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0화 (30/104)

30화.

그는 무심하게 읊조리곤 어긋난 발목을 마저 맞췄다. 시큰한 고통이 한 줄기 눈물과 함께 그녀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해시트는 그만 인정해야 했다. 그의 말이 맞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참을 재간이 없어 무시했더니, 별안간 다가온 이레이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가만 쓸어 올려 주었다. 어둠 속에 그의 눈동자가 바르작대는 게 보였다. 속눈썹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울지 말랬잖아.”

달싹이는 입술이 기울어졌다. 두 사람의 콧대가 어긋났다. 이레이는 해시트의 턱을 비틀어 예고 없이 입술을 맞춰 왔다. 부딪힌 체온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가 차츰 따뜻하게 번져 갔다. 잠시 후엔 더욱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셨다.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쓸쓸했다.

그래서 그의 무례를 눈감아 주는 실수를 범했다.

“괜찮아. 해스.”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단 한 명이 그녀의 아버지여서 쓸쓸했다. 하필 그날 황제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켜서 그랬다.

매번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 그녀를 징그럽게 바라보는 눈빛이 자꾸 아른거려서, 하지만 이만큼 서러웠노라 누군가에게 떠들어 본 적 없는 쓸쓸함이 결국 그녀를 지독한 실수로 이끌었다.

“이젠 쓸쓸할 일 없을 거야.”

그땐 그냥,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당신이.

*

머리맡에서 모닥불이 타들어 갔다.

바위 구릉을 지나자 너른 초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원의 끄트머리에 헬렌밀 대신전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이레이는 내일 아침이 되면 이 앞으로 유목민들이 말을 끌고 지나갈 거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말을 얻어 달려가면 저기까진 금방이라고.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인 해시트는 정말 이렇게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가도 괜찮은 것일지 조금 불안해졌다. 덕분에 그날 밤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 밤은 곧 끝나고 만다. 해시트는 그녀의 아쉬움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염원의 순간에조차 이레이가 멋대로 끼어들었다.

“왜 안 자?”

“내 마음이야.”

해시트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오늘 그와 나누었던 대화와 입맞춤을 전부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전혀 기억에 담아 두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일이니까.

“안 잘 거면 좀 더 떠들까?”

그렇다면 이 또한 단순히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든가.”

해시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불빛이 이레이의 머리카락을 더욱 붉게 비추고 있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그의 머리색은 전쟁에서의 활약상과 함께 수도에서 일파만파 유명세를 더해 갔다. 사람 핏물을 하도 뒤집어써서 머리가 빨갛게 물들었다나 뭐라나. 처음 들었을 땐 해시트도 솔깃하긴 했었다.

“아까 땅에 떨어진 화살은 왜 챙겼어?”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이레이가 질문했다. 아, 그거. 해시트는 뻐끔 입술을 떼었다가 갑자기 껄끄러워져서 얼버무렸다.

“라피난과 합류하면 같이 말해 줄게. 두 번 떠들기 귀찮다.”

“갖가지 방법으로 나 서운하라고 고사를 지내 주시는군. 고마워.”

“……별말씀을.”

그게 또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별로 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없단 말이야. 그런 소리야 더더욱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우물쭈물 눈치만 보는데 이레이가 먼저 질문을 바꿔 주었다.

“그럼 아까, 쥰이었나? 너와 인사했던 신입. 열여덟이라던 꼬맹이 있잖아.”

“응. 그 애가 왜?”

해시트는 직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평소보다 밀도 있게 반응했지만 이레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겨우 열여덟 살이 입대해도 괜찮은 건가? 제국군에 지원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사람 죽이는 일에 어린애를 써먹을 건 없잖아. 그런 식이면 부모가 자식을 팔아넘기는 일도 허다할 텐데.”

그에게 의외로 윤리적인 면모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해시트가 인간관계의 저변을 넓혀 가는 게 불만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 딴엔 고민이 깊은 모양이었으므로 해시트도 정성껏 답해 주기로 했다. 누차 밝히지만 그녀는 직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그 나이면 버젓이 다 큰 어른인데 거절할 명분이 있나. 나야 황태자이니 미케나 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열아홉에 성년을 치르지만 그거야 명분일 뿐이고, 황족들도 열일곱 살이면 다들 혼인하는데 뭘…….”

“뭐?”

“어?”

“그럼 너도 결혼할 수 있어?”

“……아니?”

이런. 노력이 너무 과했다.

이레이와 해시트의 눈이 각자 다른 표정으로 동그래졌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추궁과 핑계가 연달았다.

“일부러 숨겼지?”

