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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1화 (31/104)

31화.

이방인, 낯선 존재,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홀연히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

해시트는 조금 전 이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뺨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차가운 체온이 느껴진 순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백성.”

“그건 보기에 없었잖아.”

“네가 보기를 잘못 만들었으니까.”

“……그런가?”

그가 천천히,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의 입가에도 짧은 미소가 스쳐 간 뒤였다.

“결국 나는 너에게 백성도 아니로군.”

“……그건,”

“그만 자라.”

냉큼 그녀의 말을 잘라 내고 그는 먼저 등을 돌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시트는 그의 뒷모습이 조금 서운했다. 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고.

*

라피난은 해시트의 다리에 덧대어져 있는 부목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이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레이가 질세라 억울함을 피력했다.

“내가 다치게 한 거 아니야. 얘가 다친 거 숨기고 따라온 거야.”

“네가 다친 분을 과하게 모셔 간 거지.”

라피난이 그의 불온한 표정을 정정해 주었다. 부하들이 재회하자마자 싸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해시트는 적당히 중재에 나섰다.

“시신은 다 수습했나? 생존자들은.”

“시신은 짐승에게 먹히지 않도록 임시 조치 했고 돌아가는 길에 온전히 수습할 수 있도록 숲지기에게 부탁해 두었습니다. 유품은 미리 챙겨서 남은 병사들에게 지니게 했고요. 시키신 대로 적들이 쏜 화살은 모두 회수해 불태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석하게도 우리 쪽 생존자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다들 목숨 걸고 싸워 준 덕분에 피습대의 우두머리를 생포해서 현재 감시 중입니다.”

그녀와 떨어진 사이 꽤 많은 일을 해결한 라피난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방문한 새 숙소에선 쥰 데이티니스를 포함한 생존자들이 부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해시트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서서 지켜보았다. 손에 꼽게 줄어든 인원을 내심 헤아려 보다가 한숨을 삼키기도 했다. 그러나 내색 없이 라피난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히 이야기할 장소가 필요하다.”

“위층 방을 비워 두었습니다. 올라가시죠.”

기다렸다는 듯 계단을 가리키는 라피난의 행동에 해시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저 애도 데리고 와라. 쥰 데이티니스.”

그녀의 눈길이 잠시 머무른 곳에선 쥰이 얼음주머니로 팔뚝의 상처를 찜질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해맑게 웃음을 터뜨린다.

슬쩍 보기에도 쥰은 천진난만한 성격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껏 해시트가 한 번도 가까이 두어 본 적 없는 부류였다. 라피난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라피난의 손에 이끌려 위층으로 올라온 쥰이 해시트 앞에 냅다 허리를 고꾸라뜨리며 외쳤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래. 목청 가라앉히고 우선 앉아라.”

“앗, 죄송합니다…….”

그제야 다소곳하게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해시트는 무표정하게 그녀가 앉기를 기다리다가 품에서 화살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숲을 떠날 때 그녀가 급히 챙겨 두었던 화살이었다. 그걸 테이블에 내려놓자, 쥰이 물끄러미 시선을 기울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 우리를 공격한 화살 같습니다. 그날은 밤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나무에 특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군요.”

“알테 공국의 표식이다.”

“네?”

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룩 굴러가는 갈색 눈동자에 덜컥 의구심이 차오른다. 해시트는 기특함을 숨기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래. 좀 이상하지. 꼭 배후를 밝히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인장을 때려 박아 뒀잖아. 나는 보통 이런 경우엔 진짜 배후는 따로 있고, 겉으로 드러난 적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판단한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하게 판단했을 것이다. 라피난과 이레이는 물론이고, 지금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어린 군인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런데도 해시트는 굳이 질문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아마 황제는 해시트를 죽인 뒤 동맹국인 알테 공국에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전쟁을 일으킬 터였다. 오랫동안 이어진 화친 때문에 쉽게 시비를 걸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공국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수입해 오는 비단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고작 신입에 불과한 쥰 앞에서 해야 했는지 라피난과 이레이는 납득하지 못한 낌새였다. 그들이 각각 방 모퉁이에 서서 의아함과 불만에 찬 표정으로 해시트와 쥰을 번갈아 보았을 때였다. 쥰이 아주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그럼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진짜 뒷배는 누구입니까?”

“알려 줄 수 없다. 궁금해하지도 마라.”

“아, 네……. 그렇군요. 네, 그러면……. 어, 음…….”

어물대던 그녀가 별안간 목덜미를 긁적이며 해시트의 눈치를 봤다. 그러면요, 전하.

“제가 새 화살에 어떤 문양을 새겨 넣으면 될까요?”

단숨에 알아듣지 못했다면 절대 손을 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해시트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려 냈다. 빙긋. 곧장 고개를 들어 라피난을 쳐다보자, 라피난이 묵묵히 이마를 짚으며 이레이에게 손짓했다.

“따라와라. 할 일이 생겼다.”

