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06화
106화. 연기의 세계(3)
희수는 서건을 착잡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비결이 뭐야?”
“무슨 비결?”
“잠결에 그런 곡을 쓰는 비결.”
“글쎄……. 그런데 이 세계에 비결이란 게 있어?”
나른한 목소리.
거만하지 않다. 그냥 나른한 목소리다.
잠이 깨지 않았으니까 나오는 그런 목소리다.
희수는 그게 더 화났다.
저런 잠결에, 그는 곡 하나를 만들어 지금 한국을 뒤흔들고 있으니까.
그가 사랑하는 남자 도언은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음악만 생각한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니, 어쩌면 그 순간조차도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음악뿐일 거다. 그런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과정을 거친 뒤에 나온 앨범은 망했다.
하지만 눈앞에 이 사람, 예전에 우연히 연이 닿은 서건은 달랐다. 그냥 자다 일어나서, 잠결에 흥얼거리며 만든 곡 하나는 현재 그녀와 그녀의 남자가 사는 세상을 강타하고 있었다. 수개월의 고된 노력이, 천재의 1시간의 잠결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희수는 찾아왔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곡을 만들 수 있는지.
그녀는 그의 노래가 단순히 천재 ‘서건’이란 인간의 이름값 때문에 흥행한 게 아님을 알았다. 그의 노래는 좋았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그의 보이스와 어우러져 정말 듣기 좋은 감미롭고, 부드러운 노래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거센 폭풍을 충분히 일으킬 만한, 그런 노래였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천재의 작곡을.
어떻게 해야, 이런 곡이 써지는지를.
그런데 이 남자는 오히려 자신에게 묻는다.
“그런 게 있으면 나도 알려줘.”
“……놀리는 거야?”
“아니. 몰라서 그래. 정말. 예술에 편법이 언제부터 존재했어? 비결이란 게 전승되어오던 곳이었어? 혹시 진짜 있으면 나만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알고 싶어.”
“…….”
“알면 나도 알려줘.”
“…….”
천재의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재가 모르면, 그런 건 없다는 뜻이고.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그걸 자신이 알고 있을 수 없으니까.
부조리하다 세상은.
이런 인간이 존재하기에.
* * *
짧은 대사였다.
하지만 모두 음, 하면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중 서건은 천재다.
그것도 타고난 천재.
대중가요, 클래식, 미술, 서예, 전통음악과 창소리, 심지어 소설까지 집필하는.
예술에 관해서는 완전무결한 천재다.
단순히 와! 재능있다가 아닌 명사와도 비견될 만한 실력을 고작 20대에 갖춘 말 같지도 않은 캐릭터다.
그런 천재는 사이코 같지만, 실제로 사이코는 아니었다.
그는 그냥 뭐든지 잘했고, 그래서 뭐 하나에 크게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천재의 시간은 남과는 다르게 흐른다고들 한다.
똑같은 선생에게, 똑같이 시간을 들여 배워도 누군가는 1에서 2를 배우지만, 서건만 홀로 9에서 10을 배운다. 배운 걸 활용하고 응용하는 경지를 넘어 창작의 영역까지 뻗어가는 천재성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술은 끝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에, 어느 순간 멈춰 서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수년에서 수십 년은 빠르게 그곳에 도달한 서건은 흥미를 잃고, 이어서 재미마저 잃는다.
그런 수순의 반복.
노래도, 작곡도, 작사도.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기타도, 드럼도.
서예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소설 집필도 그랬다.
모든 게 그랬다.
몰두하고 집중하면 그 누구보다 한계의 영역에 빠르게 도달하는 캐릭터.
그렇기에.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
그렇기에, 신기루다.
서건은 그런 신기루 같은 캐릭터라고 이곳 모두가 정의 내렸다.
하지만 지금 지영의 연기는 신기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간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이 배역이 어려운 거다.
“음, 이건 누가 해도 쉽지 않겠는데?”
한 중견 배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캐릭터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 언저리다. 그러니 당연히 젊은 배우가 맡아야 했는데, 이런 독특하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캐릭터를 본인의 연기실력만으로 살릴 만한 배우는 거의 없었다.
조금만 어긋나도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에서 이탈하고 마는.
서건의 캐릭터는 그랬다.
그래서 지영의 연기는 당연히 캐릭터의 전부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영을 타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들도 연기 고수들답게 이 캐릭터가 얼마나 소화하기 어려운지 딱 한 번 주고받은 합으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이건 배우가 문제가 아니었다.
