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68)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전체적인 흐름을 제시하지만 일의 세부적인 사안들은 고용한 직원들에 의해 처리된다. 그렇기에 일의 진행을 빅토리아 라이온 마인 CEO인 페레즈에게 중국과의 접촉이라는 일거리를 짬 때린 정호준은 박기태를 붙잡고 특훈에 돌입했다.
무슨 특훈이냐고?
당연히 레전드 리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특훈이었다.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게임(레전드 리그)을 방송 컨텐츠 중 하나로 삼았기에 회귀 전에는 박기태가 정호준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회차의 이야기였다. 2회차의 박기태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였다. 정호준이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야만 했다.
회귀 전 박기태는 레전드 리그를 플레이할 때 원거리 딜러 포지션으로 즐겼기에 정호준은 박기태에게 원거리 딜러 역할을 맡겼고, 30대 초반 당시 박기태와 만나 게임을 즐길 때 서포터 역할을 맡았던 정호준은 1회차 때처럼 서포터 포지션을 골랐다.
“병사를 잘 먹으라고. 이걸 잘 먹는 건 게임의 기본이야.”
얼마나 잘 챙겨 먹느냐에 따라 아이템을 하나 더 구입하고, 구입한 아이템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아이템으로 만들어 낸 차이를 가지고 교전에서 승리해 차이를 벌려, 종국에는 승리로 이끈다. 스노우볼을 굴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기에 정호준은 박기태를 붙잡고 병사(Soldier) 먹는 법부터 가르쳤다.
맨투맨 마크로 시달렸다면 사이가 조금은 나빠졌을 수도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박기태에게는 고통을 분담해 줄 동료들이 존재했다.
“윌슨 집중하라고!!”
“밀러! 정글 몬스터는 X분까지 다 먹어야 한다니까! 그리고 만약 정글 몬스터를 먹다가도 라인에서 교전이 발생하면 라이너를 도와줘야 한다고 이야기했잖아!”
“현우 PD님도 더 집중하시죠. 미드 라이너는 맵을 보고 위나 아래로 합류도 자주 해 줘야 한다니까요! 혹시나 정글러가 상대 정글을 빼먹기 위해 움직이거나 반대로 적이 우리 정글로 들어오는 걸 막아 주기 위해 항상 주시해야 한다고요! 아까도 맵 안 봤죠?!”
CP(Creep Point)를 챙겨 먹는 훈련을 하고 있는 박기태 옆에는 ‘저것이 알고 싶다’를 담당 PD로 일하다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을 찍어 주는 촬영팀에 합류한 조현우 전 PD, 조현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방송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가진 촬영팀 소속의 올리버 윌슨, 균형 잡힌 식사를 위해 고용한 영양사 제임스 밀러가 함께했다. 정호준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함께 연습했다.
미국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동양처럼 완고하게 나누어진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조금은 수평적인 성향을 띤 경우가 많았다. 정호준 또한 본인이 해야 할 일만 다 하면 고용한 이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대해 주는 고용주였다.
한국처럼 고용주와의 관계가 불편한 환경이 아닌 데다, 박기태의 인싸력이 발동을 한 건지 박기태와는 스스럼없이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정호준이 박기태를 붙잡고 게임을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태 대회에 나간다며.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나도 껴도 될까?”
원래 게임이라는 건 남이 하는 것을 보다 보면 자기도 하고 싶다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 다들 30대 초반에 불과한지라 금방 게임에 흥미를 가졌고, 고용주인 정호준이 4명을 앉혀다 놓고 게임을 가르치며 피드백을 주는 이 이상한 광경은 그렇게 나오게 되었다.
삐리리릭~!!
3월 17일 목요일. 저녁을 먹고 한참 팀원들의 연습을 봐 주고 있던 정호준의 전화로 달갑지 않은 연락이 당도했다.
“여보세요,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입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일본의 총리다?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정호준은 일본 총리에게 전화가 걸려 올 이유도 없었고, 만약 정말 일본 총리가 전화를 건 거라면 사전에 미리 고지를 해 두는 게 예의다.
“장난 전화는 사절입니다. 끊겠…….”
그렇기에 정색하며 전화를 끊고자 했지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들려오는 하토야마 총리의 말 때문에 전화를 끊지 못했다.
-닛케이225 지수 선물과 환율 선물 계약을 맺은 회사들이 JHJ Capital의 유령회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선물 계약의 배후에 JHJ Capital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하토야마 총리의 발언에는 의심이 아닌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예상치 못한 일에 속으로는 당황했으나 대응은 빨랐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전화를 받을 형편이 아니라서요.”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이 번호로 다시 연락해 주시지요.
* * *
굳은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끊은 정호준은 PC룸에서 나와 서재로 이동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고, 유령회사를 만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을 투입했는데, 꼬리를 밟힌 건가?’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잡아뗄까?’
그냥 마냥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의 말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결코 찔러 본 게 아니란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모르겠네.’
궁리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오랜 고민할 여유는 없었기에 서재에 들어와 구비해 둔 소파에 앉은 뒤 조금 전 걸려 왔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JHJ Capital의 정호준입니다. JHJ Capital의 유령회사라는 말,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근거 없이 확정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하요야마 유시로가 전화를 받자마자 질문을 던졌지만 하토야마 유시로는 여유가 가득한 어조로 답변했다.
