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24)
은행이란 집단을 돈을 맡기면 그 돈에 대한 이자를 받아먹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예금주는 은행에 돈을 맡기는(유치하는) 게 아니라 돈을 빌려준다고 표현해야 맞았다.
은행은 불특정 다수(예금주)로부터 저리(低利)에 돈을 빌려서 돈이 필요한 이들에게 예금주들에게 빌렸던 금리보다 높은 금리를 받고 빌려준다. 그 차익(예대 차익)으로 돈을 버는 기업집단이었다.
다시 말해 뱅크런(Bank-run), 한국적 표기인 대량예금인출사태(大量預金引出事態)는 은행에 돈을 맡긴(빌려준) 예금주들이 몰려들어 예금을 회수하는 사태를 지칭하는 단어다.
“방금 부율경저축은행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 같다면서요. 회사에서 투자자들에게 참고하라고 제공하는 재무제표만 갖고 분식회계를 정확히 잡아내는 게 가능한 겁니까? 만약 대표님과 JHJ Capital 회계팀의 분석이 틀렸다면요. 그럼 망가진 제 커리어는 누가 책임집니까?”
뱅크런을 고의적으로 일으켰다는 프레임이 씌워지면 도의적인 책임을 지라는 시선이 쏟아지리라. 전 국민의 뇌리에 부도덕한 사람이라 강하게 박히는 것, 선출직인 국회의원에게 그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은 없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돈과 관련한 일 중에서 제가 틀린 게 있었나요? 선물도 CDS 계약도, 주식 사기도 모두 맞췄습니다.
자신감이 들어찬 정호준의 확언에 강현태는 자신을 개미(서민)들의 돈을 지키는 영웅으로 만들어 준 정호준이 제공한 정보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정호준이 제공한 정보가 틀리지 않더라도 본인이 감당해야 부담이 너무 컸기에 강현태는 어떻게든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뱅크런을 일으키라는 건지도 의문이지만, 부율경저축은행의 상태가 나쁜 상황에서 뱅크런을 일으키면 파산으로 이어질 겁니다. 잠깐.”
세계의 금융 역사에서 뱅크런은 사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발생하곤 했는데, 뱅크런이 은행의 과실로 발생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 영업을 이어간 은행은 정말 드물었다. 100%에 가까운 확률로 파산했다.
그 점을 언급하다 문뜩 정호준의 의도를 파악하게 된 강현태는 자신의 눈치챈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설마, 부율경저축은행이 파산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판사 출신이시면서 경제 쪽에도 나름 빠삭하시네요? 다시 봤습니다.
정호준은 금융 쪽 종사자가 아님에도 본인의 의도를 모두 읽어 낸 강현태의 현명함을 칭찬했다. 그러나 강현태에게 정호준의 칭찬은 비아냥처럼 들렸다.
“아직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부율경저축은행 파산이 대표님의 원하시는 시나리오입니까?”
-예, 맞습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부율경저축은행의 영업을 원합니다.
“부율경저축은행이 탐이 나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부율경저축은행의 부채를 정부에서 끌어안는 조건이 아니라면 그런 빚투성이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국내 기업도 아니고 해외 자본에게 정부가 부채 완전 탕감을 약속할 리 없다. 즉 정호준의 대답은 부율경저축은행 인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대체 왜 부율경저축은행이 망하길 바라십니까?”
-시간이 지나면 부율경저축은행의 부채는 2조 아니 3조를 넘길 수도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게 한국 경제나 서민들에게 득이 되는 선택입니다.
“제 질문의 요점은 그게 아니란 걸 잘 아실 텐데요? 부율경저축은행의 부채가 2조를 넘기고 3조를 넘기는 게 대표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습니까? 미국으로 귀화해서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제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가 한국이 조금 더 나은 국가가 되길 원한다고.
정호준은 한국에서 힘들게 하루를 살아가는 빈곤층을 위해 본인의 돈을 기부할 생각은 없다. 한국에 기부를 진행하면 삶의 터전인 미국에도 똑같은 돈, 아니 더 많은 돈을 기부해야 할 테니까.
정호준이 지키려는 건 하루하루 힘들게 열심히 살면서 좀 더 잘 살고자 노력했다가 사기나 다단계에 휩쓸리는 대중의 돈, 그들의 소비력이었다.
-다단계 사기로 해외로 빠져나갈 뻔한 돈과 주가 조작에 휘말려 검은돈으로 전락했을 돈들을 지켰죠. 저는 확신합니다. 저와 의원님의 행보가 더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줄 거란 걸.
정호준은 자신이 바꾼 사건들이 대한민국 서민들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여 줄 거라 확신했다.
1,000억, 500억, 300억 단위의 주가 사기 사건들을 꾸준하게 검거하면 조 단위가 될 거고, 부율경저축은행 파산이나 장희팔 다단계 사기, 조수도 주가 조작을 합치면 7~8조 원의 피해를 막은 셈이고, 사대강 정비 축소만 해도 안 써도 될 돈을 10조 이상을 절약한 셈이니 말이다.
-의원님. 전에 말씀드렸을 겁니다. 의원님의 자산은 제가 맡아서 계속 불려 드리고 의원님의 정치 인생도 봉황 의자까지 준비해 드릴 테니, 자리나 돈에 욕심내지 말고 진짜 정도(正道)를 걷는 정치를 해 달라고.
