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22)
자신의 본진인 시카고로 돌아온 정호준은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니, 정확히는 일상으로 복귀한 후 미리 계획해 둔 특별한 일상을 위해 트리븐 컴퍼니 산하 케이블 방송사 카메라맨들에게 한 가지 공고를 냈다.
-전속 카메라맨 3명 구함. 장비 JHJ Capital 제공. 4년 계약 총액 600만 달러. 연봉 100만 달러 지급. 200만 달러는 계약 완수 후 보너스. 중도 퇴직 시 보너스를 받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명시.
정호준이 방송사에 던진 제안에는 모든 조건이 담겨 있었다. 북미 대륙에서 한국의 설, 추석처럼 여기는 안식일이나 크리스마스를 제외하면 교대로 휴가를 가야 하고 업무 시간 동안 경호팀의 통제를 잘 따라 줘야 할 것을 사전에 알렸다. 영상을 얼마나 잘 찍는지, 영상 편집 기술이 뛰어날수록 경쟁력이 있으리란 것 또한 명시해 두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폐쇄적인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만큼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처럼 높은 연봉을 제시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그만큼 메리트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제안은 동시 송출을 진행하며 인연을 맺은 한국 방송사들에도 전달했다.
정호준이 이런, 누군가는 쓸데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몸을 뒤집는 것도 힘들어서 낑낑대던 아이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넘어 걸어 다니기 시작하자 정호준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데, 2~3년 후는 어떻겠어?’
사람들의 십의 단위가 바뀔 때마다 삶의 체감 속도가 변한다고 하는데, 십의 단위가 아니어도 십의 단위를 나누는 초반, 중반, 후반으로 엮는 그 세월 또한 체감되는 정도가 달랐다. 2년 후면 20대 중반을 지나 후반에 들어설 시기였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데, 아이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두면 어떨까?’
1회차 때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처럼 정호준은 아이들의 일상과 성장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시카고로 돌아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아리아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유로,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영상을 찍는 카메라팀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아리아는 어떻게 생각해요?”
“확실히 사진과 영상은 오래 남긴 하죠.”
“요즘은 데이터 시대잖아요? 컴퓨터에도 따로 영상을 저장해 둘 생각이에요.”
정호준은 외장 하드와 내장 하드에 파일을 몇 번이나 복사해 놓을 계획을 짰다.
“좋아요. 재미있겠네요. 의미도 있고. 이거 카메라에 예쁘게 나오려면 따로 메이크업팀과 스타일리스트팀도 준비해 둬야겠네요.”
아리아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 같다며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메이크업팀과 스타일리스트팀이 굳이 필요할까요? 이런 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건데.”
메이크업팀과 스타일리스트들을 데려다 놓으면 아리아 말고 자신도 꾸미게 될 것임을,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남자의 본능이 귀신같이 인지해 냈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설파하며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 했지만, 저항은 통하지 않았다.
“영상으로 평생 남는 건데, 엄마가 20대 때는 이렇게 예뻤었다는 걸 남겨 놔야죠. 아! 그러고 보면 호준도 좀 꾸밀 필요가 있겠네요, 엄마 아빠가 이렇게 예쁘고 잘난 한 쌍이었음을 제대로 남겨 둬야죠.”
정호준의 발버둥은 예쁘고 싶은 여자의 욕구, 내 남자가 추레하게 나오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의지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다.
‘하, 괜히 사서 귀찮음을 만든 꼴이네!’
귀찮음이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것을 확인한 정호준은 속으로 자신이 괜한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 * *
아리아의 허락을 받고 아이들의 성장을 영상물로 남기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정호준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지원서(이력서) 세례에 작업장을 통제하다 말고, 인사과 직원들과 비서들, 영상 전문가까지 고용해서 옥석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아, 뭐가 이렇게 많아. 미국은 자유를 중요시하는 나라 아니었나?’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정호준의 이메일에 지원서를 넣은 건 트리븐 컴퍼니 산하의 케이블 방송사만이 아니었다. 평균 소득이 한국보다 약 1.5배 이상 높은 미국인들에게도 600만 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렇게 잘나가고 있는 JHJ가 임금을 체납할 리 없잖아?’
자유를 제약당해도 그 대가가 넘치는 수익이라면 미국인들 또한 얼마든지 자유를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경기가 불경기인 상황에는 더더욱 말이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보다 약 1.5배의 임금을 받는 미국조차 그럴 진데, 그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 생활하는 대한민국은 오죽하겠는가?
환율이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주머니로 들어올 액수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최소 70억은 보장되는 이 프로젝트에, 과장 하나 없이 스타 PD와 그 PD의 팀을 제외한 모든 카메라맨과 PD들이 저마다 영상을 첨부해 자신을 써달라고 어필했다.
지원서(이력서)를 넣은 이들 중에는 드라마 감독이나 영화감독조차 존재했다.
‘4년만 희생하면 휘둘리지 않고 내 영화를 만들 수 있어!’
‘딱 4년만 희생하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다.’
‘건물주가 되고 강남에 집을 살 내 미래를 위해서 그깟 4년쯤이야.’
