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07화
107화. 연기의 세계(4)
회식.
지영도 회식에 참가했다.
죽어라 마셔라! 부어라! 하는 회식 자리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회귀 전 코치를 할 때 몇 번 회식에 참석했기 때문에 보통 이 자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회식과는 결이 달렸다. 학교 회식은 그래도 좀 차분한 맛이 있는데, 이곳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자, 건배!”
“건배!”
째앵!
지영의 뒤쪽,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앉은 자리는 시작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감독과 작가의 말이 있는 직후부터, 그냥 달리기 시작했다. 왁자지껄을 넘어, 배우들은 자신이 가진 개성을 가감 없이 내보이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서 뭔 개성이냐고 하겠느냐마는, 진짜 있긴 있었다.
“야, 여옥아. 너 이번에 제이티 쪽 작품도 들어간다며?”
“네? 아아, 그거요. 그건 비중 별로 안 돼요. 그냥 몇 번 나가는 정도?”
“그래도 그게 어디냐? 여윽시 전여옥이, 살아 있구만?”
“에이, 오빠도 이 작품 끝나자마자 영화 연달아 들어간다면서요? 살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오빠 같은데?”
“그거 그냥 카메오야, 카메오! 거기 정구 형이 한 번만 나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거지!”
“치, 그러면서 신은 다 스틸 할 거면서? 됐고, 술이나 줘요.”
“오! 줘야지! 그럼! 우리 여옥이가 달라는데! 하하!”
전여옥.
아까 제자를 무자비하게 까던, 히스테릭의 끝판왕인 서양화 교수 역을 맡은 배우님이었다. 주연부터 시작해 결혼 후 잠시 커리어가 끊겼다가, 지금은 다시 주연, 조연할 것 없이 굵직한 자리에 출연하는 배우님이었다.
그리고 그 앞엔 고창선 배우님.
사투리와 푸짐한 몸이 인상적이지만 연기력으로는 그 누구도 까기 힘들다는 조연배우였다. 그런 둘은 친한지, 자리에 앉은 이들을 주도하면서 회식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정말 대조적으로 지영의 자리에는 미성년자 신인 배우들과 술을 전혀 안 한다는 이연이 앉아 있었다. 지영의 테이블엔 아까 전여옥에게 신나게 깨진 배우와 이연까지 해서 세 명이었다.
그래서 정말, 조용조용했다.
하지만 지영은 오히려 이게 좋았다.
“저…….”
다들 조용한 성격들이다 보니, 여긴 아예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했다. 그런데 그 침묵을 못 참겠는지 이연의 옆에 앉아 있었던, 아까 전여옥 배우님에게 영혼까지 썰리던 동갑내기 배우가 말문을 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라고 해서, 누구를 부른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선을 보니까 자신 같았다.
“그, 저번 주에 더 런닝에 나온 그 게스트분들이랑 친구죠?”
아, 내 얘기 맞구나.
지영은 고기를 굽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은 학교 운동부 친구들이에요.”
“혹시…… 소속사 있어요? 아! 그…… 저희 실장님이 물어봐 달라고 해서…….”
강한결, 이성진, 그리고 임효중.
이 셋에게 관심을 가진다? 생각해 보니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저번 주는 지영이 봐도 정말 간만에 재밌게 나온 화였다. 특히, 그중 포인트가 스파르타! 로 유명한 가수 겸 방송인 김종권을 강한결이 10분간의 사투 끝에 이름표를 뜯어낸 게 포인트였다.
그리고 그게 포인트였다면 하이라이트는, 이성진이었다.
힘이 잔뜩 빠진 강한결의 이름표를 고생했어, 하고 안아주면서 촤아악! 뜯어내는 배신을 막판에 보여주며 최종 우승을 달성했다. 이성진은 애초에 스파이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게 하이라이트는, 강한결의 이름표를 뜯으며 세상 해맑게 웃던 이성진의 미소였다.
완전 뭐, 갑자기 예능을 순간적으로 호러로 뒤바뀌어 버렸을 정도의 미소였기 때문에 방송을 보던 지영도 순간 으슬으슬한 기분을 느꼈을 정도였다.
지영이 그랬던 만큼, 방송 직후 반응은 정말 좋았다.
오죽하면 배신 기린이 빠진 후 아직도 공석인 자리에 이성진이나, 강한결 둘 중 하나를 넣자는 의견까지 게시판에 올라갔을 정도였다.
배신 기린만큼의 소름이 끼치는 배신을 보여준 이성진.
그리고 천하의 김종권을 제압한 강한결.
둘 중 누구든 한 명 넣자는 의견이 올라왔을 만큼 저번 주 친구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러니 이런 관심이 쏟아질 만도 했다.
하지만.
