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34화
134화. 결실의 계절(3)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짧은 데이트로 그 어느 때보다 벅찬 주말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평일.
당연히 평일은 학교에 나가는 날이었다.
수업을 들어가자 반 친구들이 지영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드라마 예인 때문이었다. 예인은 금, 토 이렇게 방영이었고, 주말 간 예인을 본 친구들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달려든 거다.
“지영아, 희수 있잖아, 어떻게 돼? 어?”
“희수가 뭐?”
“아니, 왜! 도언이랑 엄청 싸웠잖아! 막 서로 의심도 하고! 이대로 헤어져? 어?”
“아… 그건…….”
지영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저 질문에 대답하면 스포일러다.
지영이야 스토리 전체를 알지만 이걸 얘기해 주면 과연 기대치가 계속 유지가 될까? 지영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미안, 하고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실망하는 친구들에게 얼른 말을 이었다.
“나 계약서에 시나리오 유출 금지 조항도 있어서, 이거 잘못 말하면 위약금 내야 돼. 그러니 이해해 주라.”
“아! 그런 거라면…… 에잇! 진짜 궁금한데.”
“맞아. 아, 지영아. 그럼 희수가 서건이랑 잘될 가능성은 없어?”
“어?”
도언의 연인이었던 희수가, 서건과 잘될 가능성이 없냐고?
‘있겠냐?’
애초에 서건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걸 제외하면 세상 모든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친구였다. 이성은 물론이고, 먹는 것, 입는 것에도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서건과 희수가 잘될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게다가 희수는 애초에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지극정성.
연인 도언을 위해 정말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여인.
하지만 그런 희수도…….
‘결국 도언을 떠나지.’
좌절과 절망.
질투와 시기.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도언에게 희수는 결국엔 질리고 만다. 그래서 도언을 떠난다.
솔직히 지영은 대본을 보자마자 이해했다.
어떤 여자가 도언 같은 캐릭터를 좋아할까. 도언이 정신을 차린다면 모르겠지만, 도언은 결국 주저앉는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으므로.
결국에는 내려놓게 된다.
욕심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자포자기 심정으로, 힘을 넣지 않고 만든 곡이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그래서 다시금 욕심을 낸다.
하나만 더. 아니, 두 개 정도만 더 성공하면 서건의 끝자락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런 마음 때문에 내려놓은 것 같더니,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가는 연인에게 질린 희수는 결국은 떠난다.
희수가 떠나도 도언은 잡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음악, 서건의 등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낸 앨범은 다시 대실패.
남은 건 빚과 나뒹구는 소주병과 망가진 폐와 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데 정말 중요한 망가진 성대였다.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떠난 도언은 그 끝에서야 겨우, 정말 겨우 다시 회생의 조짐을 보인다.
그게 지영이 아는 예인의 극 후반부 시나리오였다.
이런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있지만 지영은 얘기하지 않았고, 친구들은 그런 지영이 얄미웠는지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수업 시간이 되자 곧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종이 울리자마자 시작된 수업.
지영은 요즘 공부를 조금 소홀히 했기 때문에 수업에 최대한 집중했다. 다행히 친구들이 노트를 빌려줘 진도는 따라잡아 놓아서 그런지 수업을 따라가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렇게 1, 2교시가 순식간에 지났다. 2교시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로 가던 지영은 한 여학생과 어깨가 툭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
지영의 사과에 여학생은 지영을 잠깐 올려다봤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영은 그런 여학생을 돌아봤다.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영의 눈매는 확 좁혀져 있었다.
찰나의 순간 마주쳤던 눈.
‘저 눈…….’
매우 익숙한 눈빛이었다.
회귀 전, 언제나 거울로 보던 자신의 눈빛이었기 때문에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눈이 시꺼멓게 죽은 여학생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지영은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지금 당장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런 눈빛을 또 볼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고작 고등학생에게서 말이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같은 반이었다.
지영과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앉은 여학생.
점심시간이 됐을 때도 지영은 여학생의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그녀는 간혹 웃기는 했다. 하지만 지영이 보기에 그건 만들어진 웃음이었다. 지영이 회귀 전에 그렇게도 많이 보였던 웃음. 이른바, 억지웃음. 난 조금도 웃고 싶지 않은데 주변이 웃으니, 어쩔 수 없이 무리에 끼어들기 위해 따라 웃을 때 나오는. 지영이 봤을 땐 그런 미소였다.
회귀 전 지영이 그랬다. 항상 무표정. 인상 쓰거나, 음울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지영은 당연히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누군가가 재밌는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한테 뭘 말하거나, 물어보면 준비해뒀던 미소를 표정에 씌웠다. 그러면 그래도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하게만 바라보진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낸 인위적인 미소.
거울을 통해 지겹도록 봤었으니까, 이 미소로 그렇게도 사람을 많이 상대했으니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에게 정말 많이 지은 표정이었다.
그래서인지, 지영은 계속해서 저 여학생이 신경 쓰였다.
‘이름은 정소영.’
지영의 기억으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정말 조용히 지내는 학생이었다. 성적은 상위권. 아니, 그 이상이다.
‘한결이보다 조금 아래니까… 전국 최고 수준.’
최소 상위 1%다.
그런 친구의 얼굴치고는 너무 어둡다. 정말 어두워도 너무 어두웠다. 그게 지영의 심기를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송준아.”
“응, 엉?”
“정소영, 쟤. 성적 떨어졌어?”
“소영이? 아닐걸? 우리 반 성적 떨어진 애들 없을걸?”
“그래?”
그럼 성적 때문은 아니고.
“근데 소영이 왜?”
