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22화
122화.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1)
시상식 직후, 강한결은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검사 결과 다행히 몸에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밤사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나쁜 기운은 다 빠져나갔고, 회복만 남은 상태였는데 제대로 먹지를 못해 생긴 컨디션 난조였다. 그래서 수액을 맞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챙겨 먹은 뒤 푹 자고 일어난 강한결은 바로 살아났다.
다음 날은 관광이었다.
베가 제약의 신약으로 인해, 이제 슬슬 대여행시대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는 마당이라,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여행객으로 북적거렸다.
하루 간의 짧은 단체 관광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지영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우와아!
입국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카메라 세례와 함께 함성이 들린 거다.
깜짝 놀라 뭔가 봤더니, 기자들과 사람들이 모여서 유도팀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피켓에는 지영을 포함한 연희고 아이돌에 대한 문구가 적혀 있어서 솔직히 좀 얼떨떨했다. 그래서 그렇게 얼어 있는데, 이런 쪽으로는 그나마 경험이 많은 전기정 교수가 앞으로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팬들이 전해준 선물을 받아서 공항을 나섰는데 뭔가 느낌이 묘했다.
“이야, 연희고 아이돌이랑 있으니 이런 일도 다 겪어본다. 하하.”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 전기정 교수의 너스레와 함께 버스가 출발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서울의 호텔에서 하루 쉬고, 다음 날 해산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가벼운 환영식과 회식이 있었고, 늦은 시간에 잠든 지영은 정말 오랜만에 오전 늦게야 일어났다.
장시간 비행도 비행이지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땅이 주는 안정감에 긴장이 풀려 정말 늘어지게 잤다. 거의 10시간. 시합이 끝난 다음 날도 이렇게까진 자진 않는데 진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지쳐 있긴 했던 것 같았다.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고, 짧게 해단식을 하곤 청주로 내려왔다.
임대성 코치가 픽업을 와서 내려갈 땐 그래도 편하게 내려갔다. 학교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4시쯤이었다.
교무실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그리고 짐을 풀자 또 저녁 시간이었다.
지영은 저녁을 먹고 나서야 이제 좀 시간이 나서, 다시 이곳저곳 연락을 돌렸다.
“토요일, 일요일 시합. 월요일은 관광했고, 화요일 날 한국에 도착했으니 오늘은 수요일. 주말은 음, 촬영이구나.”
스케줄을 확인한 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쉴 시간이 없었다. 보통 시합이 끝나면 최소 일주일은 거의 훈련도 없이 휴식이다. 하지만 지영은 벌려놓은 판이 많아서 쉴 시간이 없었다. 일단 주말에 바로 예인으로 살어리랏다의 촬영이 있었다.
드라마 예인은 벌써 촬영이 시작됐다.
이주 전부터 시작됐는데, 지영은 시합이 있어서 아직 한 번도 촬영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것도 제작진 측에서 지영의 편의를 많이 봐준 거기 때문에 지영은 그 부분엔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촬영에 피해를 주기 싫어 몸이 피곤하지만 장민주 작가가 보내준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다.
한참 그렇게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이선영. 지영은 눈을 비비면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누나.”
-올 연예인. 이젠 공항 패션도 화제가 되던데? 여심 훔치는 운동복 핏? 푸하하!
“……놀리려고 전화했어요?”
-겸사겸사지! 보고할 것도 있고.
“그 양궁 한다는 친구들요?”
-응. 일단 오늘 둘 다 만나서 지원 확정했고, 이제 법적인 조치 들어갈 거야.
“그 누나도 찾았고요?”
-고럼! 사람 찾는 게 이 누나 전문 아니겠니? 걱정하지 마. 잘 풀릴 때까지 딱 보고 있을게.
“네, 고마워요.”
다행이다.
실력이 있는 천재들이 가정사 때문에 운동을 못 하는 이런 상황 때문에 굳이 힘든 길을 자처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명씩 지원해 줄 때마다, 확실히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역으로 풍족해지는 것도 좋았다.
이선영과 통화를 끝낸 지영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복습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금요일 저녁에 바로 서울로 향한 지영은 처음으로 촬영 현장을 찾았다.
저녁 늦게 도착한 드라마 촬영장은, 예능 촬영장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예능 촬영장은 그래도 좀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는데, 이곳은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스태프가 움직이는데도 소란스러운 느낌보다는 중압감이 먼저 느껴졌다.
‘이런 곳이구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서 지영은 촬영장의 분위기를 기억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아, 거기!”
“…….”
“야, 너 인마!”
“네? 저요?”
“그래 너! 바빠죽겠는데 멍 때리지 말고 이거 옮겨!”
“……네.”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그런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영은 그냥 얌전히 그 사람이 건네준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짐은 크게 무겁지 않았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짐을 옮기고 나자, 촬영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뭔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더니 이연과 장민재가 나와 연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연기 시작 전이구나.’
지영은 한쪽으로 나와 마주 보고 선 둘을 가만히 지켜봤다.
사실 오늘 온 이유 중의 하나가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배우기 위한 것도 있었다. 장민주 작가가 직접 픽해주면서 그냥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연기하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쉽겠나. 카메라에는 익숙해서 그 앞에서도 떨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런 자신감과 연기는 달랐다.
그래서 솔직히 지영은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자 조용! 슛 들어갑니다!”
조연출의 외침에 가뜩이나 조용하던 공간이 더욱 조용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조용해지자, 장민재와 이연이 서로 마주 보고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장민주 작가에게 물어본 뒤 무턱대고 찾아와 오늘 어떤 부분을 촬영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감정을 잡는 걸 보니, 평범한 신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뒤, 박지상 감독이 액션을 외쳤다.
그러자 시작부터 이연이 장민재의 뺨을 확 때렸다.
