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2)
둘 다 성격은 좋은 아이들이었기에 이 상황이 딱히 불쾌하다거나 싫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곤란하다는 느낌.
아마도 아리엘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수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거일 테고, 이하린은 내게 의념을 배우게 된 과정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닐까? 물론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마주하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테고 말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아리엘과 이하린이 서로 기묘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혹시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나······ 원래 여기 자주 왔었는데.”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아리엘이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하린이 크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아리엘의 입가가 조금 휘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새 이하린에게 장난을 치고 있네.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일단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설명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
“우선 너부터. 하린씨는 내가 불렀어. 둘이서 할 게 있었거든.”
“···할 거? 둘이서?”
“어.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실수했네. 미안.”
“어, 어? 아니 미안해할 건 아닌데······.”
아리엘은 말꼬리를 늘리며 나와 이하린을 쳐다보았다. 다만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둘이서··· 뭐하려고···?”
“음?”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어······.”
“수련. 여기. 지맥. 이상한 소리 하지마.”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장난치는 게 부담스럽다 하지 않았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나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아리엘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내게 화사한 미소로 답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그때,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하린이 조금 미묘한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원작의 주연과 친해진 게 의아했던 걸까?
“······두 분··· 꽤 친하시네요···?”
“아. 그냥 수련장소가 겹쳐서 몇 번 봤습니다. 이 근처에 지맥이 살아있는 게 이곳뿐이거든요.”
나는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하린씨를 부른 이유도 그거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하린의 대답이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느낌. 뭔가 반응이 미묘했다. 뭔가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시무룩 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잠시 또 생각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약간 충격받은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은······ 그냥 수련장소가 겹쳐서 몇 번 본 거뿐이었구나? 하긴 그게 맞겠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
“난 그래도 우리가 친하다 생각했는데···.”
“그만해.”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래봤자 돌려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물론 조금 서운한 기색도 없진 않았다만 그것보단 나랑 이하린을 놀리고 싶다는 장난기가 더 우세해 보였을 따름.
“알았어. 말 안 할게··· 친구도 아닌데 뭐.”
“······.”
나는 못 놀려도 이하린은 놀려보겠다는 걸까? 그 의도는 성공했는지 옆에 있던 이하린이 크게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적당히 무시하면 그녀도 알아서 그만뒀을 텐데 안타까웠던 점은 이하린이 아리엘의 떡밥을 열심히 물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두 분 친하게 지내셔야죠···!”
“하린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맞아 아니야. 원래 안 친했던 건데 뭘.”
“······그, 그러면 안 돼요! 혹시 두 분 사이에 제가 끼어들어서 그런 건······.”
갑자기 쪼그라들어서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하린과 그런 이하린에게 즐겁게 떡밥을 던져주는 아리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결론만 말하자면 잘 해결되었다.
“집중합시다. 집중.”
애초에 아리엘은 반쯤 장난치고 있던 거였기에 말리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럼 오늘부터는 진짜 친구네?’
물론 웃으면서 미묘한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건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하린은···
“의념이 흐트러졌습니다. 집중하세요.”
“···네.”
“잡념은 버리고, 검의를 되새기세요.”
그냥 의념을 자극해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전날의 경험 덕분인지 그녀는 의념을 자극받자 순식간에 임전 태세에 들어갔고, 평소의 이하린과 전투 시의 이하린은 성격이 꽤나 다른 편이었기에 그 판단은 유효했다.
그 순간의 이하린은 평소보다 냉랭하고 예민해지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면 그녀의 소심한 성향도 꽤 사라졌으니 말이다.
“아주 좋아요.”
“······.”
확실히 잠시 쉬고왔다고 컨디션이 좋아졌는지 새벽에 봤던 것보다 의념의 상태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밤새도록 옆에서 가르쳐준 보람이 느껴지는 습득력이었기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아리엘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건네왔다.
