형사고 말이다. 그걸 막았으니 정말이지,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특히 지영은 한 사람을 살렸다는 게,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따일까?”
이성진의 질문에 지영을 포함한 셋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연희고에 왕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학년 위, 그리고 아래는 사실 잘 모른다. 3학년 선배나 1학년 후배들의 문제까지 전부 커버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소문은 돌게 마련이다.
연희중 때부터, 황금세대는 왕따만큼은 확실히 개입해서 없애버렸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일진들이라고 해도. 이 황금세대는 넘을 수 없었다. 특히 황금세대가 폭력을 못 쓴다는 사실을 눈치챈 일진 하나가 괜히 강한결을 건드렸다가, 그걸 보고 폭발한 이성진이 일진들을 말 그대로 조져놨다.
물론 많이 때린 건 아니다.
다만, 이성진은 그때도 당시 중학교 최강자였다. 그래서 시원하게 내던졌고, 낙법도 제대로 못 치는 양아치들은 죄다 바닥을 굴렀다.
그 문제로 이성진은 교내봉사를 했고, 일진은 강제 전학 당했다.
그러한 스토리는 연희고 학생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왕따를 주도한다?
무리를 만드는 건 괜찮지만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순간 즉각 황금세대에게 들어갈 거고, 그런 부분에서는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강한결과 황금세대는 단박에 움직일 거다.
그래서 청주 내에서, 가장 깨끗한 게 바로 연희고였다.
그러니 왕따는 아닐 거다.
그럼 뭘까?
전국에서도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공부 실력을 갖춘 정소영이, 눈빛이 죽기 시작한 이후 며칠 만에 옥상에 올라와 투신하려고 한 이유가 대체 뭘까? 지영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가정 폭력, 성추행이나 폭행. 성적하락도 있겠지만 정소영은 아직 성적이 안 떨어졌으니…….’
남은 건 이 둘 정도다.
그리고 사실상 가장 합당한 이유였다. 왕따도 아니고, 성적하락도 아니니 남은 건 가정 폭력, 혹은…… 이성이나, 성적인 문제. 이 정도가 가장 유력했다. 그리고 그걸 황금세대 전체가 눈치챘는지, 표정들이 심상치 않았다.
가정 폭력.
이미 이성진이란 친구 때문에 이미 그게 얼마나 끔찍하고 힘든지는 제대로 겪어봤다. 그래서 지영은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힐끔, 혹시 해서 바라본 이성진의 표정은 역시 좋지 않았다.
역린을 자극받은 표정.
‘하아…….’
그 모습에 지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진의 최대 단점. 아니, 약점이 어떤 식으로든 가정 폭력에 노출되면 저렇게 심적으로 너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영에게 부상,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이성진에겐 가정 폭력이란 트라우마가 있었다.
지금이야 얼추 수습된 상태지만 언제 또 시달릴지 모른다. 그런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사는 게 이성진이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정소영을 통해 재발했다. 이럴 때는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그저 지켜보는 게 최고였다.
트라우마라는 게 단순히 위로한다고 가라앉고, 고쳐지는 게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정소영은 울음을 그쳤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자, 강한결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 옥상 난간 쪽. 혹시 그녀가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걸 대비한 위치 선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정소영은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고, 한은정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서 일어나서 함께 다가왔다.
“선생님께 데리고 갈게.”
“응, 부탁할게.”
“부탁은 무슨.”
씩 웃은 한은정이 지영과 친구들이 비켜서자, 정소영을 부축해 아래로 내려갔다.
하아.
그제야 길게 숨을 토해내는 지영. 이제야 좀 안심이 됐다.
“이 얘기는 나중에 은정이한테 듣고 나서 하자.”
“그래.”
강한결이 상황을 종료시켰다.
이성진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는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됐고, 정소영에 관한 얘기는 오후 운동을 끝내고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계부의 폭력과 성희롱.
정소영의 경우는 심각했다.
이전에 양궁남매처럼 친어머니가 몸이 안 좋았는데, 병원에 입원한 순간부터 더러운 수작질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병원비를 계부가 대다 보니까, 정소영은 더욱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배다른 오빠도 문제였다.
이제 스물두 살.
방구석 백수.
계부보다 더욱 폭력적이고, 벌써 몇 번이나 성폭행을 시도한 적이 있는 미친 인간.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런 정소영의 얘기를 들은 학교 측은 1초의 고민도 없이 경찰을 호출했다. 보통 이런 문제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연희 재단은 지역 최고의 사학 재단이다. 충북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뒤부터 연희 재단이 쌓아 올린 성은 매우 크고, 넓고, 견고했다.
이 문제로 오후 스케줄도 취소하고 이사장까지 출동하자, 사건은 순식간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정소영은 공부를 잘하는 만큼, 머리도 똑똑했다. 핸드폰과 조금씩 모아뒀던 용돈으로 카메라를 사서 몰래 방에 달아서 자신이 당했던 상황을 녹화해 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 그걸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귀가 조치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또 끔찍한 폭력과 폭언에 시달렸고, 결국 투신을 마음먹었다. 여기까지는 진짜 욕을 처먹어도 할 말이 없는 경찰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연희 재단이 개입하면서, 둘은 곧장 구속됐다.
사건은 이렇게 해결되나 싶은 방향으로 거침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정소영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곳은 어머니가 없고, 아직도 정소영에겐 너무 무서운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담임 정수아의 집에서 잠시 묶기로 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정소영.
이런 불안은 금방 해소되는 게 아니었다.
“소영아! 점심 먹으러 가자!”
