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104화
104화. 연기의 세계(1)
정신없이 시간이 다시 흘렀다.
YMCA배에서 후배들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전원 입상.
조영우가 2위, 권지호가 이우진에게 결승에서 패배해 2위, 그리고 주성호가 3위.
금메달은 없지만, 연희고라는 이름의 무게를 이겨내고 다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전원 아직 1학년인 걸 생각하면 2학년 때나, 3학년 때는 더욱 좋은 성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후배들의 시합이 끝나면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여름.
야외에서 훈련하는 종목, 실내에서 훈련하는 종목의 선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여름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더위 때문이었다. 강렬한 더위가, 선수들의 진을 전부 다 뽑아버린다. 물론 이는 선수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몸을 정해진 시간 동안 끝없이 움직여야 하는 운동선수들이 더위를 좀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수들은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더위 속에서 힘들게 훈련을 마친 지영은 드라마 리딩 때문에 장세리가 보내준 직원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겪는 장소.
그리고 현장이다.
유도장이야 지영에게는 정말 익숙하지만, 유도와는 조금도 연관이 없는 방송계, 그것도 연기 쪽은 지영도 확실히 낯설었다. 예능과는 또 다른 느낌. 지영은 사실 오늘 리딩에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장민주 작가는 지영이 맡을 캐릭터 ‘서건’에게 많은 대사를 주지 않았다.
대사보다는 분위기 있는 연출로 캐릭터를 잡을 생각이라 그렇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영이 이곳에 온 이유는, 분위기를 읽기 위해서였다. 연기라는 게 어떤 건지, 그 분위기를 알게 해주기 위해 박지상 감독과 장민주 작가는 지영을 굳이 초대했다. 그리고 지영도 그 뜻을 알아서 고민하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연기.
그 치열한 세계.
아무나 두들길 수는 있어도, 아무나 받아주지는 않는 세계.
한정된 극소수의 사람들만으로 흘러가는 매우 독립적인 세계.
연기라는 것에 목을 매단 사람들의 세상은, 지영에겐 그런 느낌이었다.
“올라갈까요?”
“네.”
카페에서 시간을 좀 보내던 지영은 장세리가 보내준 회사직원 임은진 대리와 함께 위로 올라갔다.
사전에 연락받은 곳으로 가자 복도부터 북적북적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전부 지영을 바라봤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했다.
지영을 바로 못 알아본 탓이었다.
그러자 임은진 대리가 얼른 나섰다.
“오늘 리딩 참관하는 강지영 배우, 아니, 선수? 아, 강지영 학생입니다.”
임은진의 설명에 좀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아!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목에 걸고 있던 명찰에는 조연출 김택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꾸벅, 지영은 다가온 조연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아, 오늘 온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조연출 김택수예요. 저 안쪽에 리딩장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돼요. 아! 문에 대회의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꾸벅.
좀 얕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임은진과 함께 대회의실에 도착한 지영은 크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긴장돼요?”
“네, 조금 되네요.”
“시합 때보다 더?”
“하하, 네. 그보다 누나. 말 편하게 해주세요.”
“음, 그럴까? 앞으로 내가 지영이 너 전담하게 될 텐데, 그래야 하긴 하겠다.”
“아… 제 전담이세요?”
“응. 너랑 석이. 연기 파트 얘들. 다른 애들이 연기한다고 하면 걔들도 맡게 될 거고. 애초에 그거 때문에 대표님한테 스카웃 됐거든.”
이제 고작 둘밖에 없는 신인 때문에 전문가를 스카웃하다니.
역시 통 큰 장세리 선배님이시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임은진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도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를 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네, 누나.”
“하나 말해주자면, 아마 널 탐탁지 않아 할 사람들이 많을 거야. 대부분이 연기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들이니, 작가님 픽으로 오디션도 없이 섭외된 널 좋아할 수가 없거든. 혹시 아니? 배우 오디션 과정이 엄청 까다로운 거. 메인 주조연들 빼면 보통 2회, 3회씩 오디션 보고 그래.”
“네, 의사생활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 봤어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그렇게 몇 번이나 오디션을 보고 나서야 대부분 캐스팅되거든. 특히 박지상 감독님이나, 장민주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정말 캐스팅이 까다로워. 그러니 분명 호기심보단, 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거야. 자, 그럼 그렇게 배우님들이 널 바라보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성격대로 하는 건 당연히 안 되겠죠?”
“해도 돼. 되는데, 책임을 져야겠지?”
“안된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데요?”