“근데 지금 하린이가 하고 있는 게 뭐야?”
“의념수련. 마법사로 치면 정신력과 염력이 혼합된 느낌이라 생각하면 돼.”
“아! 뭔지 알것같아.”
당연히 유망주급이나 되는 애가 모를 리 없었다. 그저 무인이 아닌 이상 구체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뿐이겠지. 당장 남궁설아만 봐도 미약할 뿐이지 의념에 발을 들인 상태였다.
애초에 이하린이 의념에 무지했던 건 복합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그녀의 지식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은 그걸 깨우치는게 입문조건인데 같은 마력을 사용해도 무공이냐 마법이냐에 따라 이런 것도 달라지는구나.”
“그야 당연하지.”
애초에 아리엘이 평소에 사용하는 언령 또한 어찌보면 의념과 같은 맥락이었다. 강렬한 바람으로서 현상을 제어하고, 의지로서 염원을 실행시키는 힘. 그게 바로 만상의 눈으로 관찰한 언령이라는 마법이었다.
“대신 각각 장단점이 있어. 무인들은 육체가 강해지는 대신 상대적으로 마법이나 능력에 대한 저항력이 조금 부족하잖아?”
“그야 마법사에 비하면 그렇겠지?”
“대신 마법사들은 육체적인 능력이 부족하고 말이야.”
만약 비슷한 실력의 무인과 마법사가 일대일로 싸우게 된다면 대부분은 무인이 승리할 것이다. 육체의 우월성은 직관적인 차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인이 마법사보다 더 강한 건 아니었다.
의념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마법 공격에 더 취약했고,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할 실력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무인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일정 수준 이하의 싸움은 맞기 전에 먼저 때리면 그만이니 대체로 무인이 더 유리할 뿐.
그게 내가 아리엘과 대련하면서, 그리고 분석개론 시간의 영상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결론이었다.
그걸 그녀에게 풀어서 설명해줬더니 아리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남궁설아를 이길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네 언령이 남궁설아의 의념을 압도하기 때문이야.”
“?”
그녀의 언령, 예를 들면 ‘멈춰라!’ 가 남궁설아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둘의 대련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영창시간이 주어진다면 화력이야 아리엘이 압도적으로 앞서겠지만, 일대일에서 남궁설아의 가속을 능가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저 남궁설아의 의념이 미숙하니 아리엘의 언령이 그녀를 속박할 수 있는 것뿐.
그녀의 언령이 남궁설아에게 통한다는 것만으로도, 남궁설아의 의념보다 아리엘의 정신력이 더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도 아리엘의 언령에 걸렸을 때는 약간의 딜레이를 감수하는 편이었고, 아리엘의 ‘특성’이 있는 이상 격차가 어마어마하지 않은 이상 아예 무시하는 건 힘들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야. 이해했어?”
“당연한 말이긴 한데 의념이라 표현하니까 뭔가 더 확 와 닿네···.”
남궁설아로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로선 몰입하기 더 쉬웠나보다.
“으음··· 그럼 제대로 의념을 배운 무인은 상대하기 힘들다는 거네? 등천자급이라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것도 상대적으로지. 말했듯 의념은 결국 의지의 발현이야. 마법사의 정신력과 근본은 같아. 경지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특성과 개개인의 정신력도 중요하지.”
“애매하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야.”
그렇게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느새 이하린의 의념이 서서히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건 집중이 풀린다는 증거.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하린씨. 집중하세요.”
“······.”
“지금 하린씨가 신경 써야 할 건 오로지 손에 들린 검뿐입니다.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와도, 어떤 생각이 떠올라도 모두 무시하셔야 합니다.”
“······네.”
내 말에 이하린이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우리가 떠들고 있는 게 신경이 거슬리긴 하겠지만, 그녀는 우선 이런 환경에서도 의념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걸 위해서 이렇게 아리엘과 떠들고 있는 거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한번 지적을 받자 다시 일념을 되새겼는지 그녀의 검에서부터 서서히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점점 서늘한 한기를 품고 예리해진 의념이 하나의 념을 품고 그녀와 동화되어 간다.