“총리님께서 자신 있게 말씀하신 근거가 궁금하네요.”
있는 증거조차 없애거나 있어도 왜곡했다면서 깎아내리는 나라의 총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꾹 참으며 정호준은 근거를 물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 궁금하지 않습니다. 제게 전화를 건 이유야 간단하니까요. 이번에 벌어들인 선물 수익을 일본에 재투자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재난 지원 성금을 기부해 주길 원해서잖습니까? 어쩌면 둘 다 원할 수도 있겠네요.”
일본이 그에게 요구할 건 안 봐도 훤했다.
‘역시 단기간 내에 JHJ Capital이란 거대한 성채를 일구어 낸 남자답군.’
속으로야 감탄했지만 그러한 감정을 말투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꿰뚫어 보는 정호준의 말에 경각심을 품었다.
-대단하십니다. 세간에서 괜히 JHJ, JHJ 하는 게 아니군요.
하토야마 총리는 경각심을 품었음에도 정호준을 올려치며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이미 날카로워질 때로 날카로워진 정호준에게는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대가는요?”
-대가라뇨?
“요구를 했으면 당연히 반대급부 또한 제시해 주셔야 하잖습니까? 이건 상식입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밖으로 빼지 않고 일본에 재투자해 달라는 부탁은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아니, 굳이 일본 정부가 부탁을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일본에서도 양적완화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본에 재투자할 계획을 세워 뒀었다.
하지만 아무리 투자를 할 계획을 세워 두었어도 정부가 나서서 방향을 강요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선을 넘는 행동이랄까? 결정을 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정호준 본인이 되어야 마땅했다.
“유령회사 뒤에 JHJ Capital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셨다면, JHJ Capital의 자금이 얼마나 커졌는지도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닛케이지수와 환율 선물에 투자하고 환투기에 가담해 JHJ Capital이 벌어들인 수익은 세금을 제하고 ‘약 460억 달러’. 선물 계약을 체결했던 40억 달러까지 포함하면 ‘500억 달러’가 지금 일본에 묶여 있다는 말이다.
JHJ Capital이 일본 주식을 정리하고 놔둔 돈까지 포함하면 일본에 묶인 돈은 600억 달러가 넘었다.
-재난 중에…….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정호준이 전화를 끊는 것을 막기 위해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가 정호준의 말을 끊었다면 이번에는 정호준이 하토야마 유시로 총리의 말을 끊었다. 재난이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JHJ Capital에게 도덕과 인류애 등을 따지며 세계의 비난을 받게 만들겠다는 협박을 내뱉을 게 유추되었다.
-괜찮다니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JHJ Capital이 일본의 재난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알리셔도 괜찮습니다.”
-그게 괜찮단 말입니까?
“예. 괜찮습니다. 악명도 명성이니까요.”
JHJ Capital이 유령회사를 세워 가며 자금을 쪼개 선물 계약을 진행한 건 JHJ Capital이란 이름을 듣고 세간이 시선이 쏠리게 돼 본래보다 계약 물량을 덜 체결하게 될 걸 염두한 행보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하면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계약을 정리하며 수익 창출이 끝난 상태였고, 일본 정부가 알게 된 시점에서 숨겨야 할 이유는 이미 사라진 거다.
‘걸렸으면 뻔뻔하게 나가야지.’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조심하고 다닌 거지 두렵다는 말은 아니다.
영란은행을 공격하고 일본을 공격했던 ‘리처드 소로스’나 국가의 위기를 틈타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헤지펀드)들은 악명을 쌓아도 잘 먹고 잘살고 있잖은가?
게다가 정호준의 뒤에는 미국과 20세기부터 세상을 주물렀던 로슬러 가문이 버티고 서 있다.
-진심이시군요.
정호준의 말을 듣고 진의를 읽어 낸 하토야마 총리는 따로 제시할 조건이 없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요구만 들어주신다면 총리님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말씀하시죠.
“첫 번째로 JHJ Capital이 경영 위기에 빠진 은행을 인수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외환은행 인수 후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 유니버셜 뱅크는 성적이 저조했다. 일본인들이 외국계 기업에 배타적인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유니 톡’이 없었다면 저조한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정말 처참했으리라.
-첫 번째라면 두 번째 요구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유령회사들의 배후가 우리 JHJ Capital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첫 번째 요구는 들어드릴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어렵습니다.
정보의 출처를 밝히면 이후에는 정보를 받기 어려워진다. 그렇잖은가? 돈이 아무리 좋아도 정보의 출처를 술술 부는 이에게 정보를 물어다 줄 정보원은 없다.
그런 이유로 하토야마 총리는 어떻게든 정보의 출처는 밝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정호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거 실망인데요. 총리님께서는 어떻게든 제 발을 붙드셔야잖습니까? JHJ Capital이 일본에서 돈을 빼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만.”
재앙이 닥치기 전에도 600억 달러(72조 원)가 빠져나가면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이다. 재앙 때문에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불안한 상황인데 500억 달러가 빠져나가면 정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리라.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하토야마 유시로는 손에 쥐고 있는 수화기에 힘을 빡 주고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외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