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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 빙의를 숨김-33화 (33/205)

폭풍전야 (1)

사람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인류를 위협하는 적은 오로지 침식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세계를 침식하는 잿빛의 재앙은 탑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었지만 그 침식의 형태만큼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누어졌고, 그림자는 인류에 대한 적의를 토해내며 하늘, 세계, 그리고 생명까지 그 잿빛의 색채로 물들이며 심연의 영역을 늘려나갔다.

그렇게 그림자에 침식된 영역은 서서히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해버렸고, 그 과정에서 그림자에 사로잡힌 생명은 천천히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생명에 대한 침식은 각자의 생명력과 의지에 따라 저항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침식을 이겨내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역량을 통해 침식에 저항하며 그림자와 맞서 싸우는 이들을 초인이라 부르며 칭송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저항을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침식에 휩싸여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사람이 그대로 심연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만약 침식을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초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침식을 받아들인다면? 그 해답은 간단했다.

타천의 마인.

누군가는 강해지기 위해서,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서,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침식을 받아들여 마인이 되었고, 스스로의 자유의지 위에 끝없는 증오를 주입받아 인류의 적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혐오스러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어둠 속에 녹아들었고, 세계 곳곳에서 생명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인류의 숨통을 노리기 위해 암약하였는데···

그렇기에 지금 이곳.

아시아의 침식 접경지를 지나 한참을 들어가면 나오는 온전한 심연의 영역. 언제나 그림자에 잠겨 있는 어둠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마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거지요.”

마인의 말에 또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남자의 얼굴 위에는 기괴한 형상의 가면이 씌어져 있었다.

“차질이라··· 굉장히 짜증 나는 말이군.”

“하하! 그 말에 동의합니다.”

“본론을 말해라.”

“하고싶은 말은 별게 아닙니다. 그저 필요한 금액이 더 늘어났다는 얘기를······”

그 순간 살기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그림자속에 잠겨있던 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페르데 카사.”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의뢰한 건 시간에 맞춰서 등천도시를 테러하는 거였다. 그리고 너는 그걸 수락했지.”

“맞습니다.”

“근데 그깟 잡일꾼 몇 명 죽었다고 이제 와서 보수를 더 달라는 건 무슨 개소리지?”

“당연히 개소리지요. 다만 돈이 없으면 일손을 못 구하는데 어쩌겠습니까.”

“허. 미친 겐가?”

“오. 설마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한국에 심어놨던 마인들이 싸그리 뒤져버린 걸 어떻게 합니까. 돈으로 다른 쪽 인력이라도 사와야겠지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받아쳤지만 그건 분명 페르데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비밀구역에 숨겨놓은 침식마인들이 싸그리 전멸해버리다니? 페르데 또한 그 소식을 보고받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서는 어느 곳의 소행인지도 알 수 없었다는 게 그저 짜증 나고 안타까웠을 뿐.

그 결과 그는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 솔직히 말해서 저희도 누가 죽인건지 잡아다가 그대로 사지를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잡히기만 하면 아주 그냥 온몸을 결박해 말초에서부터 하나하나 살점을 뜯어다 그대로······.”

페르데가 짜증난다는 듯 과장된 리액션을 펼쳐 보이자 사내가 잠겨있던 곳에서부터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페르데.”

“아. 말씀하시지요.”

“마인을 사냥한 게 연맹이든, 이면순례자든, 헌터든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야.”

“그렇습니까?”

“중요한 건 네가 의뢰를 수락했다는 거고, 결국 네가 들고와야 할 건 그딴 개소리가 아닌 결과물이라는 거지.”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능청스럽게 웃어넘긴 페르데가 어둠을 들여다보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일이 좆돼버린걸 어쩌겠습니까?”

“······.”

“마인을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애써 구해둔 마인이 뒤져버린 걸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냥 테러고 뭐고 때려치우시지요. 누가 미쳤다고 등천도시를 건드린다 할까요··· 예?”