상당히 날카로운 집중력이었기에 나는 그런 이하린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아리엘도 이하린의 기세에 흥미를 느꼈는지 다소 엉뚱한 말을 건네왔다.
“근데 의념은 나도 배울 수 있는 거야?”
“아니. 말했듯이 의념은 그냥 그냥 의지일 뿐이야. 마법사는 이미 비슷한 힘을 갖고 있잖아? 하물며 너는 언령까지 있으니까 더 무의미해.”
“아. 그런가? 안타깝네··· 나도 천하 너한테 가르쳐달라 할라했는···”
우우웅-!
그 순간, 당장에라도 모든 걸 베어버릴 것만 같은 기세가 숲을 가로질렀다.
“······는··· 데?”
“······.”
건드리는 순간 그대로 베어져 나갈 것처럼, 이하린은 한순간에 검이 되어가고 있었다. 신검합일까진 아니었지만 검에 의를 싣는 것까진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
다만, 아직 기세의 방향을 조절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 증거로 상당히 살벌한 기세가 이곳을 포함해 사방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래도 집중력만큼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 느낌 좋아요. 그대로 이어가세요. 이 정도면 신검합일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네.”
아. 잠시 칭찬했더니 그대로 다시 의념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지.
“말한다고 집중이 풀리면 안 됩니다. 실전이라 생각하고 계속 유지하세요.”
“······.”
“전투 중에도 유지하려면 더 깊게 동화되셔야 합니다.”
내 말에 그녀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자 아리엘이 굉장히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이하린을 바라보고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방금 엄청 짜릿했는데 저게 의념이야?”
“어. 그나마 지금은 연습이라 그 정도인 거지 상대가 살기를 담아 운용하면 그냥 짜릿한 걸론 안 끝날 거야.”
“······살기? 그런 걸 겪어볼 일이 있을까?”
“뭔 소리야. 당연히······”
“당연히···?”
“아.”
생각해보면 이 세계는 침식 때문인지 인류끼리의 대립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타락한 마인이나 소수의 범죄자가 적이 될 뿐. 그마저도 세계연맹 산하에 그런 걸 전담하는 특수기관이 따로 편성이 돼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사람끼리 죽일 목적으로 싸운다는 건 아직 생도인 아리엘에겐 상당히 낯선 개념일 터.
하물며 의념에 도달한 타천자급의 마인을 상대할 일은 앞으로도 정말 손에 꼽힐 것이다. 애초에 그 정도의 마인은 원작에서도 얼마 없었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말을 덧붙였다. 무인은 아닐지언정 그녀 또한 조만간 타천자급을 상대할 가능성이 높았고, 1학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무공을 익힌 타천자와 조우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놓고 있다간 순식간에 제압당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심해. 혹시나 마인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방심하면 안 되지.”
“아 마인. 어지간하면 마주치기도 힘들다던데··· 그래도 마주치면 위험하긴 하겠네.”
“등천자급만 아니면 괜찮을 거야. 어지간해선 네 언령에 저항하지도 못할 테니까.”
“타천자 말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침식지대 너머에나 돌아다닌다던데?”
“혹시 모르잖아. 혹시.”
이렇게 생각하니 이하린이 왜 그렇게 마인 사냥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세계관 설정이 이렇다 보니 이곳저곳에 숨어있는 마인이 상당히 많음에도 정작 사람들의 마인에 대한 경계심은 낮은 편이었다.
당연히 후반에 가서야 씨가 거의 말라버리긴 했지만 현재로선 타천자급도 적을 뿐이지 꽤 존재했고, 원작에서는 이하린이 마인을 하도 들쑤셔서 중반까지는 주구장창 마인 하고만 싸워댔을 정도.