그 말에 씩 웃은 임은진은 지영의 말을 바로 받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굳이 자극해서, 선을 넘지 않으면 그냥 너도 선만 딱 지켜줘. 어차피 지영이 너, 연기에 목 메달 거 아니라며? 본업이 더 중요하잖아. 그렇지?”
“네.”
연기하는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지영에겐 연기보다는 운동이, 유도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우선인 게 있다면 가족과 친구들, 지인이었다. 연기는, 3순위였다.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솔직히……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하지만 물론, 최선을 다할 거다.
운동, 공부, 연기. 이렇게 하루를 삼 분할로 쪼개서 정말 열심히 해왔다. 얼마 전에는 영상이지만, 장민주 작가에게 대사를 치는 점검을 받기도 했다. 장민주는 괜찮다고 했다. 발음만 조금 더 신경 써주면 좋겠다고 조언도 해줬다.
그래서 솔직히, 자신도 좀 붙었다.
물론 잘한다는 레벨이 아니라 무난하단 레벨이란 걸 지영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 선만 지키자. 그리고 지영이 너, 어차피 분위기가 있어서 함부로 대하기 어려울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럴 거야. 배우들이 아무리 예민하고 그래도 작가가 픽한 배우에게 막 대하지도 않을 거고. 자 주의사항은 이쯤에서 끝. 이제 들어갈까?”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지영은 임은진이 열어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자리가 반쯤 차 있었다. TV에서 가끔 보던 사람들이 좌석의 반을 차지하고 얘기하다가 지영이 들어오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뚫어져라, 지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마치, 넌 뭐냐? 하는 표정이었다.
“누구여?”
“글쎄? 첨 보는 얼굴인데?”
“아따, 잘생겼네.”
“딱 배우상이다 야.”
나이가 제법 있는 남자배우분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어머어머, 쟤 걔다. 왜 저번 주에 더 런닝에 나왔던 애들 친구.”
“아 그 엄친아들 친구?”
“작년 말에 유명했던 영상 있잖아. 왜, 유도 경기. 그게 저 애 아냐?”
여성분들은 지영의 정체를 금방 알아봤다.
지영의 머리는 그때보다 제법 길었다. 원래 자르려고 했는데, 혹시 몰라 머리를 잘라도 되겠냐고 장민주 작가에게 물어봤더니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그때보다도 지금 훨씬 길었다. 본래도 생머리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이렇게 몇 달만 더 기르면 자연스럽게 단발처럼 보일 거다. 그래서 인상이 제법 변했는데도 여자 배우분들은 지영을 단숨에 알아봤다.
툭.
그때 임은진이 슬쩍 지영의 등을 쳤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서 지영은 바로 인사를 했다.
꾸벅.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어어, 운동한다는 유명한 친구였구나?”
“호호, 반가워요.”
지영의 인사에 그래도 사심 없이 받아줬다.
임은진이 잘못 알고 있었나? 지영은 한 스태프가 안내해 주는 곳에 가서 앉았다. 지영이 좀 멀리 있었다. 테이블 자리가 아니라, 그 뒤쪽에 빠진 자리. 어차피 리딩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지영은 자리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자, 속속 배우들이 들어섰다.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역시나 큰 감흥은 없었다. 임스테이에서 유명한 분들을 보고, 좀 노는 언니들을 통해 레전드 선배님들을 만났던 게 덤덤함의 이유 같았다.
거의 마지막으로 주조연 배우들이 들어왔고, 가장 마지막으로 남녀 주인공이 들어왔다.
주인공 도언 역의 장민재.
아이돌 출신이 아니라 연기자로 처음부터 데뷔한 요즘 뜨는, 라이징스타. TV만 틀면 나온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배우였다. 그런 장민재가 맡는 도언의 동료이자 연인인 희수 역의 이연도 도착했다.
이연은 아이돌 출신이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연기를 병행하며, 호불호 없는 연기로 요즘엔 꾸준하게 주연을 하는 배우이자 가수였다.
그렇게 주인공 둘까지 다 왔는데도 리딩은 시작되지 않았다.
애초에 박지상 감독과 장민주 작가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 리딩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감독과 작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둘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영도 한 번 뵌 적이 있는 임윤옥 선생님과 함께였다.
극 중, 음악계의 대모.
숙정 역의 임윤옥.
임윤옥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제, 음악의 노예에서 수정된 제목은 ‘예인(藝人)으로 살어리랏다’로, 이미 그 제목으로 기사는 날만큼 난 상태였다. 임스테이 이후 엄청난 상을 탄 임윤옥의 차기작이라 더욱 화제가 됐었다.