“뻔뻔한 쓰레기 자식.”

그 말에 페르데가 능청스러운 몸짓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칭찬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로운 유망주도 나타난 모양인데, 혹시라도 도시에서 마주치면 어떻게 합니까? 이거 참 의뢰가 갈수록 위험해 보이는군요.”

“어이가 없군. 그딴 애송이들까지 들먹일 정도로 돈이 고픈 건가?”

“아이고. 하긴 타천자 앞에서야 유망주야 갓난아기일 뿐이겠지요. 그럼 바로 진행해야겠습니다··· 아! 근데 돈이 없어서 힘들겠군요!”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제대로 원하는 걸 말해라.”

그들이 서 있던 땅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언젠간 사람이 살았을 폐건물이 푸스스- 먼지를 떨어트리며 흔들렸다.

그 반응에 페르데는 가면 속으로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그 미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타천자쯤 되면 근원석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황혼급이 좋겠지만, 원래의 대금도 있고 하니 여명급 한 개만 주셔도 충분할 것 같군요.”

그 말에 주변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이 순간 남자- 타천자 카룬드는 자신의 눈앞에서 능청을 떨어대는 페르데를 짓이기고 싶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아무리 그림자 마수가 침식마인을 건드리지 않는다 한들 근원석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잿빛탑을 이루는 근원석을 파괴하지도 않고 빼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룬드는 이 건방진 인간을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안타까웠던 점은 페르데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등천도시를 테러하는 일.

그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차세대의 희망들이 모여드는 지역인 만큼 도시의 경비레벨은 높은 편이었고, 바로 옆에 등천회랑이 붙어있는 만큼 이런 의뢰를 맡을 조직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수준.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남자처럼 침식마인도 아니면서 이딴 의뢰나 받아 처먹는 쓰레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었다. 쳐 죽이고 싶은 녀석이란 건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안그래도 페루에서 진행하던 일이 어긋난 시점에서 이미 카룬드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찾아왔고, 더 이상 그는 복수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혼자로선 등천회랑의 경계를 뚫고 나올 자신이 없었기에 그들의 시선을 돌릴 다른 사건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카룬드는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혔고, 분을 삭이고 있는 그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살기는 이내 페르데를 휘감았다.

“사냥개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소리는 누누이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다 능력이 있으니 이 지랄 떨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객님.”

서로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둘.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부디 일 처리도 그 주둥이만큼은 해야 할 것이다. 일이 끝나고 너희가 살고싶다면 말이야.”

“그야 물론입니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잿빛의 그림자가, 한쪽에서는 핏빛의 마기가 넘실거렸고, 침식영역의 이면에선 무언가가 진행되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

오늘 들어야 할 수업은 무학담론.

지난 수업 때 있었던 남궁설아와의 대련이 큰 화제가 되었던 만큼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 썩 편치는 않았다.

-오. 유천하 지나간다.

-빨리 다음 주 왔으면 좋겠다.

-응? 아 대련 풀리는구나.

-상위권 구경 꿀잼일듯.

그나마 저런 수군거림에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

그나저나 약간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이하린의 의념습득을 도와주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이틀 연속으로 이하린과 밤을 지새워버린 셈.

물론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정형화된 생활패턴이 깨지고, 수련시간이 사라졌다는 게 조금 거슬릴 따름이었다.

[저는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수업 잘 들으세요 : )]

참고로 이하린은 부상회복을 목적으로 자체휴강을 선언했다. 당연히 성적이야 까이겠지만 애초에 이하린은 성적 따윈 상관없었던 모양.

‘원래 수업은 땡땡이치는 맛이에요···!’

그렇게 말하던 이하린의 표정은 무척이나 해맑았을 따름이었다.

“······.”

