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처음에 쥰은 황태자와 단둘이 좁은 마차에 마주 앉은 데 몹시 부담스러워했으나,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엔 차츰 긴장이 풀렸는지 제법 편하게 조잘거렸다. 대부분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해시트를 존경해 왔고, 또 백성들이 황태자 전하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지 알려 주는 내용이었다.
“전장에서 불구가 된 군인과 기사들에게 연금을 지급해 주신 건 오직 전하뿐이셨어요.”
“그래? 내가 그랬었군.”
“저 같은 여자아이도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셨죠. 전하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쯤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맞선을 보러 다니고 있었을 거예요.”
“저런, 그래선 안 되지.”
정신을 차렸을 땐 해시트도 쥰을 따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문드문 맞장구를 치다 보니 어느덧 성문 앞이었다. 체감으로는 금방이었지만 실제로는 아슬아슬하게 성년식 일정에 늦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급히 열린 마차 문밖에는 이레이가 잡고 내려오라는 듯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보통 라피난이 맡던 일이라 해시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딱히 까탈스럽게 굴 만한 이유도 없어 그냥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이레이가 무심하게 그녀의 손을 놓아 주고는 곧장 다음 순서인 쥰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종전과 달리 짤막한 능청도 함께였다.
“자, 레이디. 잡고 내려오시지요.”
“감사합니다. 이레이 린 대장님.”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새끼가 아닐 수 없다. 해시트는 왜 기분이 더러운지도 모른 채 떨떠름하게 눈길을 떼어 냈다. 유치한 심통이 깊어지기 전에 다행히 라피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성년식에 참석하셔야겠습니다. 대신들도 모두 모여 있다고 하니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정신이 하나도 없군. 이쪽으로 가면 되나?”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그녀는 순순히 라피난의 안내에 따랐다. 불쑥 뒤따라온 이레이가 바쁜 와중에도 착실하게 시비를 걸었다.
“탈의실에 둘이 같이 들어갈 일인가? 왜?”
“왜긴. 넓으니까.”
“혼자서 옷도 못 갈아입는다니 애도 아니고.”
“그 옷이 웬만한 어린애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건 알고 말하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꺼져.”
그러잖아도 그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던 터라 해시트도 바쁜 와중에 살뜰히 이레이를 구박했다. 웬일로 둘 사이를 상냥하게 중재해 준 이는 다름 아닌 라피난이었다.
“시종 한 명 정도는 같이 들어가는 게 남들 보기에 자연스럽겠지. 실제로 탈의를 돕진 않더라도 말이야. 이레이, 자네는 쥰을 관사로 데려다주고 와라.”
그러고 보니 라피난은 해시트가 이레이와 함께 숲을 탈출한 이래 묘하게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뭐랄까, 꼭 두 사람이 초원의 밤하늘 아래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아는 사람처럼. 절대로 알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저도 모르게 그날 밤 일을 떠올리던 해시트는 퍼뜩 놀라 세차게 눈을 끔뻑였다. 이 몸이 미쳤나. 그날 이레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그녀야말로 진작 잊은 지 오래였다.
*
“마음의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잠시 후, 라피난은 탈의실 안에서 예복을 갖춰 입은 해시트의 이마에 금색 물감이 찍힌 붓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해시트는 쓰게 웃었다.
“마치지 못했다고 해도 기다려 주진 않을 거잖아.”
“송구합니다.”
“됐어. 농담이었어.”
다음은 붉은색 물감이었다. 라피난은 무표정하게 붓질을 이어 갔다. 톡, 간지러운 감촉을 남기고 떨어져 나가는 붓대 너머로 석고상 같은 얼굴이 보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해시트의 어리광을 들어준 적 없는 차가운 남자. 그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믿어 의심치 않을 그녀의 하나뿐인 충신이었다.
이윽고 붓질을 마친 라피난이 거울을 가져와 그녀에게 비춰 주었다.
“다음부터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시지요.”
다음이라 함은 해시트의 황제 즉위식일 테다. 해시트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보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피난의 표정에 더 집중했다. 그녀가 거울을 통해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절 송구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해시트도 뻔뻔하게 나갈 수밖에.
“싫어. 다음에도 네가 해라.”
그러자 라피난이 들릴락 말락 한숨을 내쉬면서 거울을 치웠다.
“가시죠. 물건 챙기시고요.”
“……그래.”
해시트는 짧은 침묵 끝에 몸을 일으켰다.
머잖아 금홍의 꽃을 이마에 새긴 낯에 무거운 슬픔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이미 거울 밖으로 빠져나와서 그녀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라피난은 그런 사사로운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해시트는 강해지기로 다짐했다.
이제 이용해야 할 것은 이용하고,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따를 것이다.
