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녀가 돌연 다부지게 말꼬리를 올리기에 해시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라.”
“제 증언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숙여 제 무례를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며칠 내내 고민해 보았습니다만, 제 식견이 짧아 헤아리지 못했어요.”
솔직히 해시트는 조금 놀랐다. 그것이 라피난이라면 결코 묻지 않을 질문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당연히 품어야 하는 의문이었다. 그동안 라피난의 맹목적인 충성심에 깜빡 잊고 있었다.
잠시 고민 끝에, 해시트가 적당한 단어를 골라냈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면 대답이 될지 모르겠군.”
“충분합니다.”
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해시트는 더 장황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전쟁을 거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었다.
안심하고 등을 돌린 해시트를 붙잡은 이는 역시나 이레이였다.
“무슨 수로 전쟁을 멈추려고?”
“치워.”
탁, 해시트가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냈다.
아무래도 이레이는 스스로 천지 구분 못 하는 시건방진 놈이라고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쥰이 옆에서 듣거나 말거나 시종일관 꿋꿋하게 짧은 어미를 활용해 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레이는 한숨짓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늘어진 눈으로 웃었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여 낮춰 속삭인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맹이에게 화살에 ‘그런 걸’ 새기도록 시켰었지.”
“…….”
“한동안 나보단 라피난이 곁에 있어 주는 게 낫겠군. 좋아. 양보하마.”
“그만 나불대.”
해시트가 눈을 부라린 것보다 그가 선심 쓰는 척 멀어진 것이 더 빨랐다.
“내 말이 틀려? 맞잖아.”
“…….”
“나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틀리지 않아 문제임을 알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결국 그녀는 성난 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가며 으레 하는 으름장을 두었다.
“그래. 네놈과 떨어져 있는 동안 마음 단단히 고쳐먹고 사형과 무기징역 중에 뭐가 더 네놈에게 어울릴지 고민해 보겠다.”
지금 그녀에겐 라피난이, 같은 맥락으로 쥰에겐 이레이가 더 나은 동행인이 되리란 추측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완벽한 선택에도 낭패가 따른다는 사실을 해시트는 불과 반나절 만에 깨닫게 되었다. 늘 그렇듯 뼈저린 후회와 함께.
*
“쥰이 피습당했다고 합니다.”
대신관과의 면담을 끝내고 예배당 계단을 내려오던 길이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피난이 거두절미 꺼낸 소식에 해시트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즉각 숙소로 향한 발걸음은 거칠었지만, 막상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잠시 멈추어 서서 흥분을 달랬다.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무작정 쏟아 낼 수는 없었다. 라피난은 그녀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뒤에야 허락을 구하고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열리는 문틈으로 낯익은 손이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레이는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나직이 입을 뗐다.
“왔어?”
“어떻게 된 거야. 넌 대체 뭘 했고.”
그와 달리 해시트는 문을 닫자마자 거칠게 잇새를 짓씹었다.
필사의 인내로 화를 참아 낸 게 겨우 그 정도였다. 그런데도 마치 이레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 날카로운 말투였으나 이레이는 웬일로 섭섭해하지 않았다. 그는 쥰에게 감아 주던 붕대를 매듭지으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성기사 단장에게 증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신관 하나가 내 머리색으로 시비를 걸었다. 잠깐 붙잡혀 있는 사이에 이렇게 됐어. 아마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증인이라곤 이 꼬맹이뿐이니 이 애만 죽으면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겠지. 설마 대신전 안에서 일을 칠 줄은 몰라서 방심했다. 미안해.”
“이레이 대장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쥰이 말했다. 그녀는 이레이의 대답이 끝나길 기다린 것 같았다. 행여 해시트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전하, 제게는 스스로 제 몸을 지킬 권리와 책무가 있습니다. 적어도 오늘 저는 이레이 대장님에게 제 목숨을 부탁한 적 없습니다.”
“멍청한 소리. 그건 네 개인의 무사와 안위를 위할 때다. 내가 너에게 이번 일을 맡긴 순간부터 나에겐 너보다 더 큰 의무와 책임이 생긴 것이야. 그래, 널 돌보지 못한 건 나의 실책이지! 저놈 탓이 아니라.”
해시트가 분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쥰은 붕대를 고정해 주려는 이레이의 손길을 조심스레 밀어 내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외람되지만 전하, 그렇다면 더더욱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저는 전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부모와 형제를 걸어 맹세한 사람입니다.”
“…….”
“전하께서 의무와 책임으로 저를 돌보신다면 제 신의도 지킬 수 있게 부디 살펴 주십시오.”
