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323)
냉철한 판단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사업가의 본능에서 비롯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노선 언저리를 정확히 파고든 강준호 회장의 능력에 속으로 감탄성을 내지른 정호준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제의를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정호준이 줄다리기 없이 흔쾌히 허락하자 강준호 회장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정호준과 강준호 회장은 실무진을 불러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회장님께서 지켜 주신 남부 하이텍, 제가 잘 키워 보겠습니다.”
“그래요, 정 대표. 내가 부족해서 못 피운 꿈 정 대표가 대신 좀 꼭 피워 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요한 안건을 잘 처리해서 그런지 긴장이 풀리네요.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먼저 나가 봐도 될까요?”
먼저 미팅을 요청한 이가 강준호 회장이었던 만큼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켜보고 가는 게 예의에 맞았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되었기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퇴장을 허락했다.
‘속이 쓰릴 테니까.’
강준호 회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회사의 사정 때문에 남부 하이텍을 매각했지만, 10년 넘게 애지중지 키운 회사잖은가? 기분이 착잡하리라. 어쩌면 아예 폭음을 할 수도 있었다.
정호준의 허락을 맡은 강준호 회장은 망설임 없이 바로 자리를 떠났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정호준은 정호준대로 생각에 잠겼다.
남부 하이텍(NB 하이텍)은 비메모리용 및 기타 전자 집적회로나 전력, 아날로그 반도체, 센서 쪽에서 강점을 보이는 파운드리 회사다. 이번 인수는 분명 득으로 작용하리라.
‘하이스트 반도체 매출이 생각보다 저조했는데, 활로를 뚫을 수 있겠어.’
모든 선택에는 언제나 그에 합당한 책임과 결과가 뒤따른다. 이는 정호준이 2번째 인생을 사는 회귀자라 할지라도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의 법칙이었다.
2010년대 후반. 그리고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하이스트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오성전자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막대한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자리매김한다.
오성, TWSMC, 칼컴, 엔텔과 같은 회사 바로 다음이라는 것만으로도 하이스트 반도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이스트 반도체가 이처럼 성장할 수 있던 건 00년대부터 오성전자가 꽉 쥐고 있던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점유율을 어느 정도 빼앗아 왔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하이스트 반도체가 오성전자를 어느 정도나마 따라잡았을 수 있었던 건 중국 시장에서 하이스트 반도체가 오성전자의 점유율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2010년대 하이스트 반도체를 인수한 KS그룹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하에 중국 투자를 늘렸다. 공장을 확장했고, 부지를 마련해 새로운 공장을 짓기도 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이니 당연다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1회차 때와 달리 이번에는 주고받는 게 전무했다.
아니, 정확히는 전무하진 않았다. 하이스트 반도체를 인수하기 전에 이미 공장 건설을 완료해서 운영 중이던 충칭시 후공정 공장과 장쑤성 남부 무석(우시)시에 위치한 후공정 공장은 정호준이 인수한 뒤에도 계속 운영했으니 말이다.
다만 중국 정부에서 바랐을 공장 증축, 설비 확충 계획은 완전히 백지화되며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1회차의 삶을 통해 중국의 습성을 겪을 대로 겪은 정호준이 기술 탈취를 방지하기 위한 행보였다.
즉 기대치만 못한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었다.
중국에 자본을 투자해 규모를 확장하는 대신, 한국 청주와 대전 쪽에 공장을 증축하고 새로 지었다. 위에 말했듯 선택에는 책임과 결과가 뒤따른다. 이러한 선택은 본래의 역사보다 하이스트 반도체의 매출 증대 폭을 낮추는 요인이 되어 버렸다.
제 손으로 매출을 줄이는 경영자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였지만, 정호준은 대승적 차원에서 결단했다.
‘한국을 위해서는 이게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길게 보면 지금의 선택이 맞았다.
게다가 경쟁자인 오성전자 또한 정호준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국에 공장을 증축하기보단 한국에 공장을 추가 설립했잖은가? 한국 재계에서 전설이라 불리는 김건희 회장이 정호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는 건 그의 판단이 옳다는 증거였다.
똑같은 액션을 취했음에도 하이스트 반도체가 오성전자보다 손해를 봤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정호준은 억울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드벤티지를 줄 이유가 없으면 최고라고 평가받는 쪽 물건을 사용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세계 1등과 2~3등의 차이였다. 저가로 밀어붙여야 하는 중국 전자 회사의 특성이 아니었다면 이마저도 못 이뤘으리라.
* * *
정호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부 협상도 원만하게 끝났다.
협상을 끝내자마자 인수 기사가 떴다.
[하이스트 반도체 LED와 남부 하이텍 인수!]
[5,000억 일시불 인수. 남부 그룹에도 활로가 될까?]
[남부 그룹이 한숨 넘긴 이유!]
남부 그룹의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강준호 회장의 발버둥이었고, 이미 정호준과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었다.
언론이 이번 인수 건을 놓고 시끄럽게 떠들던 말든 정호준은 관심을 껐다. 정확히는 갑작스럽게 성사된 또 한 번의 미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조금 전 이야기했던 거물. 외국에서도 인정하는 CEO 김건희 회장과 약속이 잡혔다. 그렇게 평창동 김건희 회장의 자택에서 단둘이 만났다.