“죄송해요. 더 런닝에 나갔던 친구들이랑, 저랑 석이까지 전부 장세리 선배님 회사 소속이에요.”
“아…… 네.”
아쉬운 표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실장이 물어보라고 시켜서 물어본 거지, 자신이 궁금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다시 조용히 고기를 굽는데, 이번엔 이연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여기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 이 자리에 앉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여기로 온 이유를 모르겠다.
“음, 지영 씨?”
“네. 선배님. 편하게 해주셔도 돼요.”
“그럴까? 음, 지영이는 연기 누구한테 배웠어?”
“장민주 작가님이 보내주는 자료로 배웠어요.”
“장 작가님이? 직접 보내주셨어?”
“네. 참고하라고 보내주신 영상이나 대본으로 연습했어요. 그리고 그거 찍어서, 도로 보내드려서 검사받고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영은 실제로 연기연습 전부를 장민주 작가가 따로 보내주는 영상이나, 지문 등을 보면서 연습했다. 그리고 그걸 친구들이 찍어 다시 보내서 검사받고 그랬다. 사실 이런 상황은 굉장히 특수했다. 배우의 연기지도를 연출이 하는 경우는 있어도, 작가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와…… 부럽다.”
그걸 알아서, 좀 전에 질문을 했던 동갑내기 여배우, 이지연의 말에 지영은 좀 난감해져 따로 반응하진 않았다.
“그럼 작가님이 직접 픽한 거예요?”
그랬는데, 이지연은 재차 그렇게 물어왔다.
그런데 이번 질문은 대답하기 살짝 애매했다. 애초에 그 배역은 지영을 염두에 두고. 아니, 지영을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왜 자신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 대답하기 살짝 곤란했다.
어쩌면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까 내가 물어봤는데, 맞대.”
그런 지영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이연이 대신 대답해 줬다.
“와…… 그건 더 부럽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대답했더니, 이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민주 작가님이나, 박지상 감독님은 캐스팅에 정말 신중한 분들이야.”
좀 전에는 도와줘 놓고, 지금은 곤란하게 하네?
그래서 지영은 그냥 고기만 굽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연이 조용히 웃었다.
“아까는 굉장히 날을 세우더니, 지금은 또 다르네?”
“……그러게요. 선배님도 생각보다 짓궂으시네요. 원래 그런 성격이세요?”
“나? 그럼. 나 유명해. 놀려먹는 성격으로. 그거 내 이름 쳐보면 내가 애들한테 어떻게 장난치는지 다 나오는데. 안 쳐봤나 보네?”
“…….”
그럼, 굳이…….
성격 등을 찾아보긴 했지만 지영은 어차피 배우는 거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생각하는 편이라 실제로 믿진 않았다. 그래서 연기에 대한 자세를 중점으로 찾아봤다. 그래서 이런 성격인지는 정말 몰랐다.
“너는 알지, 지연아?”
“네, 언니…….”
“너랑 나랑 붙는 신 많으니까. 아, 이번에도 너무 재밌겠다.”
“…….”
이지연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스쳐 갔다.
막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은 건 아닌데, 이 언니의 장난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이었다.
지영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좀 더 있다가 가라고 말렸지만, 지영에게는 탈출에 아주 용이한 카드가 있었다. 바로 얼마 뒤에 있을 시합이었다. 시합 준비 때문에 가야 한다고 하자, 다들 아쉬워하면서 나중에 보자는 말로 배웅을 해줬다.
그렇게 연예계 첫 회식은 끝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또 다른 숨김 카드인 선동일 배우님이 오셔서 그날 회식은 광란의 밤으로 이어졌다는, 그런 후문이 있었다.
* * *
훅, 후욱!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시합까지 1주일.
지영은 막판 체중 감량을 막 시작했다.
73을 한 번 찍은 게 2주 전이다.
그리고 다시 76까지 올렸다가, 1주일이 남은 지금 다시 감량을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주말.
오전까지는 훈련을 했고, 오후는 휴식이지만 지영은 저녁을 좀 챙겨 먹기 위해 땀복을 챙겨 입고 트랙을 뛰었다. 총 20바퀴. 없는 체력으로 쥐어짜 내 달려서 그런지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이게 힘들다.
감량은 진짜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중학교부터 시작해 벌써 5년 가까이 감량을 하는데도 진짜 조금도 적응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할 때마다 더럽게 힘들었다.
“아으……! 죽겠다아…….”
지영과 같이 달린 이성진이 뒤늦게 20바퀴를 채우고는 옆에 대자로 쭉 뻗었다. 한 바퀴 정도 처졌던 이성진이 들어오고 나서야, 지영은 숨이 좀 돌아오는 걸 느꼈다. 솔직히 숨이 차는 것도 차는 건데,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나른한 게 더욱 힘들었다.