이송준의 질문에 지영은 그녀를 힐끔 보곤 대답했다.
“아니,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소영이? 음, 그래?”
이 친구 눈빛에는 안 보이나 보다.
하긴, 그냥 봐서는 모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무조건 내 생각이 맞다고는 할 수 없지.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다시 마주친 정소영의 눈빛이 지영에게 더욱 큰 확신을 주었다. 동질감. 이제는 벗어났지만 깊고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봤었던 지영이기 때문에, 저 눈빛에 지영은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당장 지영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다시 흘렀다. 처음 정소영의 눈빛을 확인했던 월요일이 지나고, 이어서 찾아오는 화, 수, 목, 그리고 금요일.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교실로 가려는데, 저 앞에 일주일간 계속 신경 쓰인 정소영이 또 보였다. 그 친구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구석으로 교실로 향했다. 월요일보다 훨씬 처진 어깨.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낯빛. 지영은 그게 너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정소영은 지영이 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터덜터덜 걸어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지영. 거의 모든 건물의 옥상은 잠가놓는다. 아파트도 그렇고, 학교는 더욱 그랬다. 옥상을 열어놓으면 불량 학생들의 아지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소영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가 열어 놨었는지, 옥상 문의 손잡이는 가녀린 정소영의 손에 의해 덜커덕 열렸다.
저게 저렇게 그냥 열린다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영은 걸음을 빨리해 문이 닫히기 전 옥상으로 쏙 들어갔다.
지영이 따라 올라오자, 정소영은 그제야 흠칫 놀라더니 지영을 돌아봤다. 그리고 지영인 걸 알고서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 쫌…….’
뒷걸음질.
이게 뜻하는 바가 너무나 명확해서 지영은 양손을 들어 올리는 척을 하다, 냅다 뛰었다. 힉! 하고 놀란 정소영이 뒤돌아서 뛰려고 했지만 이미 그때는 지영이 정소영의 앞을 가로막은 직후였다.
“와, 소영아. 우리 소영이. 잠깐 이쪽 좀 볼까?”
지영의 뒤를 따라온 이성진의 목소리에 정소영이 또 흠칫 놀라더니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지영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긴장했다. 그것도 엄청 긴장한 상태였다.
이성진은 지영이 웬 여학생 뒤를 따라가자, 그게 궁금해서 슬그머니 뒤를 쫓아온 거다. 그런데 갑자기 지영이 뛰고, 그 여학생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도 팔을 벌리고서. 그에 놀라 뒤따라서 계단을 거의 날 듯이 뛰어 올라온 이성진은 현 상황을 단숨에 이해했다.
지영은 이성진과 이성진을 향해 다시 돌아선 정소영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이럴 수가 있나?’
너무 극단적이잖아?
고작 며칠 안 지났다.
그런데 이 친구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지영을 보며, 이성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 표시를 했다. 위해를 가할 뜻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아주 기본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성진도, 지영도 지금 머리가 굳었다.
지영이야 정신연령은 좀 더 높지만, 살면서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지영도 지금 너무 당황스러웠다. 뭔가 불안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이 상황을 예견하고 따라온 게 절대 아니란 뜻이었다.
“소영아? 자, 우리 진정하자. 응?”
“…….”
이성진이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다독였지만, 정소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영은 그 틈을 타서 폰을 꺼내, 한은정과 강한결에게 바로 톡을 보냈다. 선생님을 부를까 했지만 지영의 생각에 선생님보단, 한은정과 강한결이 이 상황에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담임 정수아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지금은 그냥 둘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연락받은 친구들이 옥상으로 오기까진 좀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시간을 끌…….
“어! 어어! 소영아 안 돼!”
갑자기 정소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두 사람의 중간지점, 난간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육상선수들보단 못해도, 작정하고 달리면 100M를 12에서 13초대는 끊는 준족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용을 써도 정소영이 둘을 따돌릴 가능성은 없었다.
지영은 바로 정소영을 잡았다.
미안하지만, 끌어안듯이 뒤에서 안아 꽉 잡았다.
“소영아, 진정해.”
“으으, 으으으!”
지영에게 안긴 정소영은 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지영은 정소영을 꽉 안은 채 놔주지 않았다.
“소영아, 왜 그러냐!”
“놔, 놔줘…….”
이성진의 말에 정소영은 간절한 기색으로 둘을 향해 흐느끼며 말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눈빛. 딱 봐도 매우 위험한 눈빛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때마침 연락받고 올라온 한은정. 강한결. 그리고 황석과 임효중. 연희고 아이돌과 한은정이 전부 올라오자 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끔뻑끔뻑, 지영이 정소영을 꽉 안고 있는 걸 본 친구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설마 성추행?
그럴 리가.
성추행하려는 놈이 친구들을 부를 리는 절대 없었다. 해명해 주면 되는데, 민감한 문제라 이걸 바로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이성진을 보니 그도 같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일행에는 강한결이 있었다.
고개를 갸웃했던 강한결이 곧 표정을 굳혔다.
“지영아, 이거…….”
“어,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음…….”
침음을 살짝 흘린 강한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은정도 아,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다행히 눈치는 다들 좋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대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다 같이 다가오지 않고, 임효중과 황석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섰다.
가까이 다가온 한은정을 보며 지영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
그러자 한은정이 정소영을 가만히 안았다. 그러자 풀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정소영.
“흑, 흐윽. 흐아앙……!”
“응, 괜찮아. 괜찮아.”
서러운 울음.
너무 갑작스럽고, 내막을 몰라 속이 절로 답답해졌다. 특히 똑같이 울기 직전의 이성진을 보면서, 더욱 답답해졌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아픔이 교차하고 합쳐지는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