캐릭터가 문제였지.
“맞아요. 류아인을 데리고 와도 쉽지 않겠어요.”
“아인이면 하긴 할걸? 그리고 걘 이런 배역 많이 맡아봤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하하, 미안.”
그런 두 중견 배우의 대화가 지영의 귀에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했던 이미지가, 구체화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연습할 때와는 다르게 어떻게 보면 실전인 지금, 생각해 뒀던 이미지가 제대로 표현이 되질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장민주 작가가 웃으며 지영에게 말했다.
“왜, 잘 안돼요?”
“네. 생각보다 이미지만큼 안 나오네요.”
“이미지?”
“네, 장면을 이미지처럼 만들어서 연습했거든요.”
“아아.”
장민주 작가는 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박지상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은 작가, 한 사람은 연출이다. 둘 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구현하는 쪽으로 특화되어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배우들은 거의 전부가 그랬다.
스포츠에서 흔히 나오는 단어인 이미지 트레이닝의 진짜 찐고수들이 바로 이 바닥의 전문가들이었다.
“지영 학생.”
“네. 감독님.”
“보통 운동선수들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어떻게 하나요?”
박지상 감독의 질문에 지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했다.
“비슷할 걸요, 배우님들이랑.”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상대가 정해지면, 그 선수의 시합 비디오를 돌려봐요. 업어치기가 주력 기술인지, 허리기술이 주력 기술인지 파악하고, 그다음은 힘이랑 체력, 반사신경, 기술 속도 등의 피지컬 부분을 봅니다. 그리고 어느 기술에 약한지도 확인해요.”
“그런 다음에는요?”
리딩 중인데, 운동선수의 얘기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듣는 박지상. 그리고 장민주 작가. 그런데 어느 순간 다들 조용히 지영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느끼며 지영을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상대의 데이터가 나오면, 그 데이터를 토대로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요. 그다음 상대의 기술을 방어하고, 상대를 넘기는 트레이닝을 반복해서 해요.”
“그럼 시합 때 딱 그대로 진행돼요?”
박지상 감독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잘 안 되는 경우가 사실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지 트레이닝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럼 안 되면, 어떻게 시합을 풀어가요?”
“이미지 트레이닝이 도움이 안 되면, 본능이죠. 그간 내 몸에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승부를 봐요.”
“바탕이라. 그렇겠네요. 결국에는 실력이 승패를 가르는 전부니까.”
“네.”
어쩌다 운이 안 좋아서 훅 날아가는 걸 빼면.
그리고 더러운 외압이 끼어드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스포츠는 서로의 기량 차이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걸까?
‘그걸 아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되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지상이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신 해볼게요. 지영 학생. 연기 어려울 것 없어요. 발음 신경 쓰지 말고, 대사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읽어봐요. 지영 학생 목소리랑 캐릭터가 잘 맞아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워…… 너무 편애 아닙니까, 감독님!
한 배우의 외침에 박지상 감독은 전에는 쓰지 않았던 안경을 고쳐 쓰며.
“여러분들은 지금처럼 어렵게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하하.”
“이거…… 장민주 작가님 픽이 아니라, 감독님 픽이었습니까?”
“제 의견도 들어갔죠. 자자, 얼른 리딩 끝내고 회식하러 갑시다.”
배우들의 항변을 그렇게 잠재운 박지상이 다시 대본을 들고, 신을 지정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 파티에 아르바이트를 온 도언은 파티에 참석한 서건을 발견했다. 평범하게 입었지만, 그 속에서도 빛이 나는 서건. 평소 존경하는 대선배가 그에게 친절하게 구는 걸 본 도언은 서건에 대한 질투가 폭발한다.”
박지상이 지문을 전부 읽자, 상대 배우인 장민재의 입이 열렸다. 그사이 고요해진 리딩장의 흐름 속에, 날이 선 장민재의 목소리가 지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너는 왜 다 잘하냐?”
“누구?”
“왜 넌 다 잘하냐고. 누군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 죽겠는데. 왜 넌 다 잘하냐고…….”
“…….”
“죽을 둥 살 둥 해도 안 되는데, 왜 넌 다 되는데?”
“자기소개가 먼저일 것 같은데.”
“나? 천재께서 잠결에 만든 음원 하나에, 1년의 노력이 모조리 끝장난 사람!”
질투와 분노로 점철된 사람.