지영은 이성진과 함께 잔열로 땀을 마저 빼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땀에 완전히 젖은 옷을 벗어서 세탁기에 넣고 체중계에 올라가 보는 지영. 74, 5. 딱이다. 저녁으로 적어도 500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워까지 하고 나와, 에어컨을 틀어놓은 거실에 다시 드러누운 지영.
만사가 귀찮다.
온몸에 진이 빠져나간 것처럼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천하의 지영도 감량은 답이 없었다.
“어으…….”
지영의 옆으로 비슷한 꼴의 이성진이 누웠다.
“지영아…….”
“응…….”
“나랑 체급 바꿀래……?”
“…….”
체급을 바꾸자고?
그건 곧 지영에게 유도를 그만두란 소리였다. 지금도 감량으로 죽겠는데, 66은 아예 뛸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아, 뛸 수는 있을 거다. 근육을 전부 포기하고 그냥, 계속 다이어트를 한다면.
대신 성적은 박살이 날 거다.
물론 이성진도 하도 힘들어서 그냥 개소리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아마 유도 그만두면…… 감량 때문일 거야.”
“…….”
지영은 이성진의 앓는 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시합 때마다 가장 많은 체중을 빼는 게 이성진이고, 언제나 이런 곡소리가 나기 때문에 사실 해줄 말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영도 뭔 말을 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영은 누운 채로 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장민주 작가에게 참고할 영상이 와 있었다. 지영의 첫 촬영은 시합 뒤다. 시합이 끝나고 3일 뒤, 그때가 지영의 첫 촬영이었다. 지영의 분량이 크게 많지 않고, 운동선수라 나름 편의를 봐줘서 그렇게 일정이 잡혔다. 물론 시합이 끝나면 평일에도 촬영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이미 많은 편의를 입었는데, 더 바라는 건 진짜 양아치였다.
“나 연습하러 간다.”
“이번 드라마?”
“응.”
“알았다. 수고해. 이따 저녁 먹으러 갈 때 부를게.”
훠이훠이.
이성진의 손짓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온 지영은 노트북으로 영상을 재생시켰다. 이번엔 외국 배우였다. 뱀파이어 영화로 유명한 남자배우. 퇴폐미가 물씬 느껴지는 메이크업과 의상, 그리고 연기.
지영을 그걸 한차례 돌려보고 첨언을 확인했다.
[따라 하진 말 것. 느낌만 익힐 것.]
아, 오늘은 연습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영상을 시청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눈빛, 시선 처리, 손짓과 발짓 등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입력이 됐다. 그게 한 90% 정도 입력이 됐을 때 이성진이 불러 저녁을 먹고 왔다.
그럼 다음은?
이번엔 다른 영상 시청이었다.
지난 2주간, 솔직히 물리게 봤던 영상들이다.
대한유도회에서 보내준 지영의 상대 시합 영상이었는데, 전부 있는 건 아니었다. 영상은 드문드문 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됐다.
지영의 첫판 상대는 헝가리 선수였다.
유럽 선수답게, 피지컬을 베이스로 한 체력 유도가 특기인 선수였다.
이걸로 한 오십 번은 돌려봤는데, 이 선수는 딱히 약점이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강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업어치기부터 허리기술, 그리고 발기술까지.
전부 평범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근력이 딱 봐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대로 걸리면 무조건 한판이겠네.”
이런 선수한테 제대로 잡히면, 꼼짝없이 날아간다. 특히 뒤로 치는 덫걸이 같은 건 절대 걸려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뒤를 노리는데, 반대로 그걸 막으면 앞쪽은 별로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것 말고도 조심해야 할 게 있었다.
바로 개최지 버프다.
이번 개최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다.
헝가리가 개최지인 만큼, 아마 심판의 판정이 그쪽에 훨씬 유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지영은 그냥 3할쯤은 자신이 판정에서 불리하겠구나란 생각을 가졌다.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하고 가는 게 그냥 속 편했다.
“괜찮아. 어차피 그건 익숙하니까.”
이석도 회장 때문에 진짜 말도 안 되는 판정을 몇 번이나 받아본 만큼, 지영은 이미 그런 쪽으로는 익숙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절대 이견이 없는 한판을 던지면 된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충분히 있는 지영이었다.
연기로 한동안 바빴지만, 지영은 훈련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준비가 부족했다면 자신감이 떨어졌겠지만, 지영은 반대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기에 자신감이 팽팽하게 차 있는 상태였다.
노리는 건 입상?
아니다.
우승이었다.
시간이 후루룩, 국수 말아먹듯이 지났고, 지영은 친구들과 함께 중유럽의 헝가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