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69)
자신의 입에서 나올 정보가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될지 모르지 않았기에,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는 최대한 거절하며 세제 혜택 같은 다른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던졌다.
“다른 건 원하지 않습니다. 정보의 출처만 알려 주시죠.”
정보 대신 제공할 혜택을 제시할 때마다 녹음기에 녹음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대답으로 일관한 정호준의 답변에 결국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가 먼저 꺾였다.
-알겠습니다. 정호준 대표님의 요구대로 정보의 출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은행 인수와 주식에 투자해 주시는 게 먼저입니다.
“유니버셜 뱅크가 인수할 만한 규모가 있는 은행들을 선별해 주십시오. 대리인을 보내 인수 절차를 밟겠습니다.”
그날의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하토야마 총리는 정부가 내줄 수 있는 은행의 목록을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주었다.
- 라소니 은행, 산세이 은행…….
하토야마 총리가 보내 준 리스트에는 정호준이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은행들이 수두룩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 * *
정호준은 유니버셜 뱅크 회계팀과 세무팀에 서류를 넘기며 분석을 부탁했고, 갑작스레 밀어닥친 일거리에 그들은 몇 날 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다.
정호준이 분석을 지시한 날로부터 열흘 후 회계, 채권, 부채 등을 보기 좋게 분석한 파일이 정호준의 메일로 보내졌다. 이메일로 보고서를 전달받은 정호준은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나갔다.
‘다 어딘가 하자가 있는 물건들이네.’
두 번 세 번 꼼꼼히 확인했지만 보고서에 리스트업된 은행 중 하자가 없는 물건은 없었다. 부채가 많다든가, 회계가 깨끗하지 못하다든가, 지분 구조나 채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든가, 다들 뭔가 하나씩은 문제가 있었다.
아니, 문제가 하나씩만 있으면 다행이다. 리스트업된 은행 중에는 모든 게 문제인 은행도 다수 존재했다. 재앙 중에 외환을 공격하고 선물로 털어먹은 것에 앙심을 품어 역으로 함정을 판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게 당연한 건가?’
일본이란 나라가 아무리 정부의 권한이 강력한 나라라지만, 독재국가가 아닌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는 국가다. JHJ Capital에게 은행을 넘겨주기 위해 정상적으로 운영 중인 은행의 경영진들을 쫓아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아무래도 라소니 은행이네.’
라소니 은행은 과거 일본이 제국이던 시절 노무라 재벌 산하의 도시 은행이었던 노무라 은행이, 지방 저축은행에서 도시은행으로 커 온 아사히 은행과 옛 사이타마 은행을 합병한 나름 유서가 깊은 거대 은행이다.
라소니 은행의 주 영업반경은 간사이 지방(관서 지방)과 사이타마로, 메가급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도시에 많은 지점을 낸 유일한 은행이자, 2차대전 전부터 일관되게 신탁업무를 병행해 왔다는,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된 장점이 존재했다.
정호준이 판단하기에, 전문가들이 분석하기에 JHJ Capital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일본에서 메가급으로 분류되는 3대 은행의 뒤를 쫓는 은행이 리스트업됐다는 게 이상하다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갚아야 할 부채가 아직 남아 있지.’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주식과 부동산 전반에 걸쳐 버블(거품)이 꼈던 과거가 있다. 당시 일본 정부나 중앙은행은 일본 경제의 상승세를 꺾을까 두려워 돈이나 부동산에 대한 규제를 미흡하게 진행했다. 상황을 방관한 것. 그리고 정부와 중앙은행의 방관은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 경제에 크나큰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똑바로 규제했다면 20 정도만 고통받으면 될걸, 손 놓고 방관한 탓에 100 이상의 고통을 감내하게 됐다. 더 정확히는 이때의 방종을 막지 못해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을 겪게 되었다.
‘라소니 은행’은 일본의 경제에 낀 버블이 터졌을 때 치명상을 입은 은행이었다. 라소니 은행뿐 아니라 ‘산세이 은행’이나 다른 중소, 중견 은행들이 파산해 인수합병 절차를 밟게 되었다.
다만 중소, 중견 은행들과 달리 라소니와 산세이는 다른 은행으로 인수합병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단어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라소니나 산세이는 망했을 때 그렇잖아도 힘든 일본의 경제와 서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충분한 규모의 거대 은행인지라 일본 정부가 짊어지며 국유화를 단행했다.
정부의 아래에서 꾸준하게 은행을 경영하며 조금씩 조금씩 부채를 갚아 나갔지만, 부채가 워낙 막대한지라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다 갚지 못했다.
정호준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정호준의 1회차 역사에서는 2015년 4월에 부채를 모두 갚고 다시금 민영화가 진행된 은행이었다.
아직 은행이 갚아야 할 부채가 남아 있었기에 다른 은행보다도 더 정부의 입김이 잘 닿는 은행이란 말이었다.
보고서를 모두 확인한 뒤 정호준은 유니버셜 뱅크 경영진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했다.
“일본의 라소니 은행 인수합병 진행해 주세요. 일본 정부 쪽에 따로 이야기해 두었으니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JHJ Capital에서도 따로 지분을 사들일 거니 놀랄 필요 없습니다.”
-예, 지시하신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JHJ Capital도 유니버셜 뱅크도 정호준의 것이었지만 법인이 다르다 보니 조금은 복잡하게 돌아가야만 했다.
“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산세이 은행도 인수합병 절차 밟는 거로 하죠.”
