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3)
다시 또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란 게 원래 이리도 빠르게 흘러가는 거였던가? 쉴 틈 없이 바빴던 시기에는 느리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마음속에 여유가 들어차니 오히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학기 초의 커리큘럼은 꽤 여유롭게 짜인 편이었고, 특히 1학년 1학기에는 하루에 강의 1~2개 정도만 이수하고 나면 남는 시간은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마침 목요일에 들었어야 할 강의는 2주째 휴강이 된 상태였기에 나는 굉장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덕분에 어제만큼은 하루종일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하루종일. 나는 검을 휘두르고, 명상을 했고, 업륜을 탐구했다. 정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그런데 왜일까.
“······.”
이렇게 시간이 여유롭게 흘러갈수록 조금씩 심경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원래부터 강의가 비어있는 날이었고, 공강을 맞이한 나는 평소대로라면 수련실이나 3학구에 가서 수련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하린의 의념수련을 봐주고, 아리엘과 몇 수 어울려준 뒤, 업륜을 탐구하고, 검을 휘두르고, 그런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그게 바로 한 달 전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여유와 평화를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하루였을 테니까.
나는 스마트 워치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3학구에 왔어요! 천하씨는 오늘은 언제 오실 거에요?]
[저 방금 5분 동안 신검합일 유지했어요!]
[방금 아리엘씨도 왔는데 언제 오세요?]
주르륵 쌓여있는 메시지.
이하린이 보내놓은 것이었다.
의념을 습득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신검합일에 적응한 걸까? 확실히 빠른 성장세. 며칠 동안 열심히 지도해줬더니 그 노력만큼이나 쭉쭉 성장하고 있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만 성장해준다면 앞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하지만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미묘한 기분이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깟 초콜릿이 뭐라고.’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하린이 답례로 놓고 갔던 초콜릿- 겨우 그거 하나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번잡해지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걸까? 입안에 느껴진 단맛이 기어코 중원까지 연결되었다는 점은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조금 정신없긴 했었다.
중원에서 지구로, 환생에서 소설 속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나고는 바로 순례자의 길로 떠났고, 등천의 구도자를 지나 원작의 무대로 들어왔다. 입학식부터 주연인물들과의 만남. 그리고는 다시 이하린과의 일까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치는 동안 억눌러왔던 신경이 이제 와서 터져 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고작 초콜릿 하나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 날부터 지금까지 마음에 여유가 들어찰 때면 자꾸만 번잡한 기분과 함께 중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이건 뭐··· 세뇌된 것도 아니고.’
이 상황이 내 스스로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실 원래의 ‘나’도, 소교주로서의 나도 애초부터 평화로운 일상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싸우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피 튀기는 혈전은 거북하게만 느껴졌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자 적응하는 게 힘들다니.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허나 평온이 거북하다 해서 당장 검을 들고 전장으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 또한 심마라면 심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될지도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적어도 계속 마음 한구석에 이런 번잡함을 품으면서 지내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적응을 해야 한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해보았고- 결국 나는 오늘 하루 동안은 수련도, 원작도 잊고 평온을 만끽하기로 했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루종일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보다는 이러는게 ‘평온한 일상’에 적응하기에는 더 적합해 보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제껏 살아온 삶이 그러한 것과 거리가 멀었던 만큼 그건 무척이나 낯선 결정이었고, 일상을 즐겨보려도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사람들의 일상이 보고 싶어졌다. 허리에 검을 차고, 마법을 둥둥 띄우면서 돌아다니는 생도들이 아니라 진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평온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오늘은 못 갈 것 같습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내 결정은 빨랐다.
그리고 행동은 더 빨랐을 뿐이었다.
-아빠! 저기 곰돌이가 지나가!
-우와~ 진짜네? 가까이 가고 싶어?
-응!
그렇게 나는 등천도시에 방문했다.
***
등천도시.
이곳은 본래라면 제주시가 있어야 할 위치. 하지만 1차 세계침식 당시 조선-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규모의 침식현상에 휘말렸고, 잿빛의 재앙은 온 국토를 휩쓸었다.