“어? 어어, 응…….”
그런 정소영에게 이성진이 붙었다.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구속될 거라는 건 확실시 되지만 이미 받은 마음의 상처는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배다른 오빠는 백수 주제에 영악해서, 증거가 될만한 게 크게 없어 구속이 풀려버렸다.
증거가 없으니, 잡아둘 수가 없던 거다.
그래서 정소영은 매일같이 떨었고, 그런 정소영에게 이성진은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특히 점심 먹을 때는 항상 옆에 끼고 돌기 시작했다. 정소영은 그런 이성진의 배려를 부담스러워했지만,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주말에도 결국 만나기 시작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나갈 준비를 하는 이성진.
지영은 그런 이성진이 조금 걱정됐다.
정소영을 신경 쓰는 이유는 알겠는데, 그게 어떤 감정이 바탕에 깔려 있는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소영이 만나러 가?”
방에서 나온 임효중이 머리를 만지는 이성진에게 묻자, 이성진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올, 데이트. 부러운데?”
“으흐흐! 그럼 너도 연애해라?”
“헐, 연애? 벌써 사귀냐?”
“아니, 오늘 고백하려고.”
헐…….
벌써? 문에 기대서 듣고 있던 지영도 놀라서 입을 턱 벌렸다.
“진짜? 오늘 고백하려고? 야, 너 소영이랑 친해진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지영이 놀라서 그렇게 묻자, 이성진은 검지를 세워 까닥까닥 시계추처럼 흔들었다.
“우리 순진한 지영아. 좋아한다는 감정은 일주일이면 원래 확인 가능한 거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섣부른 거 아냐?”
“왜? 뭐가?”
이성진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지영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나 강한결이 오래 걸린 거지, 원래 이 나이 때 애들의 연애는 쉽고, 빠르다. 그래서 더욱 걱정됐다.
“왜, 내가 소영이 연민해서 이러는 것처럼 보여?”
“어, 그게…….”
이성진이 먼저 훅 치고 들어오니까 할 말이 갑자기 확 궁해진 지영이었다. 그런 지영에게 이성진이 장난기를 지우고 말했다.
“연민 맞아. 그런데 그 연민의 크기만큼 소영이를 좋아하는 마음도 커졌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음……. 잘못하면 소영이가 더 상처받을 수도 있어.”
“그런 생각 안 들게 잘해주면 돼.”
“…….”
그 말에 지영은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물론 이성진의 연애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본인도 연애하고 있는데, 이성진은 조금 불안하니 넌 하지 마! 이러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됐다.
연민, 동질감으로 시작된 연애가 좋게 끝날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지영은 불쑥, 생각해 보니 자신의 처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었다.
엄마를 떠올리게 했던 양유진.
이성진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결은 비슷하다.
그래서 지영은 피식 웃고는, 이성진을 향해 말했다.
“그래, 잘해봐라.”
“그럼! 아 늦었다! 나간다!”
홱!
바람처럼 현관문을 통해 사라지는 이성진.
그 모습에 지영도 임효중도 피식 웃었다.
“쟤 괜찮겠지?”
“잘하겠지. 넌 오늘 안 나가?”
지영의 말에 임효중은 옆에 세워둔 가방을 들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이제 나가야지.”
“연습이지?”
“응. 넌 안 나가게?”
“응. 난 오늘 밀린 공부 좀 하려고.”
“왜? 데이트 안 하고.”
“지원이 시합이 얼마 안 남았거든.”
진짜다.
다음 주에 양지원의 대회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동생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해서 지영은 오늘은 약속 없이 프리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간이 난 만큼, 지영은 오늘 그동안 좀 소홀히 했던 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집에도 이미 그렇게 말해놨다.
“아아, 그래. 그럼 수고해.”
“응, 연습 열심히 하고.”
“응.”
그렇게 임효중도 나갔다.
혼자 남은 지영은 임효중에게 말했던 것처럼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 가는 걸 잊은 것처럼 공부하다 보니까 어느새 밤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잠시 쉬다가 다시 공부하는데 삑삑삑삑 소리가 들렸다.
임효중이 벌써 왔나 싶어 나갔는데, 이성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풀이 한껏 죽은 얼굴이었다.
‘설마?’
지영은 바로 물어봤다.
“차였어?”
“……응.”
“…….”
“내가 부담스럽대. 그런데 그건 이유가 아닌 것 같아.”
아니, 맞을걸?
얘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까 그럴 만했다.
정소영은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다. 반에서 말도 거의 없는, 그런 친구였다. 병약해 보이는 이미지와 선이 고운 미인이지만 그래도 지극히 평범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성진은?
천재 소리 듣는 운동선수고, 지금은 대한민국 대표 예능 중 하나인 더 런닝에 캐스팅되어 공중파에 데뷔한 연예인이기도 했다.
위치의 차이가 매우 컸다.
정소영은 아무래도 그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심히 이해가 갔다.
‘음,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신발은 벗은 이성진이 터덜터덜 걸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자 지영은 곧바로 난감해졌다. 이런 쪽으로는 지영도 매우 하수였다. 그리고 이건 황금세대 전체가 그랬다.
차였다고 톡방에 올리기도 그래서, 지영은 그냥 일단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이성진의 기행이 시작됐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1교시. 여느 때처럼 수업에 들어간 이성진이 막 교실로 들어오는 정소영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소영아!”
“어, 어?”
“우리 사귀자!”
“……어?”
아…… 미친놈.
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행이라 쓰고, 미친 짓이라 읽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이성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