-대표님, 산세이 은행은 라소니 은행과 달리 외국계 자본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은행입니다.
한 번 할 때 다 같이 하는 게 편하긴 하나, 편리 때문에 손해를 볼 필요는 없다. 정호준은 고개를 경영진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일단 사들일 수 있는 만큼 지분을 사들인 후에 따로 대주주들을 만나 반응을 살펴보도록 하죠. 뭐 당장 인수합병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익 실현을 위해 주식을 던질 때 물량을 받아도 되는 거니까요.”
* * *
유니버셜 뱅크 경영진과 화상회의를 마친 후 정호준은 곧바로 아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니버셜 뱅크 사장단과 진행했던 회의처럼 화상통화였다.
-업무 시간에 연락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 있나요? 몇 번 걸지도 않았던 화상통화로 전화를 거니 걱정되네요.
“목소리를 듣고 싶고, 보고 싶기도 해서 전화했죠.”
-사탕 발린 말이란 걸 다 아는데도, 기분은 좋네요. 근데, 내가 아는 호준은 이런 스윗한 남자가 아닌데, 혹시 바람피운 거 아니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괜한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다른 여자를 만났냐고 추궁하는 아리아의 공격에 정호준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바람은 무슨 바람이에요!”
-목소리까지 높이니까 정말 의심스러운데요?
“유니버셜 뱅크 사장단과 화상통화로 회의를 진행했었어요. 아리아에게도 부탁할 게 있어서 겸사겸사 화상통화로 전화를 걸어 봤어요.”
구구절절 화상통화를 건 이유를 설명한 뒤에야 아리아는 장난이었다는 듯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호준이 당황하는 건 참 오랜만에 보네요. 귀여워요.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고요. 남편을 놀려먹으니까 좋아요?”
-물론이죠! 요즘 아이들하고 놀아 주느라 나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잖아요. 이렇게라도 보충해야죠.
뭐가 문제냐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아리아의 말에 정호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내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죠? 부탁할 게 뭔가요?
부부간의 대화를 나누며 15분 정도 사담을 이어 간 뒤에야 정호준은 아리아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정이 생겨서 동일본 대지진 피해 복구 성금을 내야 해요. JHJ 재단이 있는데, 굳이 다른 재단을 통할 필요는 없잖아요?”
‘구호 성금을 전달하는 것’. ‘구호 성금을 얼마나 냈는지’와 같은 사항들은 재단에 있어 하나의 경력이다. 정호준은 아리아가 운영 중인 재단에 이력 한 줄이라도 더 적어 주고자 했다. 어차피 내야 하는 성금 JHJ 재단을 통해 내면 좋잖은가?
정호준이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정호준의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지성을 가진 아리아는 그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성금은 얼마나 내려고요?
“글쎄요. 그게 좀 고민이네요. 한 10억 달러는 내야 할 것 같아요.”
-10억 달러요?! 무슨 성금을 10억 달러나 내요!
기부가 좋은 일은 맞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
10억 달러는 한화로 환산하면 1조 2천억 원이 넘는 돈이다. 후진국의 1년 예산보다도 많은 돈을 기부하겠다는 정호준을 말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JHJ Capital이 일본의 재앙을 틈타 좀 많이 털어먹었어요. 유령회사를 통해 작업했는데, 일본 정부가 그 사실을 다 파악했고요.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조금 달랠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정호준이 구호 성금으로 기부하겠다고 밝힌 10억 달러는 정호준이 재앙을 틈타 얻은 수익(세전)의 50분의 1도 안 된다.
“나도 아까워 죽겠어요.”
물론 50분의 1도 안 된다고 해서 그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 낼 정보가 있어서요. 돈보다 이쪽이 더 중요할 것 같은 느낌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호준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죠.
아리아는 무슨 정보를 받아 내려고 하는지까지는 묻지 않았고, JHJ Capital로부터 10억 달러를 받아 일본에 건네주었다.
[JHJ 재단. 구호 성금으로 10억 달러 기부!]
2억 달러는 구호물자로, 8억 달러는 일본에 직접 기부를 했다.
-저는 나름 성의를 보였습니다. 이제 그만 정보가 어디서 흘렀는지 알려 주시죠.
* * *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지닌 나라로, 미국에게 있어 든든한 동맹이다.
일본을 찬양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만 일본 경제에 거품이 낀 80년대 시절에는 세계 50대 기업 안에 일본 기업이 30개 이상 이름을 올릴 정도로 경제 대국이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은 일본은 미국이란 나라에 수십 년 동안 천문학적인 돈을 뿌려 왔다. 그 말은 즉 일본은 미국에 나름의 인맥과 정보통을 만들어 두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정보기관 내에도 일본의 돈을 받아먹고 포섭된 이들이 알게 모르게 존재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보기관에서 나를 팔아먹을 줄은 몰랐는데.’
FBI와 DNI, NSA, CIA 등에 소속된 요원이 돈을 받고 자신의 움직임을 알려 줬다는 말에 정호준은 쇼크를 먹었다.
나름 애국심과 신념을 갖고 기관에 발을 디뎠을 테지만, 역시 인간은 욕망을 가진 생물이란 걸 다시 한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돈을 받은 이들에게도 ‘만약 일본이 중국처럼 잠재적 적대국으로 분류된 나라였다면 돈을 받지 않았을 거라는’ 나름의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은 정보를 팔린 당사자인 정호준이 납득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