사실 나도 짜여진 계획이 있기에 수업을 듣는 거지 딱히 성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위권을 목표로 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다음 시험 때 필기점수만 올린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

지금처럼 꾸준히 수업을 듣는 이유는 그저 업의 이해시간에 업륜의 활용을 깨우쳤던 것처럼, 내가 모르고 있던 지식을 새롭게 알게 될까 싶어서 다니는 것 뿐이었다.

이 세계에는 다양한 능력이 존재했고, 등천회랑은 그런 걸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초인들의 교육시설인 만큼 수업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은 학기 초였기에 수업의 내용이 그다지 흥미롭진 않다는게 문제였지만···

‘나도 그냥 수련이나 하러 갈까.’

그렇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더니 어느새 강의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나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

아무래도 정정 기간 동안 생도들이 더 늘어난 모양. 강의실이 생도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하린이 안 왔으니 분명 자리가 남아야 할 텐데 왜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빈자리는 오직 하나뿐.

다만 그 자리는 2인석이었기에, 그 옆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조금 신경 쓰였던 나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 야야 자리배치 봐봐.

-오우씨···.

이쪽을 힐끔거리던 애들도 상황을 눈치챘는지 저마다 소곤거리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인지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빈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이게 다 느긋하게 걸어온 내 책임이겠지.

그렇게 자리에 가서 앉으니 옆에서부터 기묘한 침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고, 그녀- 남궁설아는 잠시 차가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녀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었는데 아무래도 저번 대련이 떠올랐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실 원체 본인의 이름값이 유명했던 만큼 대련에서 패배한 게 충격이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궁설아 자체도 강함에 집착하는 타입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나저나 꽤 무리하고 있는 모양이네.’

다만 잠시 스쳤던 그녀의 얼굴 위로는 피로가 드러나 있었고, 원래의 인상이 미형인지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가 안날뿐이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그녀가 절정에 입문한 무인인걸 감안하면 신기할 정도였다.

그날의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나는 잠시 남궁설아의 트라우마를 떠올려보았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그건 지금의 내가 도와줄 만한 부분도 아니었고, 그런 건 미래의 이하린이 알아서 해결하지 않을까 싶었으니 말이다.

***

강의실을 나오며 나는 이하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막 의념에 발을 들인 만큼 당분간은 방향을 잡아줄 필요성이 있었기에 같이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3학구의 위치가 첨부되어 있었고,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바로 갈게요!]

3학구로 부른 이유는 별게 아니었다.

의념을 수련하는데 반드시 내력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아직 이하린의 경지가 의념만으로 수련할 만큼 높지는 않았던 탓.

당연히 그녀의 수준에서는 직접 검을 휘두르며 무공과 함께 수련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 빠른 수련을 위해 이하린을 지맥이 위치한 곳으로 불러냈고, 나 또한 3학구로 향하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러 나는 3학구에 접어들었고, 다시 항상 수련하던 숲 속으로 발걸음을 들여놓자 내 시야에는 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 속 한가운데에서 정좌를 한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금발의 여인. 아리엘이 그곳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

고요한 숲 속 한가운데 앉아 햇빛을 받으며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을정도로 굉장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모습.

허나 만상의 눈을 통해 본 세계에서는 육안과는 다르게 강대한 마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는게 관측되었다.

‘집중력이 좋네.’

마력친화 체질이라 했던가? 확실히 마력운용력 만큼은 감탄스러울 수준. 대기에 흘러다니던 마력은 그녀의 호흡과 동조되며 하나로 합쳐졌고, 이내 다시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

괜히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천천히 인기척을 내며 다가가자, 그 순간 아리엘의 눈이 살며시 뜨여졌다.

“······어? 천하야?”

“열심히 하네.”

“어제는 안오더니 오늘은 일찍 왔네?”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눈꺼풀 사이로 에메랄드빛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던 거야?”

“음··· 잘 모르겠는데, 지금 몇 시야?”

“4시.”

“아! 그럼 4시간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 봐 점심부터 저러고 있었던 모양.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내 아리엘이 나를 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천하 너는 수업 듣고 왔어?”