방송국에서도 숙직실이나 촬영장 등에서 인생이 갈리고 있는 건 매한가지다. 어차피 갈리는 인생이라면 높은 급여를 지급하는 곳에서 갈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JHJ Capital 이메일로 지원서를 제출한 이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그렇게 정호준이 사람까지 고용해 가며 지원서와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 백악관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독과점을 염려해 추궁하기 위해 부른 게 분명한 초대였지만 지원서의 늪에 파묻혀 있던 정호준은 백악관의 초대가 구원의 동아줄로 느껴졌다.
“대표님, 이 많은 지원서들은 어떡하고요?”
“여러분이 좀만 더 고생해 주세요. 백악관에서 부르는데, 지원서를 확인할 게 많아서 못 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호준은 정말 가기 싫다는, 미안하다는 표정 연기를 했으나 남아 있어야 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정호준의 연기를 간파했다.
“대표님!! 대표님!!”
“하멜 비서!!”
구원의 동아줄을 잡고 빠져나가는 정호준과 비서들을 인사과 직원들과 파트타임 잡으로 고용한 이들이 붙잡았지만, 정호준과 비서들은 그 외침을 무시한 채 전용기를 준비시켰다.
* * *
정호준과 비서들은 지루한 작업을 이어 가는 게 싫어 백악관행을 즐거워했지만, 막상 전용기에 몸을 실은 뒤에는 다시 진지해졌다. 전용기에는 전략팀 직원들도 탑승해서 백악관이 취할 행보를 몇 가지로 나누어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래도 다행히 옛날처럼 강제로 해산시킬 가능성은 낮네요.”
“미국 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 우리 JHJ에 기회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낮은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지만 전례를 따지며 실력행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낮은 가능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충고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리하가 반독점법을 발휘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그땐 전력으로 싸울 겁니다. 장인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건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역량을 제대로 계산해서 플랜을 세워 두세요.”
“예, 알겠습니다!”
도청을 우려해 몇 번이고 검사를 진행한 전용기 안에서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을 전달받은 정호준은 준비된 차량을 타고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 * *
나름 친분이 있어서인지, 잦은 만남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서인지 오리하와의 만남은 항상 늦은 밤에 이뤄졌다.
정호준은 백악관 수행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오리하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정호준은 넓은 집무실 한쪽에 위치한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오리하를 확인했다.
“오사마 반리덴을 사살하는 데 성공하셨더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
정호준의 축하 인사에 오리하는 미리 준비해 둔 잔에 술을 따라 주며 겸양의 대사를 읊었다.
“정 대표가 공유해 준 정보 덕분이죠.”
“제가 제공한 정보는 그저 그 타이밍을 조금 앞당긴 것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아니었어도 CIA는 반리덴의 행적을 찾아냈을 겁니다.”
오리하가 그랬던 것처럼 정호준도 겸양을 내뱉었다.
“그 몇 년을 일찍 앞당긴 게 정말 큰 거죠. 그 몇 년 동안 우리 미국이 흘릴 피와 군대가 사용할 막대한 재정을 생각하면, 정 대표와 정보를 전달해 준 친구에게 메달오브아너를 수여해도 모자랍니다.”
“메달오브아너라뇨, 과합니다!”
최고 훈장을 수여해 줄 수 있다는 뜻을 밝히는 오리하의 말에 정호준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대통령님과 미국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입니다. 사실 이렇게 백악관에 자주 오는 것도 제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정호준에게는 훈장 수여로 받게 될 명예와 혜택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메달오브아너 수여로 반리덴 사살에 대한 공이 정호준 쪽으로 돌려지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까지 정호준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에 추가하는 꼴이 될 뿐이다.
“그런가요? 그 기억해 준다는 말이 내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지 정 대표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부담이라뇨?”
“알아서 챙겨 달라는 말로 들립니다.”
직접 대놓고 요구하는 것보다 이처럼 알아서 챙겨 달라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오리하의 말에 정호준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호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오리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악관과 민주당은 BNSF와 NS의 합병을 묵인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어차피 묵인해 줄 거면서 굳이 백악관까지는 왜 불렀냐는 뜻이 담긴 정호준의 되물음에 오리하는 선언했다.
“이걸로 정 대표와 나, 민주당 사이에 빚은 없는 겁니다. 그리고 민주당에서 다음 백악관의 주인을 배출했을 때도 철도회사를 그냥 둘지는 장담해 줄 수 없습니다.”
오리하의 선언에 정호준은 혀를 찼다.
지금은 놔두지만 나중에 큰 문제로 부상했을 때 편을 들어줄 거란 착각은 하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유통기한이 있는 묵인이라.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건가?’
정호준은 거대 로펌과 친하게 지내며 훗날을 준비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은 오리하가 듣고 싶은 말을 입에 담았다.
“독과점 기업이 행패를 부릴 거란 건 정치인들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크리테리온 오일이 찢어진 후 유가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기름을 집 앞까지 배달해 주던 서비스마저 사라졌잖습니까? 크리테리온 오일이 저렴한 값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처럼 JHJ도 선을 넘지 않겠습니다.”
백악관 미팅으로 미국 최고 권력자(?)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