서건의 시선에 도언은 그렇게 보여야 했다. 도언이 서건에게 가진 열등감이 폭발하는 장면이지만, 서건은 그런 도언을 오늘 처음 본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도언에게 서건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일은, 서건에게는 너무 흔해 빠진 일이니까.
예술에 목을 매단 이들은 이런 감정을 터뜨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지영은 장민재를 정말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열등감이 베이스인 질투로 점철된 눈빛으로 그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장민재의 연기에 지영은 보조를 맞춰야 했다.
“씹냐? 씹어? 왜, 나 같은 건 상대할 가치도 없어? 그래서 그래?”
“…….”
지영은 계속해서 대사를 치는 장민재를 빤히 바라봤다.
실제로 지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무반응. 그냥 응시만 할 것. 감정 없이. 별 세 개. 이런 식으로. 지영은 자신이 구상했던 도언의 이미지와 비슷한 장민재를, 마찬가지로 자신이 구상해 놓은 서건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딴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
클래식이 흐르는 파티장.
당연히 크게 고성을 지를 수 없으니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던지는 장민재의 대사는, 지영의 귀에 정확히 안착하면서 그의 몰입도를 높여줬다. 지영이 구상한 이연의 희수. 그리고 도언의 민재. 둘 중 더 이미지가 맞는 건 장민재였다. 그래서 지영은 좀 더 편하게 그의 연기를 받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뒤이어진 애드리브가, 지영의 눈빛을 대번에 바꾸어버렸다.
“부모 잘 만난 덕에……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시작하니까 네가 이긴 것 같지? 그치? 승리자 같고, 막 그렇지?”
“…….”
이건 애드리브다.
지영이 받은 대본 속에는 이런 대사가 없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장민재의 대본에도 없을 거다.
“선생 잘 만나고,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 받고! 모두가 널 떠받들어주며 챙겨주니까! 그래서 우리 같은 인간들은 꿈에서도 한 번 받길 원하는 그런 기회를 밥 먹듯이 받아서 성공하니까 막 네가 다 가진 것 같지?”
“…….”
지영은 선택해야 했다.
이 애드리브를 듣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받아칠 건가.
‘의도된 애드리브인가?’
아니면 장민재가 독단으로 지른 애드리브인가.
아니, 그 전에 장민재가 감히 임윤옥 선생님과 감독, 작가가 있는 자리에서 독단으로 애드리브를 치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뭘 원하는 거지?
굳이 말을 살짝 대사를 바꿔 나를 저격하는 이유는?
지영은 그 자세 그대로 주변을 슥 훑어봤다.
다른 배우들을 보면 이 애드리브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지영이 고개를 돌리자 장민재가 재차 대사를 쳤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내가 발표한 모든 것들! 다 너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지? 다 그 잘난 부모가 도와준 덕이지? 그렇지?”
“…….”
“왜 말을 못 해. 왜 딴 데 보는데. 찔려? 지금까지 이뤄놓은 게 다 네가 이룬 게 아니라는 걸 들키니까 도망치고 싶어, 이 자리에서? 그런데 없어. 세상 끝까지 도망가도 네가 도망칠 곳은. 거짓으로 만들어진 천재의 몰락! 그거 내가 꼭 밝혀내서 세상에 던져버릴 거야! 어때? 재밌겠지? 안 그래?”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한 대사다.
지영은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장민재의 순발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이 유지되고 있는 자신의 정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말을 해봐, 말을!”
“쯔…….”
애드리브가 시작되고 지영의 첫 반응이 나왔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배우들. 옆에 앉혀 놓고 이런 상황인데도 침묵하고 있는 임윤옥 선생님.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못한 박지상과 장민주 작가.
이러니까 꼭…….
“광대도 아니고 이건 뭐…….”
지영의 입에서 결국, 쓴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에게 원하는 반응이 있었을 거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분명 원하는 게 있었을 거다. 베스트는 극 중의 천재 서건 그 자체로 받아치는 것. 아마 이게 최고일 거다.
나쁜 쪽은?
지영이 얼어붙는 거다.
갑작스러운 애드리브로 합이 깨지고, 얼어붙거나 당황하는 지영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도 이들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신인에게 연기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장이 될 테니까. 이들은 이런 판에서 커서, 이런 게 용납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지영은 이 모든 게, 한 사람에게서 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작품에 욕심을 냈고, 그래서 지영을 굳이 주목받게 만들었으며, 없던 리딩까지 하게 만든 사람.
임윤옥 선생님.
그 사람이 이 판을 만든 주동자일 거라 예상이 되어 지금 이 정도지, 만약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지영은 지금 장민재의 애드리브를 대놓고 맞받아쳤을 거다.