정호준은 2008년 펀드를 해산할 때 돈을 추가로 맡기고 싶다며 달라붙었던 김명호의 요청은 뿌리쳤지만, 자신이 공을 들여 키우고 있는 강현태의 돈은 계속 맡아서 불려 주기로 했기에 정호준의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펀드는 계속 2년 단위로 펀드를 갱신한다고 했으니, 10년이면 자산이 32배나 늘어난다.’
더러운 오물이 묻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뇌물을 받아 가며 정치 자금과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보다 정호준이 돈을 불려 주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고 위험도 적다. 수익률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 * *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던 강현태는 6월 중순쯤 정호준에게 연락해 부율경저축은행을 망가트리는(?) 정호준의 플랜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정호준은 뱅크런이 일으키기 위해 어떤 행보를 걸어야 하는지도 전부 계획을 짜 주었다.
계획을 공유받은 강현태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1년 전에 부율경저축은행에 돈을 맡기라고 했던 것도 이걸 위해서였어. 정 대표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과거 18대 총선에서 부산의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강현태는 지역구 주민들과 나름의 공통점을 갖기 위해 부율경저축은행에 자신의 예금을 일부 예치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란 정호준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한 행위였다.
당시에는 정호준의 충고를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정호준의 말마따나 지역구 시민들과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한 행보로 좋아 보였고, 저축은행인지라 제1 금융권 은행보다 금리도 훨씬 높았으니까.
게다가 부율경저축은행은 2008년 당시 서프프라임 모기지론 위기로 촉발된 금융위기 탓에 저축은행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위의 권고하에 부실은행들을 인수하며 규모를 확장한, 기초자산이 탄탄한 비전 있는 은행으로 보였다.
유용 가능한 자산을 전부 입금하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2억 정도 입금하는 건 강현태에게 부담되지 않는 일이었다.
[부율경저축은행에 2억 원의 예금을 유치하는 강현태 의원!]
부율경저축은행 쪽에서도 부산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돈을 유치한다는 것은 홍보 삼아 내보내기 좋은 일이었기에 줄이 닿는 기자들을 불러다가 기사까지 냈었다.
-의원님이라면 그냥 막연하게 위험하니 돈을 빼라는 사람과 돈을 유치했다가 위기임을 파악하고 자기 돈을 뺀 뒤 경고를 날리는 사람. 어느 쪽의 말이 더 신뢰가 가십니까?
“자기 자산을 뺀 뒤에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어느 곳이든 자신의 돈이 가장 중요하다.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치켜세워 주는 사람들의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지듯, 말이란 것은 누가 뱉냐에 따라 무게감과 체감의 정도가 달라진다. 나름 서민 자산 지킴이로 유명한 강현태가 예치해 뒀던 자신의 자산을 출금하고, 입출금했던 내역을 보여 주며 분식회계로 은행이 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에 더해 JHJ가 분식회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확언했다는 내용이 밖으로 퍼지면 정호준이 바라던 대로 뱅크런은 일어나리라.
정호준은 강현태가 출연할 프로까지 미리 지정해 주는 치밀함을 보였다.
2009년 7월 중순 강현태는 SBC 시사고발 프로그램 ‘저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하게 되었다.
“뱅크런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에서 압박이 들어올 텐데, 이런 내용을 방송에 내보내도 괜찮습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정 대표님 덕에 미국 갈 일이 생겼거든요. 시사고발 프로그램답게 PD답게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하고 갈 수 있어서 저는 좋습니다. 그리고 끝나면 사인 하나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의원님과 만나서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기념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저것이 알고 싶다’ 조우진 PD는 아이의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정호준 프로젝트에 지원해 합격했다. 아이들의 일상을 찍는 건 정호준의 욕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으나 어쩌다 보니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강현태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예측하고 계획을 짜는 거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고, 될 놈은 된다는 말처럼 의도치 않았으나 우연히 이해관계가 일치한 거였음에도, 강현태는 이조차 정호준의 치밀함이라 여겼다.
“시청률은 잘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서민자산 지킴이 강현태 의원이 출연한다고 광고를 내보낼 겁니다.”
강현태는 방송을 촬영하며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본인의 염려를 전했지만 PD는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강현태는 정호준이 미리 짜 준 시나리오대로 지역구 구민들과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저축은행에 돈을 예치했다가 재무제표, 대차대조표가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들어,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정호준을 직접 찾아가 재무제표와 대차대조표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고, 그 증거 자료들을 촬영팀에게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돌아갈 때 정호준에게 연락해 지금의 내용이 진실임을, 부율경저축은행이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방송을 탔다.
PD가 공언한 대로 시청률은 ‘저것이 알고 싶다’의 평균 시청률보다 약 3.5%가 높게 나왔다. 토요일 밤늦게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특성답게 당장의 파급력은 낮았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서민자산 지킴이 강현태 의원, 부율경저축은행의 분식회계 의심!]
[JHJ Capital의 회계팀이 확인했다?]
[세계 최고 부자 정호준의 공언, 부실을 숨기기 위해 분식회계를 저지른 게 확실하다.]
공중파 뉴스는 ‘저것이 알고 싶다’가 다룬 내용을 송출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인터넷 신문사들은 하나같이 ‘저것이 알고 싶다’가 다룬 내용들을 앞다투어 기사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