*
단상에는 황제와 황태자와 신관이 있다.
황태자의 앞에는 그가 고초를 겪으며 헬렌밀에서 공수해 온 성물이 놓여 있었다. 해시트는 황제와 신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성년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나 뼈아픈 심정으로 선언할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케나 신의 이름으로 황태자 해시트의 자격을 증명한다. 그 누구도 이 결정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폐하.”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을 때, 해시트는 감히 고개를 들어 공손한 눈으로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저의 아버지, 그리고 미케나 신의 아들이시여.”
그리고 눈동자를 굴려 좌중을 훑는다.
제국의 대신과 주요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훈장을 단 기사들이 맨 앞줄에 서서 의장 중이었다. 라피난은 그중에도 가장 앞자리에 서서 꼿꼿한 자세를 뽐냈다. 이레이는 그보다 훨씬 뒤, 그리고 애석하게도 쥰은 장내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놀랍게도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남자가 아닌 이는 해시트 하나뿐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거짓으로 점철된 이 자리에 존재했다. 그녀 스스로 거짓 그 자체가 되어서 지긋하게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말간 얼굴에는 오직 진실만을 위장한 채로, 해시트가 품속에 넣어 두었던 화살을 꺼내 황제에게 바쳤다.
“헬렌밀로 향하는 중에 무엄하게도 저를 공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화살이 그 증거입니다. 저를 지키려 목숨 걸고 싸운 수행원들이 증언할 것입니다. 수도까지 동행한 헬렌밀 대신전의 성기사들 또한 이 증거를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차마 황제가 제지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좌중 어디선가 거센 외침이 터져 나왔다.
“폐하, 그 화살을 보십시오! 우리 미케나와 오랜 원수인 크샨 왕조의 문양입니다!”
“뭐라?”
황제는 그제야 피 묻은 화살을 받아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당연하다. 핏물이 말라붙은 화살에는 애당초 그가 계획했던 알테 공국이 아닌 크샨 왕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크샨 왕국은 이 대륙에서 미케나 다음가는 강국이다. 미케나와 크샨은 서로를 견제함과 동시에 그 힘을 공고히 하고자 이미 몇백 년째 억지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음모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이 먼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벌떡 일어난 해시트가 숨조차 쉬지 않고 일장 연설했다.
“은애하는 폐하, 부디 징벌에 함께해 주십시오! 감히 미케나 신을 섬기지 않는 그들을 절멸하고 승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폐하가 앞장서 주신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에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곧 천장을 뚫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옳소!”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지 않으면 그들이 쳐들어올 것이외다!”
다들 전쟁이 지겹지도 않은가 보다. 어쩌면 여기 있는 모두가 이 난세를 즐기는 듯하였다. 생명을 찬양해 마땅한 신관마저 그들의 목을 쳐 국경에 내걸어야 한다며 씨근덕댔다. 과연 지난 십 년 가까이 학살과도 같은 전쟁이 멈추지 않은 데에는 종교를 등에 업은 부추김 탓이 컸다.
“황제 폐하 만세!”
“우리에게 미케나 신의 축복이 함께할지어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 함께 이단을 징벌하러 가세!”
끝을 모르는 우렁찬 함성 속에서 해시트는 천천히 황제를 돌아보았다. 웬만한 어린애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예복이 무겁게 치렁거렸다. 턱을 빳빳이 쳐든 그녀는 다 큰 성인 남자치고 퍽 작은 키였지만, 위압감이 의심을 상회했다.
이내 당당하게 황제의 옆으로 자리한 해시트가 그와 함께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위대한 전쟁으로 기록될 겁니다.”
그녀의 속삭임은 함성에 파묻혀 황제의 귀까지 닿지 못했다. 그러나 단지 달싹이는 입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레오니스 8세의 값진 희생으로 기록될 전쟁의 서막이 되기에는.
문득 해시트는 흐트러진 대열 속에서 이레이를 발견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멀리서도 너무 잘 보였던 탓이다.
‘예쁘네.’
그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더니 씨익 웃었다. 해시트는 못 본 체했다. 눈을 감은 채 다시금 되뇌었다.
이제 이용해야 할 것은 이용하고,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따르리라.
그래.
이용해야 할 것은…….
그녀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여전히 이레이가 웃고 있기에 해시트는 아예 고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에 우연히 시선이 흘러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피난과 눈이 마주칠 줄은 몰랐다.
“…….”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머릿속에선 끝없이 그녀 자신의 목소리만이 웅웅댔다.
그리고, 희생해야 할 것은…….
아. 해시트는 또 눈을 감아 버렸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결론짓고 싶지 않았다. 이용해야 할 이와 희생해야 할 이. 알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