당장 수백 개의 질 좋은 화살을 공수해 내야 하는 입장에선 빌어먹을 친구 새끼의 손이라도 빌려야 했으리라. 아무렴 그게 고양이 손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다.

*

그날 밤 쥰이 수백 개의 화살 위에 해시트가 주문한 ‘새로운 문양’을 한 각 한 각 섬세하게 새겨 넣는 동안, 해시트는 잊지 않고 헤라꽃 차를 챙겨 마시며 쥰이 조각한 나무 장식을 이레이와 라피난에게 보여 주었다.

“액운을 쫓아내는 흰타나무로 만들었다며 바치더군. 미신에는 관심 없지만, 이 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때마다 맨발로 뛰어와서 바치는 선물을 품에 지니지 않을 이유도 없었어.”

“흰타나무는 질겨서 칼이 잘 들지 않기로 유명한데 용케 글자를 새겨 넣었군. 책의 구절인가?”

이레이가 나무 장식을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흡사 보석을 품평하는 눈길이었다. 그 옆에서 라피난은 위험한 독이라도 발려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며 그녀를 넌지시 나무랐지만 겨우 한두 마디로 끝이었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타나무에 소금물만 닿아도 색이 거멓게 변한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해시트는 흡족해했다. 이내 이레이의 손에서 조각목을 낚아채 품으로 돌려 넣고는 말했다.

“솜씨가 훌륭하더라고. 무려 성서의 한쪽을 원본과 똑같은 필체로 옮겨서 내게 줬으니 말 다 했지. 그것도 전쟁이 끝날 때마다 매번…….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화살에 새긴 문양이 가짜라고 의심 못 할 거다.”

그 말에 이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피난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 녀석은 앞으로 내가 맡지. 괜찮나? 근위대장 나리.”

“좋을 대로. 돌아가자마자 네 소대로 발령 내 주겠다.”

쥰의 실력은 의심하지 않더라도 쥰의 입은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여차하면 죽이기 쉽게끔 곁에 두고 지켜보겠다는 얘기를 빙빙 돌려 하기에 해시트는 입맛이 떨어져서 그만 찻잔을 내려놓았다.

씁쓸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돌아가면 또 장례식을 치러야겠군.”

하지만 높은 확률로 죽은 이들의 장례보다 그녀의 성년식을 먼저 치르게 될 예정이다. 신이 안다면 응당 대노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삶이었다.

*

웃돈을 얹어 빌린 마차는 일정보다 나흘 늦게 헬렌밀 대신전의 문턱을 밟았다.

“드디어 안전지대로군.”

입 밖으로 내뱉은 이는 이레이뿐이었으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암살자를 붙이겠는가. 전지전능하신 미케나 신의 가호가 닿는 곳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해시트만이 기묘한 불안감에 잠시 어깨를 떨었을 뿐이다.

일정이 밀린 탓에 성년식 준비가 빠듯했다. 얼른 성물을 받아 성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러려면 대신관과 면담부터 시작해 할 일이 아주 많았으므로 해시트는 당분간 라피난과 단둘이서 붙어 다니기로 했다.

이레이와 쥰에게는 황태자 암살 시도의 증거물을 들고 성기사 단장을 찾아가라 일렀다. 잃어버린 수행원의 자리를 헬렌밀의 성기사로 채워 달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쥰이 밤을 새워 조각한 화살은 피습대 우두머리와 포로들을 심문하면서 한 발씩 쏘아 피를 묻혀 두었다.

해시트가 직접, 총 서른 발의 화살을 쐈다.

“그런데 왜 너희 둘이 같이지? 해스, 나는?”

“너는 좀 닥쳤으면 좋겠어. 가능한 한 오래.”

와중에 대놓고 라피난과 역할 바꾸기를 요구하는 이레이에게 해시트가 우아하게 침묵을 권했다.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파업하는 수가 있어. 나 같은 고급 인력을 데려와 놓고 이렇게 홀대할 수는 없는 거라고.”

“오냐,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소원대로 잘라 주마.”

이레이와 쥰을 성기사단으로 보낸 데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긴 했다. 헬렌밀에 상주하고 있는 황실 관료가 세르히나 양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시트의 심복으로 얼굴이 팔린 라피난이 증거물을 들고 찾아갔다간 어떤 트집을 잡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실제로 그 증거물이 위조되었다는 건 차치해 두고서라도.

해시트는 쥰의 어깨를 붙들고 거듭 당부했다.

“쥰, 알겠느냐? 절대로 저놈에게 말할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저 자식이 입을 열 것 같으면 그냥 발등을 내리찍어 버려. 대충 봐도 알겠지만, 저놈은 세상천지 분간이라곤 일절 못 하는 그저 깡패 같은 놈이라서 성기사 단장 앞에서 시비나 안 걸면……. 후……. 그러니 무조건 네가 증언해야 해.”

얘기하던 도중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짚고 말았다. 쥰이 안심하라는 듯이 가슴을 팡팡 쳤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제가 증언하겠어요. 다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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