지랄 떨지 말라고.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흥미를 숨긴 이 눈빛들.
지영은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어떻게 나올까. 이걸 던져주면 먹을까? 하는, 동물원 원숭이의 재롱을 바라보듯 보는 이런 시선을 즐기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안 당해본 사람들은 모른다. 그런 시선을.
지영이 처음 목발 없이 걷기 시작했을 때, 남은 100미터를 가면 지영은 겨우 10미터를 갔다. 그것도 최대한 힘을 짜내 올라오는 통증과 맞서 싸우며, 고작 10미터를 가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걸었다.
나중에는 힘들어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럼, 사람들은 그런 지영을 어떤 눈으로 봤을까?
연민과 동정, 벌레 보는 듯한 조소. 그런 감정들이 섞여 있는, 진짜 기분 드러운 시선들이다.
자신을 우러러보고, 질투하는 게 오히려 낫다.
질투는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즐길 수 없다.
즐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지금 지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건 내가 정상에 있기 때문에 받는 시선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판을 깔고 조롱거리로 만들려는 느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는, 아직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지영의 트라우마에 기반했기 때문에 더더욱, 더. 그랬다.
그래서 지영의 표정이 변했다.
이미지로 구현한 무표정이 아닌, 완벽한 무표정.
건드리면, 뭔가 날아와도 대번에 날아올 것 같은 숨 막히는 표정이다.
장민재는 한창 뜨는 라이징스타다.
그가 이룩한 커리어도 훌륭하고, 필모도 훌륭하다.
그 나이에서 이룩한 건 일반인이라면 절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부터 꾸준히 성장해, 스물 초반부터 굵직한 역할을 맡으며 승승장구한.
그렇다면 지영은?
지영이 이룩한 건?
지영이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하고 있는 모든 고생은? 장민재의 커리어와 필모, 이룩한 인기보다 부질없거나,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레벨일까?
‘설마…….’
지영은 정반대라고 봤다.
그의 표정이 변한 순간부터 자세가 풀어지고,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꺾여 장민재를 바라보기 시작한 시점부터, 분위기는 다시금 변하기 시작했다.
배우는 기본적으로 연기를 하고, 그래서 감각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지영이 바꾸어놓은 분위기를 대번에 감지했다. 한 사람이 감지하고, 두 사람이 감지하니 전체의 분위기 또한 변해버렸다.
아마도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을 거다.
‘모두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을 테니 그딴 시선들을 보냈겠지.’
아마, 자신 빼고 모두 메시지가 가지 않았을까?
배우 본인이나, 적어도 매니저한테는.
지영은 임윤옥 선생님이 왜 이런 판을 벌였을지를 생각했고, 얼추 이해했다.
아마, 비록 방법은 독하지만 일깨워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연기의 어려움, 연기의 무거움. 이런 걸 지영이 깨달았으면 하셨을 거다.
그 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방법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지영은 판을 엎어버리기로 했다.
비록 그 결과가 캐스팅 박탈이라고 해도.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장민재가 무겁게 깔린 공기를 밀어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영은 그걸 기다렸다.
“그만그만! 미안해요, 아휴, 미안해, 네가 정말!”
장민재의 입이 열리기 전, 임윤옥 선생님이 얼른 일어나 판을 엎었다. 그러고는 배우들과 작가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무겁던 공기는 펑! 깔끔하게 터져버렸다.
장민재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갈무리했고. 이연은 놀란 얼굴로 지영을 끔뻑끔뻑 바라봤다.
그럼 지영은.
그냥 그랬다.
‘아쉽네.’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영을 포함한 전원에게 한참을 사과한 뒤에 자리에 앉은 임윤옥 선생님은 지영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얘가 조용한 샌님인지 알았잖아. 그래서 정신 좀 차리게 해줄 생각이었지. 근데 아니었네. 내가 잘못 알았어. 그것도 한참 잘못 봤네. 샌님이 아니라 짐승이야. 아휴, 아직도 심장 떨려. 얘. 그래, 지금처럼, 그냥 지금처럼만 해. 그럼 넌 따로 연기도 필요 없겠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 알고 있었지?”
마지막 말은 상체를 숙여 작게, 조용히 물어왔다.
그 질문에 지영은 그냥 조용히 웃었다. 그러자 다시 고개를 저은 임윤옥이 양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딩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지영의 발 담근 연기의 세계는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궤도가 틀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