물론 서로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아서 미안하네. 남부 하이텍의 인수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네.”
김건희 회장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기에 정호준은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하이스트 반도체가 남부 하이텍을 인수하는 게 달갑지 않으셨을 텐데, 그냥 용인하셨네요.”
“거슬리긴 했네. 그저 인수에 끼어들어 자네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그냥 묵인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뿐이네.”
한국 재계 순위 1위이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성장한 오성이지만, JHJ Capital과 자금 싸움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었다. 김건희 회장이 판단하기에 인수전에서 승리해도 패배해도 남는 게 없는 싸움이었다.
“괜한 헛돈 쓰지 않아 다행이네요.”
자신과의 경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정호준의 반응을 보며 다시 한번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이번이 아니면 자네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자네와 단둘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네.”
예전 같지 않다는 것. 자신의 몸 상태가 나쁘다는 걸 김건희 회장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정호준을 초대한 건 그래서였다.
“뭐가 궁금하시길래, 이렇게 초대까지 해 주십니까?”
“뭐가 그렇게 급한가? 천천히 합세. 아직 식전이지?”
김건희는 준비해 두라고 일렀던 식사들을 정호준에게 대접했다. 한국산 식재료를 사용하고 한국인(최고 레벨 쉐프)의 손맛이 담긴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진 모습에 정호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명이나물이 아주 맛있네요.”
“그냥 깻잎 조림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게장이 비린내가 하나도 안 나네요? 너무 맛있습니다.”
“아욱국이 아주 시원합니다.”
오랜만의 한식에 정호준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나하나 집어 먹었다. 복스럽게 먹는 정호준의 모습을 본 김건희 회장은 핏줄은 어디 안 간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거 잘 먹어도 너무 잘 먹었네요.”
“미국에서는 이 맛이 안 나나 보지?”
“아내가 한식을 먹어 주긴 하는데, 다 떠나서 미국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 맛이 안 나니까요.”
차와 함께 나온 다과까지 집어먹으며 정말 좋은 대접을 받은 뒤에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네가 보기에 우리 오성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어떻게 되긴요. 앞으로도 잘나가겠죠.”
부회장인 김재호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오성전자는 세계에서 경쟁을 이어 갔다. 김재호 부회장이 구속되지 않았다면 더 잘 나갔을 거라고 IF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건 그때가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 재호 녀석 말일세.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자식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김재호는 믿음직하지 못했다. 김재호가 00년도에 벌였던 사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괜히 커뮤니티에서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붙였겠는가?
“부회장 하나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준비를 잘해 두시지 않았습니까?”
“준비란 건 해도 해도 모자란 거잖나?”
부족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자신의 부친과 자신이 인생을 쏟아부은 오성을 걱정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교 대상이 대한민국 재벌 2세 중 가장 뛰어났다 평가받는 김건희니 오죽할까?
“그 질문에 정확한 답은 못 드리겠네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답은 ‘한 10년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입니다.”
“만약, 자네가 재호 녀석을 도와준다면?”
“좋은 대접을 받긴 했지만, 그럴 의리는 없습니다.”
단호한 부정에 김건희 회장은 정호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의리가 없다면, 그럴 의리를 만들면 되는 일이잖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오성가와 자네가 피로 묶이면 되는 일이잖나? 자네 딸과 우리 손자를 맺어 주기에는 나이 차가 꽤 크더군. 그러니 자네 아들과 우리 손녀를 결혼시키면 어떻겠나?”
김재호 부회장은 훗날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김재호 부회장이 벌일 일. 김건희 회장의 뇌리에 오성은 언제나 그들 가문이 소유해야 하는 그들의 것이었다.
작게는 정호준을 크게는 세계를 암중에서 움직이는 로슬러 가문과 혈연으로 연결되는 거다. 정호준의 자녀와 맺는 혈연관계는 김건희가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좀 당황스럽네요.”
“당황스러울 게 뭐 있겠나? 서양이든 동양이든 상류사회에서 정략은 흔하잖나? 내가 알기론 자네도 정략결혼을 했다고 들었는데?”
“저희는 정략이 아니라 연애 결혼입니다만?”
주변에서 정략이라 평하지만 사실 연애 결혼이라는 말을 붙여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과정을 거쳤다.
“연애 결혼이 별건가? 감정의 교류를 거치면 그게 연애 결혼이잖나.”
“이건 아내나 장인어른과 따로 말을 나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격상의 결격사유만 없으면 본인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시켜 줄 생각이었고 말이다.
“그런가? 좋은 답변이 왔으면 좋겠군.”
김건희는 정호준을 보채지 않았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에 한 번 더 시간을 갖기로 약속을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난 정호준은 문뜩 떠오른 질문을 곧장 입 밖으로 꺼냈다.
“그나저나 김재호 부회장과 이야기는 된 겁니까?”
“이제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딸 가진 당사자에게는 아직 이야기도 안 했다는 말에 정호준은 어이가 없어지는 걸 느꼈으나, 재벌들에게는 저게 일상일 거라 생각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