짝!
“의심할 걸 의심해야지. 어떻게 그걸 의심해? 뭐? 잤냐고? 그게 지금 남자친구란 놈 입에서 나올 소리야?”
“그럼…… 왜 갔는데. 왜 그놈 집에 찾아갔는데!”
뺨을 맞은 장민재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이연에게 소리쳤다. 이연은 그런 장민재를 가만히 바라봤다. 장민재가 맡은 도언이 불이라면, 이연이 맡은 희수 역은 물이다. 불같은 도언을 물로 적셔주는 존재가 바로 희수다.
“물어보러 갔어.”
“뭘! 뭘 물어보러 갔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잠결에 쓴 곡으로 세상을 이렇게 떠들썩하게 만드는지. 그거 물어보려고 갔어! 너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는 걸 그 애는 왜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찾아갔어!”
“……뭐라고?”
“그냥 그런 게 궁금했다고! 나는 네가 정말 잘됐으면 좋겠는데! 안 되니까!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날 너무 힘들게 하니까! 그래서 찾아갔어!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빌려고 했어!”
“넌…… 넌 나를 못 믿어? 그리고 누가 그런 게 필요하대? 없어도 돼! 네가 알아서 잘할 수 있다고!”
희수의 악을, 도언도 악으로 받아쳤다.
그걸 보며 지영은 이 신이 전에 이연과 리딩을 했었던 신 이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건을 찾아왔던 희수.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 도언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열등감에 휘말려 희수에게 폭언을 쏟는 장면이었다.
이 드라마는 예술 드라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예술에 미친 인간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인 게 바로 예인이었다.
예술, 어디까지 미쳐봤니?
보다 보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떠오를 정도로 예술에 미친 인간들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작품이었다. 그래서 극 중 주인공인 도언은 결코 멋있지 않았다. 오히려 열등감, 패배감, 독기, 그런 것들을 두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물론, 초반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초반엔 도언도 천재로 나왔다. 하지만 그런 도언의 천재성은 사회에 나와 음악에 제대로 발을 들이면서부터 바로 깨져나갔다. 세상은 넓고, 자신보다 더한 천재들이 판을 치는 세상. 날고 긴다 하는 천재들의 세상에서 도언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아니, 평범보단 조금 더 나은 수준.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패배감이 조금씩 차지하게 된다. 또한 패배감의 옆에 열등감이 생기고, 그 두 감정 때문에 캐릭터가 무너지지 않게 그 중심을 차지한 게 바로 독기다.
독기가 있어야 캐릭터가 붕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컷!
“다시 한번 해볼게요!”
장민재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크게 외쳤고, 박지상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에게 시선을 줬다. 후우, 이연은 눈을 감고 다시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시작.
액션 사인에 좀 전에 토해냈던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토해내는 장민재. 아니, 도언. 그 모습에 소름이 좀 돋았다. 장민재 배우의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건 그가 나온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었다.
데뷔 후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탄탄대로를 달린 장민재는 캐릭터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완벽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저런 게 배우구나.’
역시, 지영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단했다.
장민재의 찌질함, 열등감이 깃든 저 눈빛도, 그런 눈빛을 받아들이면서 슬프지만 화가 났다는 느낌이 선명하게 보이는 눈빛으로 서로 대사를 쳤다.
컷!
“좋습니다!”
박지상 감독의 컷 사인과 외침이 있고 나서야 길게 숨을 토해내며 감정을 다잡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지영은 정말이지, 엄청 대단하게 보였다. 두 배우는 이어서 좀 전에 촬영한 신을 확인했다.
솔직히 지영도 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저기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나도 볼 수 있으니까.’
신기한 경험이 되겠다 싶었다.
지잉, 지잉. 전화가 와서 꺼내 보니 임은진이었다.
“네, 누나.”
-촬영장 도착했어?
“네. 지금 촬영장이에요.”
-그래, 나 지금 출발했거든? 1시간이면 도착해.
“네, 그럼 저는 더 구경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답하고 전화를 끊은 지영은 다시 촬영장을 바라봤다. 그사이 스태프들이 다시 분주히 움직이면서 뭔가를 세팅했다. 지영은 잘 알지도 못하는 물건이라서 저게 뭐지? 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았다.
20분쯤 걸려 다시 세팅이 끝나고, 두 배우가 다시 섰다.
그리고 찍은 건 같은 장면이었다.
조명과 소품 몇 개를 추가하고 바꿔서 다른 느낌으로 찍는 것 같았다.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전무한 지영의 눈엔 뭔 차이지? 싶었지만 이건 자신이 굳이 고민할 영역이 아니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예술성을 살리게 마련이다.
소품, 빛, 날씨마저도 통제해서 자신의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러니 그걸 알아보는 눈이 없는 지영은 이걸 굳이 자신이 고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깔아둔 판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감독이 원하는 대로.
지영은 자신의 역할이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저 배우들처럼 작품에 엄청난 애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작했으니 무탈하게 끝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좀 준비를 하고 싶은데…….
‘왜 대본을 안 주시지?’
이미 대본이 꽤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지영은 오늘까지 아직 내일 자신이 어떤 신을 찍게 되는지도 몰랐다. 왜? 대본이 없었다. 전달이 안 된 게 아니라, 아예 주지 않았다. 실제로 장민주 작가는 지영에게 대본은 아주 늦게 줄 거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란 말과 함께 당장 내일 촬영인데 지금까지도 대본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끝이었다.
50분 만에 도착한 임은진의 손에는 펄럭이는 노트 같은 게 들려 있었는데, 그게 바로 왜 자신에겐 아직도 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대본이었다.
지영은 바로 임은진과 함께 미리 잡아준 숙소로 향했고, 처음으로 자신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가 담긴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곧,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