애초에 당장 맨 처음 쳐들어오는 적도 타천자급 마인. 지금의 생도들로서는 상대도 안 되는 거물이었다.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하는 게 좋겠지.’
원작대로라면 분명 조만간 회랑으로 타천자가 쳐들어올 예정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한 달 내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목표는 바로···.
“어? 혹시···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 장난꾸러기 아가씨일 테고, 그녀를 지키려고 고군분투 하는 게 또다시 사방으로 살벌한 기세를 퍼트리고 있는 원작의 주인공이었다.
“뭐야~ 들키니까 부끄러워 하네?”
“그런 거 아니야.”
정확한 시기는 모르기에 불안한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우리를 향해 완벽한 신검합일을 펼치고 있는 이하린을 보고 있자니 다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걸 하루 만에 성공하네.
생각보다 진도가 굉장히 빨랐다.
이로써 첫 기준점은 통과한 셈.
저 정도면 타천자를 상대로도 내가 갈 때까지 시간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쳐들어오는 시기가 두 달만 늦더라도 이하린 혼자 처치할 수도 있었겠지.
이하린에게 의념을 가르치기로 결정한 건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천하 너도 가만 보면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그치?”
“···넌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라.”
우우웅-!
다만 기세의 방향이 자꾸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걸 봐선 꾸준한 지도가 필요해 보였을 따름이었다.
***
이하린에게 의념을 조금 더 지도해주고, 아리엘과 대련도 한번 치르고 나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AM 00:12]
이틀 동안 밤을 지새운 만큼 생체시계를 되돌리기 위해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온 상황. 그런데 방에 돌아와 보니 테이블 위에 미묘하게 생긴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신세 진 답례입니당! 치료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작은 메모지와 함께 놓여있는 상자.
포장지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초콜릿인 것 같았는데 이하린이 놓고 간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걸까?
“······웬 초콜릿.”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손은 자연스레 포장을 뜯고 있었다. 딱히 간식거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난 17년간 접할래야 접할 수도 없었던 녀석이었던지라 조금 반가웠던 탓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만의 초콜릿인가.
중원의 간식이라 해봤자 끽해야 당과. 그것도 맛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 봤자 현대의 간식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원론적인 맛이었다.
그래서일까.
“······맛있네.”
오랜만에 맛보는 자극적인 단맛에 나도 모르게 감상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초콜릿의 맛을 느끼고 있자니 순간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5주차인가···.’
생각해보면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것도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고, 소교주 유천하와 생도 유천하의 차이는 고작 몇 주의 생활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여유가 자리 잡는 게 느껴진다는 게 다소 어이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목적이 있다지만 이하린의 수련을 일일이 봐주는 것도, 아리엘의 수련에 어울리고 있는 것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군것질을 하는 것도 그렇고 이곳에 있을수록 스스로를 묶어놨던 족쇄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
그간 몸에 밴 습관이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의 경계도 조금씩 줄어드는 기분이었고, 언제나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정신이 무뎌지면서 틈틈이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한때는 익숙했던, 하지만 지금의 내겐 너무나 낯설기만 한 평온은 내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천마신교 소교주 유천하에게는 사치였던 여유가, 전생의 유천하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애매하군.’
하지만 이게 좋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면 천마신공에도 변화가 찾아올까. 이게 내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될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그저 어젯밤 떠올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되새기니 다시금 중원이 생각났을 뿐이었다.
“······.”
아버지는 결국 어떻게 되셨을까.
검혈마제는 교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을까.
암영비천대의 식솔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중도파가 무너진 이상 신교에 환란이 찾아오리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
하지만 나는 오늘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곤 몇 년 동안 겪어보지 못한 여유에 잠겨 편안한 아침을 맞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초콜릿을 삼키고 난 입안이 무척이나 텁텁하게 느껴졌다. 그건 무척이나 씁쓸한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