“네놈이 안 물어봤어.”

“너무하는군. 누굴 호색한으로 모는 것도 정도가 있지.”

글쎄 누가 봐도 확실한 호색한이었다고 반박하면 기다렸다는 듯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해시트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구나.”

그리고 이레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냅다 소리쳤다.

“너는 왜 의사를 그만뒀나?”

속셈이 훤히 보였겠지. 이레이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잠시 후 돌아온 대답은 제법 순순했다.

“그게 왜였더라.”

원한다면 다정하게 대해 주겠다던 약속이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가는 그의 목소리에 해시트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언젠가부터 생명을 구하는 일이 별로 대단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 도움 안 될 놈들을 살려 봤자 보람도 없었고, 기껏 괜찮은 놈을 살려 줘 봤자 머잖아 죽어 버렸다는 소식만 듣곤 했으니까. 허무했지. 원래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허무한 것이긴 했지만.”

늘 제멋대로에 걱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어 뵈는 그가 그런 고민에 빠져 살았다니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해시트는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그래서 용병이 된 건가?”

“음……. 그런가? 하긴, 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 무의식중에.”

확신 없이 모호한 단어가 띄엄띄엄 나열되었다. 그에 맞춰 해시트의 머릿속에선 조금씩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어느 마을에서 의사로 살았을까. 어쩌면 군대 소속이었을 수도 있겠다. 겪어 본 바로는 나름 실력이 괜찮던데 어느 왕가에서 일했다거나……. 상상은 갈래를 더해 갔지만 어디에도 근거는 없었다.

해시트가 이레이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그가 가업을 물려받기 싫어서 가출해 버린 철없는 젊은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밖에는 이름과 얼굴밖에 모르는 남자에게서 뭔가를 더 캐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눈빛이 흐려진 해시트가 거슬렸을까? 일순 이레이는 그녀의 얼굴 근처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뭐야. 먼저 물어봐 놓고.”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턱을 받쳐 그녀 옆으로 바짝 돌아눕는데, 여기서 해시트가 고개를 들면 그대로 이마가 부딪히겠다 싶었다. 사실은 그가 또 입 맞추려는 줄 알았다.

“하, 하지 마라…….”

“뭘 하지 말, 읍.”

해시트는 당황해서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들이받았다. 졸지에 입술이 틀어막힌 이레이가 새파란 눈동자에 황당함을 가득 담아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큭 웃음을 삼키며 그녀의 손을 걷어 내고 말했다.

“너 예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았나?”

“……그만 잘래.”

짧은 침묵 끝에 그녀는 도로 하늘을 보고 누워 버렸다. 다시는 옆으로 돌아눕지 않겠다는 각오로 배 위에 손깍지도 꼈다.

밤이라 다행이다. 지금 제 얼굴이 무슨 색인지 들통날 일은 없을 테니까. 별빛이 너무 밝아서 불안했지만 까만 하늘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니, 이레이의 몸이 멀어지는 인기척과 함께 어둠 속에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도 나는 허무함을 극복하고 널 선택했어. 죽이느냐 살리느냐 갈림길에 섰을 때 널 살렸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

“뭐, 눈물은 오늘 받은 셈치고 나도 목숨을 줄게.”

내 목숨은 이제 네 거야. 해시트는 동의한 적 없던 거래에 그가 망설임 없이 값을 매겼다.

제기랄. 해시트는 결국 손깍지를 풀었다. 아예 팔을 베고 모로 눕자, 맞은편에서 그녀와 같은 자세로 그녀를 보고 있는 이레이가 보였다.

시선이 닿자마자 미끄러져 얽혀 들었다. 그녀를 엉망으로 헤집는 푸른 눈빛으로부터 해시트는 단지 물러서지 않는 데 급급했다. 어느 순간 이레이가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여린 뺨에 스쳐 저절로 눈가가 떨렸다.

“이봐, 해스.”

처음부터 너무 가까이 누웠다. 귓가에 여지없이 흘러드는 낮은 음성을 못 들은 체하기란 힘들었다.

“너는 나와 제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나?”

“…….”

해시트의 머리카락을 쓸던 이레이의 손끝이 서서히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대답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심산인가 보다. 그건 그답지 않게 소심함을 내보인 행동이었고 해시트에겐 냉정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손끝을 멍하니 좇았다. 뺨을 간질이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있었다.

기이한 암홍색 머리와 새파란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렁이는 모닥불 불빛이 그의 얼굴 곳곳에 남은 희미한 흉터를 드러내고 있었다. 해시트로선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그의 과거가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왜 그때 라피난의 말이 떠올랐을까.

“떠돌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