그 후 다년간의 투쟁 끝에 한국에 발생했던 침식은 수많은 희생 속에 모두 격퇴되었고, 대한민국은 결국 승리하게 되었으니. 그 역사를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은 승리의 증거로 제주도에 발생했던 멸화급의 탑을 백색탑으로 정화시켜 보존하였다 한다.
그리고 차후 국제적인 정세와 여러 정치적 사유, 그리고 심연탑의 위치 등. 각양각색의 인과가 맞물려 제주도에 보존된 1개의 멸화를 중심으로 12개의 황혼, 76개의 여명을 세움으로써 이곳에 ‘등천회랑’이 설립되었다 하니- 그런 ‘등천회랑’의 존재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을 따름이었다.
이곳은 침식에 저항하는 인류의 의지, 차세대를 이끌어나갈 희망의 등불이 모여드는 곳이자 대한민국이 침식에 저항했다는 증거 그 자체인 땅.
결과적으로 등천도시는 세계시민들의 손을 통해 희망의 랜드마크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영토이면서도 세계연맹이 주둔하고 있는 희망의 도시. 세계 각지에서 방문한 각성자들과 은퇴한 초인들이 돌아다니는 도시. 세계의 그 어느 나라 보다 안전하다 칭해지는 백색의 도시.
그게 바로 현재의 등천도시였다.
-아! 오늘 예약하신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네. 책임지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일까?
-꺄하하하! 뭐냐 그게 바보도 아니고.
-하하! 아 너무 웃기네 진짜.
-아니 쪽팔리게 뭐하냐고 너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그 미소의 방식은 저마다 달랐어도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신기하네.’
그 모습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다시 또 기묘한 기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딱히 불쾌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런 풍경이, 이런 기분이 낯설어서 그랬을 뿐.
그렇게 나는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그런 광경을 멍하니 감상해보았다. 그런데 잠시 그러고 있자니 어느 순간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몇 살쯤 되었을까. 6살? 7살? 내 앞으로 다가온 자그마한 꼬마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두 손을 꼬물거리며 입술을 오므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 나는 어색하게나마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빠는 쩌어기 학교에 다니시는 분이세요?”
“학교? 등천회랑을 말하는 거니?”
“네! 등천회랑이요!”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딱히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분수를 구경하는 줄 알았더니 다들 나를 보고 있던 걸까?
위치도 위치였고, 긴장을 일부러 풀어놓는 중이어서 그런지 눈치채는 게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들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다.
-거 봐. 맞을 거라고 했잖아. 저거 생도용 제복이라니까? 딱 티가 나잖아.
-야야 들리겠다 임마. 초인분들이 얼마나 귀가 좋은데. 쉬는 날이신 거 같은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와··· 등천회랑.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 속에 담긴 반응에 당황스러워 순간 눈을 깜박거렸는데 그때, 질문을 건넸던 여자아이가 헤실 거리며 내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은 이거! 받아주세요!”
“···뭔지 물어봐도 되겠니?”
“어··· 이거 선물인데······ 비밀로 주고 싶은데··· 어······.”
“그럼 그냥 받을게.”
우물쭈물하는 아이의 표정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순간 만상의 눈으로 투시해볼까 싶기도 했다만, 오늘만큼은 조금 경계를 풀어 놓자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딱히 위험한 부분도 없어 보였다.
애초에 만상의 눈이 아니더라도 내 눈은 어지간한 건 쉽게 간파해낼 수 있었고, 나는 그런 내 눈을 충분히 신뢰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내 대답에 아이는 자신의 고사리 같은 손을 쭉 내밀었고, 나는 그 손 밑으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렇게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펼치자 내 손바닥 위로 굴러떨어지는 작은 물체.
나는 그걸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주먹을 쥐어 주었다. 그러자 그걸 본 아이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고마워.”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부끄러웠는지 짧은 발을 도도도- 놀리며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 상황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내게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앉아만 있어도 시선을 타고 전해지는 호의에 잠시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이내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사람이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끝에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묵례를 건네었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인사말.