다만, 지영만 풀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입단속을 했고, 아까 배우들도 그제야 베일에 감춰져 있던 ‘서건’이 누군지 짐작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숨겼다. 임윤옥의 안에, 강지영을 숨긴 거라 봐도 좋아서 이건 사실 좀 부담스럽긴 했다. 자신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지영은 글쎄. 라는 애매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유도나, 후원 같은 건 몰라도 이쪽엔 뚜렷한 족적이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임윤옥의 등장에 모두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한국 연기계의 대모이자, 대한민국 영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쓰신 분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존경은 기본이었다. 지영도 일어나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인사를 특유의 느낌으로 받은 임윤옥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감독과 작가도 앞에 앉아 마이크를 드는데 갑자기 임윤옥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지영이 왔다며, 얘, 너 어딨니?”
어?
지영은 임윤옥 선생님의 말에 자신을 찾나 하다가, 지영이란 이름을 가진 여배우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영아, 너 어딨니? 얘! 너 왔다며?”
“…….”
어째, 아무래도 자신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것도 그렇고, 배우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서 또 그랬다. 그래서 슬그머니 일어나자, 임윤옥 선생님이 지영을 찾고는 손짓으로 부르며 말했다.
“얘는 부르면 재깍재깍 일어났어야지. 이 늙은이 이렇게 계속 세워두니까 좋니?”
“……죄송합니다.”
그때 방송에서 봤지만, 사실 이렇게 살갑지는 않았다.
오히려 임윤옥 선생님과 친해진 건 지영이 아니라 이성진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솔직히 안면만 있는 정도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임윤옥 선생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지영이 일어나 걷자 시선이 와르르 달려들었다.
뭐지?
왜 쟤를?
임윤옥 선생님이 굳이 찾아서 챙긴다고?
같은 소속사인가?
이런 표정들.
여태까지 지영에게 별 관심 없던 배우들도 이번엔 각자 오만가지 감정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이런 시선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정도는 아니었다. 지영이 시합에 갈 때마다 매번 받던 시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절룩이며 걸 때 받던 시선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냥 애교였다.
지영이 앞에까지 오자, 반갑게 손을 잡아주는 임윤옥 선생님.
“그래그래, 어머, 머리 많이 길렀구나?”
“작가님이 자르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래? 서건이한테는 그게 더 잘 어울리겠다. 일단 너 얘, 내 옆에 앉아봐.”
“……네.”
지영이 옆에 앉자, 임윤옥 선생님이 앉으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 생긴 손주가 너 잘 부탁한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아주 곤욕스러워 혼났다, 얘.”
“아…….”
이성진, 이 대단한 놈.
지영이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임윤옥 선생님이 감독과 작가, 그리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리딩 시작하기 전에 제가 하나 말 말할게요. 나 이번에 큰 상 받고, 이게 복귀작이야. 잘하고 싶어. 근데 그렇게 중요한 작품에 우리 민주 작가가, 덜커덕 검증도 안 된 얘를 글쎄 너무 중요한 역할에 뽑아버렸지 뭐야.”
“그, 지영 학생 역할 듣고도 수락하신…….”
“그랬지. 그랬어. 얘는 내가 그때 있지. 어, 임스테이. 그때 봤는데 연기해도 될 애 같았거든. 근데 그게 지금은 아니잖니. 좀 더 단련이 필요해. 좀 더 겪어야 하고. 그런데 우린 시간이 없잖니. 당장 촬영도 해야 하고 하는데 언제 연습하고 언제 가르쳐. 그걸 내가 그냥 두고 볼 수 없겠더라고. 여기 모인 배우들에게 정말 미안해, 내가. 그런데 나 이번 작품 잘하고 싶어. 큰 상 받고 욕먹기 싫거든. 그럼 꼭 상 줬다 뺏긴 거 같잖니?”
“아하하…….”
박지상 감독과 장민주 작가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배우와 연출이다.
하지만 임윤옥 선생님 정도면, 그런 피라미드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게 가능했다.
아니, 대한민국의 그 어떤 감독도, 작가도 그리고 배우도 감히 임윤옥의 이름 위에 설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임윤옥에게는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큰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건 이미 기사로도 충분히 나온 얘기였다.
“그래서 내가 얘를, 옆에 두고 좀 가르쳐 보게. 얘가 잘해야 우리 작품도 사는 거니까 그건 좀 이해 좀 해줘. 대신에, 현장에서 연기 그거 잘 모르겠거든 언제든지 찾아와. 내가 다 알려줄게. 우리 그걸로 퉁 치자. 나 미안한 거. 응?”
임윤옥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을까.
그런데 지영은 토를 달고 싶었다. 엄청난 시샘이 담긴, 어마어마한 질투가 담긴 눈빛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연기’는 시작부터, 지영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엇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