또박또박 한마디를 읊을 때마다 갈색 단발머리가 흔들리며 그 위에 엉겨 붙은 핏자국이 도드라졌다. 머잖아 바닥으로 핏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잠자코 기다려 주던 이레이가 결국 짜증을 냈다.
“붕대 다시 감아야겠네.”
“일어나도록.”
당장 해시트가 명령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환부에 피가 쏠려 덧날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쥰이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방금 전 매듭을 묶은 붕대가 벌써 새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붕대가 거의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채였다. 왼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둥그렇게 번져 가는 뻘건 핏물이 그 아래가 텅 비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해시트는 여기까지 오는 길에 라피난에게 들은 말을 되뇌었다. 안구가 화살촉을 막아 주어서 머리뼈는 멀쩡하다고 합니다. 천운이죠. 라피난에겐 나쁜 소식을 곧잘 좋은 소식으로 둔갑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해시트는 그 또한 나약한 제 탓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마저도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 침묵할 따름이었다.
때마침 바깥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온 라피난이 이레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이 일에 대해 또 아는 사람이 있나.”
방에는 그들 네 사람뿐이었다. 이레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
그리고 쥰을 끌어다 앉혀 다시 붕대를 감아 주며 말했다.
“이 녀석부터가 절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된다고 하얗게 질려서 뛰어가던걸. 저러다 화살을 뽑기도 전에 충격으로 사망할까 봐 걱정 좀 했지. 아아, 내가 이 녀석 살린답시고 암살자을 못 쫓아갔으니 그놈들도 알고 있겠군. 하지만 그놈들은 별로 상관없잖아? 바보 천치가 아닌 이상 자백할 리가 없는데.”
“그렇군.”
라피난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대신전 내부에서 피격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해시트의 성년식이고 황위 계승권이고 모두 뒷전으로 밀릴 게 틀림없었다. 수상한 자를 찾겠다는 핑계로 이레이의 출신이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좋을 게 하나 없으니, 그냥 묻어 버려야 한다. 은밀하게.
일순 해시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모두를 희생하여 일궈 낸 것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 게 의미가 있긴 할까?
새삼스러운 의문에 마음이 밑바닥을 모르고 아래로 추락하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해시트 전하.”
쥰이었다.
해시트는 절망을 숨기지 못하고 쥰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전쟁을 멈추겠다고 하셨죠?”
“……그래.”
마지못해 대답하자 쥰이 갑자기 다 큰 어른처럼 웃었다.
“저도 그걸 바랍니다. 비록 전하께서 품은 숭고한 대의를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하루라도 더 빨리 전쟁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
“제가 한쪽 눈을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것을 희생이라 칭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명예를 앗아 가는 일이라 단언했다.
해시트는 움켜쥔 주먹 안쪽에서 살점이 짓이겨지는 통증을 느꼈다. 겨우 손톱에 쓸리고도 고통스러웠다. 문득 그녀는 이런 고통쯤은 느끼지 못하는 몸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는 사사로운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슬프게도 방 안에 있는 네 사람 중에 그녀 혼자만이 연약한 것 같았다. 그녀의 신분에 비추었을 때, 본디 강하게 태어나지 못한 죄는 매우 컸다.
*
그러니 반드시 강해지고 말겠다. 타고났든 타고나지 못했든, 해시트가 탐내는 강인함이란 결국 그녀가 짊어지고 태어난 황족으로서의 책무보다 긍지 높지 못했다.
수도로 돌아가는 길, 난생처음 애꾸눈으로 말을 타게 된 쥰이 자꾸만 기우뚱 미끄러지기에 보다 못한 해시트가 라피난에게 언질해 그녀를 마차로 들여와 앉혔다.
“쥰.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
돌아가거든 좋아하는 색으로 안대를 하나 맞춰 줄 작정이었다. 고운 색의 비단에 장인의 자수가 놓인다면 원래 눈동자 색만큼은 아니더라도 금방 익숙해질지 몰랐다. 그런 해시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쥰은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검은색이요.”
“그건 너무 식상한데.”
“으음…….”
쥰은 눈치가 빨랐다. 하나 남은 눈알을 데룩 굴리더니 냉큼 덧붙였다.
“혹시 안대를 하사해 주실 생각이시라면 저는 역시 검은색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요.”
“왜지?”
“그야 해시트 전하를 존경하니까요.”
이내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해시트의 까만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해시트는 헛웃음을 치며 그럼 내 머리카락으로 안대에 자수를 놓아 줄까 농담했다가 진지하게 눈을 빛내는 쥰을 보고 체통 없이 뱉은 말을 회수해야 했다. 아무래도 쥰은 이레이와 죽이 잘 맞을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