“어. 무학담론. 너는 공강인가?”

“응. 난 오늘 공강. 근데 무학담론이면··· 혹시 설아랑 같이 듣는 수업이야?”

“설아···? 아 남궁설아. 친한 사이야?”

그녀를 언급하는 게 꽤 자연스러웠다.

“설아랑? 당연하지. 학회랑 무련은 교류를 자주 하는 편이니까.”

“그래?”

“아무래도 나랑 설아는 순위가 비슷하다 보니까 친선경기만 열렸다 하면 서로가 상대일 때가 많은 편이거든. 그래서 서로 대화는 하고 지내는 사이야.”

“둘이서 대련을?”

“응 둘이서. 아! 그러고보니 천하 너는 둘 다 싸워본 입장이네? 네 생각에는 나랑 설아랑 대련하면 누가 이길 것 같아?”

“······.”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해보았다.

남궁설아는 특성이 특성인만큼 아리엘에겐 꽤나 불리한 상대. 아리엘의 언령발현이 빠른 편이긴 해도 남궁설아의 속도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친선대련이라면 대련장의 범위도 제한적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언령의 지배력을 생각한다면 의념에 미숙한 남궁설아로서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아리엘의 언령은 그 범용성만큼이나 강제력도 뛰어났으니 어지간한 의념으론 떨쳐내기 힘들게 분명했다.

그 부분을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지금은 너.”

“지금은?”

“시작하면 우선 멈춰부터 외치고 시작할 것 같으니까. 그걸 남궁설아가 튕겨낼 수만 있어도 결과가 달라지겠지.”

“······너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구나?”

정말 그 방식 그대로 대련을 치러왔던 모양인지 아리엘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안 그러면 남궁설아의 가속을 못 따라잡을 거 아니야. 언령으로 가속한다 쳐도 특성보다 빠른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인데 뭔가 분하네···.”

“마법사와 무인이고, 상대 특성이 변속인데 분할 게 뭐 있어.”

“그건 또 그렇긴 하지?”

잠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저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하린이 알아서 잘 찾아온 모양.

아. 이거부터 말해야 했는데.

“그건 그렇고 하나 말할······”

“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럼 넌 왜 그렇게 빠른 거야? 특히 저번 대련! 너는 설아처럼 특성으로 강화하는 것도 아니면서.”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저번 대련에서는 남궁설아의 특성을 카피해 사용한 게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업륜과 만상의 눈, 그리고 내 개인적인 재능의 결과물이었을 뿐이지만 그걸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조금 곤란했고, 특히 만상의 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조금 꺼림칙한 부분.

실력의 3할은 숨겨라.

그게 무림의 격언이지 않은가?

물론 그녀는 나를 위협하는 적도 아니었고, 이게 무조건 숨겨야 할 내용도 아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꼭 알려줘야 할 내용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경지가 높으니까 그렇지. 저번 대련에선 나도 진지하게 했고 말이야. 그것보다 우선 말할 게 하나 있는데.”

“응? 뭔데?”

부스럭- 그 순간 풀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제외하곤 벌레 한 마리 없는 고요한 숲 속이었기에 그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들려왔다.

“?”

당연히 아리엘의 고개는 자연스레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돌아갔고, 그 순간 풀숲에서 이하린이 튀어나왔다.

“···아! 여기가 맞았······ 어?”

이하린은 나와 아리엘을 발견하자마자 순간적으로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옆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리엘에게 태연히 설명을 덧붙였다.

“말하려 했던 게 이거야.”

“······하린이?”

그 말에 아리엘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이하린을 바라보았고, 이하린도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아리엘을 마주 보았다.

“···안녕?”

“···안녕하세요?”

“······.”

“······.”

그리곤 두 쌍의 눈동자는 내게로 향했다.

“······아리엘씨가 여기 왜···”

“······하린이가 여기 왜···”

동시에 튀어나온 말.

“···네?”

“···응?”

다시금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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