“당신의 의무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싸움에 평온을 기원합니다.”
“······.”
아. 그제서야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는 글 줄기 몇 마디로 묘사되었던 일들이었기에 까먹고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 이곳은 세계의 20%가 그림자에 침식된 상태.
그런 만큼 침식과 맞서 싸우는 공략자들은 사람들의 경의를 받았고, 등천회랑의 생도들은 차세대의 희망으로 키워지고 만큼 그 인기는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등천회랑에 입학했다는 건 까마득한 어린 나이부터 훈련과 훈련을 거듭해 기량을 쌓아왔다는 증거나 다름없기에 그 인식은 더욱 그러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이 무슨 소리를··· 이건 당연히 건네야 할 말입니다!”
“······.”
“인류를 위해 노력하시고, 또 앞으로도 그림자 놈들과 싸워야 하실 텐데 이런 말밖에 건네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물며 이곳은 등천도시였고, 이곳의 시민들이 등천회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굳이 고민해보지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새삼스럽게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게 향해지는 시선 속에서도 그저 멋쩍게 웃어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 또한 내 미소에 환한 미소로 답했을 뿐이었다.
***
기분이 더 복잡해졌다.
“······.”
어딜 가도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미소가 만연한 그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누군가는 감사의 말을, 누군가는 동경의 말을, 누군가는 염려의 말을.
구비해둔 옷이 없어서 회랑에서 지급한 외투를 걸치고 나온 게 실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초콜릿에 이어 사탕인가.’
아까 전 아이가 주고 간 선물은 별 게 아니었다. 아이의 주머니속에 들어있던 건지 조금 꾸깃꾸깃해진 작은 알사탕.
다른 사람이 주었다면 이게 쓰레기처리를 하는 것인지 선물을 주는 것인지 의심스러웠겠다만, 뺨을 붉히며 다가온 어린아이가 건넨 사탕은 꽤나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가 조심스레 주고 간 작은 사탕.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해진 이 선물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 걸까?
기분이 심란했다.
평온함에 적응하기 위해 보러왔던 저들의 일상은 내 생각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그 입가에는 다 행복이 엿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그렇게 마음속에 한가득한 여유를 품고서는, 내게 그 여유를 한 움큼씩 나눠주려고 노력했다. 교의 신민들을 보기 위해 시찰을 나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참나.”
아이가 주고 간 알사탕을 까서 입 안에 넣으니 고소한 단맛이 느껴졌다.
이건 무슨 맛일까. 아이가 품고 있던 동경이 담긴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건네오는 행복이 담긴 것일까. 혀로 몇 번 굴리고 한번 깨물었더니 사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 알사탕의 뒷맛은 여전히 달았다. 초콜릿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
회랑으로 돌아가야겠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리 곳곳에 넘쳐나는 행복과 평온함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괜히 마음만 더 번잡해졌다.
조금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즐겁게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나치자니 나까지 해이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평온함을 즐길 수 있는 걸까. 당장 이곳에 잿빛탑이라도 솟아난다면 이 도시도 아비규환에 빠질 게 분명했다.
···물론 그걸 막아주기 위해 생도들이 열심히 훈련하고, 공략자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는 거겠지만.
사실 간간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경비원들의 수준만 해도 어지간한 생도 수준은 돼 보였다. 게다가 등천회랑이 바로 옆에 있는 만큼 이곳의 경비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누군가 이곳에서 소란을 피운다?
그러면 아마 순식간에 초인들이 뛰쳐나올 것이다. 도시 가드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회랑에 상주 중인 교수들까지 출동할 테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시의 분위기가 이해가 가는듯했다. 초인들을 신뢰하기에, 그리고 그들을 존중하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이런 곳에 있으니 나 또한 이 기묘한 안도감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이러니 이하린이 마인 사냥을 한다고 그렇게 무리 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썩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