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회귀자의 투자재벌회고록 (215)
오리하가 침음성을 내뱉은 뒤에도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몇 번 경험했기에 정호준은 오리하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다만 기다림이 끝에 듣게 된 답은, 결국에는 정호준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빅3 파산 때와는 달랐다.
“정 대표가 우리 미국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를 도와주려 한다는 것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 대표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정치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이득이란 판단을 내리고 빅3 파산을 결단한 릭 오리하는 정호준이 판단하기에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왜지?’
오리하의 대답을 들은 정호준은 의문을 품게 되었지만 자신을 도와주려고 노력한 정호준에 대한 예의라는 듯 오리하는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다.
“이라크는 이미 손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수라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대답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난 오리하는 집무실 책상으로 이동해 서류 뭉텅이를 들고 와 정호준에게 보여 주었고, 이게 뭐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에 읽어 보라고 손짓했다.
‘이거 군부 보안문서인데, 외부인인 내가 읽어도 되는 건가?’
법적인 요소들이 걸려 잠깐 멈칫했지만.
‘모르겠다, 오리하가 읽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본인이 책임지겠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정호준은 이내 문서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한 장 한 장 문서를 넘겼다. 문서에 적혀 있는 상황들은 정호준이 본인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한심스러웠다. 정호준은 고개를 들어 오리하를 바라봤다.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란 생각이 담긴 시선이었다.
정호준의 시선을 받은 오리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서류를 읽은 정호준은 늦었다고 말한 오리하의 말을 이해했다.
‘미친놈들.’
정호준은 차마 입 밖으로 욕을 내뱉지 않았지만 오리하는 달랐다.
“패권을 지닌 미국 정부 관계자로 패권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최소한 일은 똑바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오콘 새끼들은 그냥 똥덩어리야!!”
오리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툭툭 치며 뉴먼 정부 시절 네오콘 성향을 가진 걸로 유명했던 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싸 집어 욕했다.
* * *
종교는 같은 신을 모셔도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모습을 달리한다.
가톨릭뿐이던 신앙은 국가 간의 이해관계나 믿음의 방향, 교리 등에 따라 갈려 영국 성공회, 러시아 정교회, 신교도(개신교)로 나뉘었고, 개신교 또한 감리교와 장로회 등 교회가 운영되는 시스템과 기득권의 이익에 맞춰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이단을 죽여라!!”
이러한 체제가 완전하게 확립되기 전까지 유럽은 종교를 이유로 종종 전쟁을 벌여 왔는데, 이슬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같은 신을 믿으면서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믿음 좀 가져 보자!!”
신대륙으로 넘어간 이들 중 일부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을 찾았다고 하니, 미국에 신앙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이유 또한 유럽이 종교를 이유로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심심하면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한국인 포함 서방세계는 이슬람교에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슬람의 교리 자체는 평화를 위한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마적이 들끓고, 등 돌리면 칼을 꽂는 일이 허다한 무법천지 중동 지역을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사용된 게 이슬람교라는 종교였고, 실제로 이슬람이 중동 전역에 퍼진 후에는 그러한 경향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학계의 연구 또한 존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난무하게 됐냐고? 이슬람교 또한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왕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종교 최고 권위자들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16세기와 17세기에 종파를 이유로 피를 흘리며 현재에 이르렀다면, 이슬람은 20세기 말. 21세기에 들어선 현재 기독교가 과거 벌였던 과정들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거였다.
‘종교를 잔혹하게 변모시키는 건 언제나 인간의 욕심이네.’
이슬람교가 지금에 와서 이런 피비린내 나는 종파 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이제야 좀 살 만해졌기 때문이다.
석유가 나기 전, 더 정확히는 석유의 활용 방법을 모르는 근현대까지 중동 지역과 사우디아라비아 영토는 그저 척박한 고원이나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랬던 중동에 석유가 풍부하단 이유로 20세기부터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고, 자본이 투자되니 조금씩 살 만해진 거다.
‘먹고살 만해지면 그때부터 욕심이 생기는 거지.’
두 번째 이유는 중동 지역을 지배하던 큰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세시대부터 중동은 오스만제국과 사파비제국이 영토를 나눠 먹는 구도로 흘러갔다. 유럽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제국과 오스만제국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느낌이 있지만 어쨌든 강한 영향력을 행상했던 이란의 전신 사파비제국의 힘이 강대할 때는 종파끼리의 큰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라의 명맥을 유지했던 오스만제국과 달리 이란의 전신인 사파비제국은 여러 번 그 이름이 바뀌었다. 사파비제국이 망하고 아프샤르 제국이 들어섰으며, 아프샤르 제국 또한 얼마 못 가 왕의 권좌를 카자르 왕조에 빼앗겼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왕조와 국명이 바뀌었지만.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껍데기를 바꿔 써도 그 영토 안에 살아가는 국민들은 내일을 살아간다. 사파비제국 때부터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슬람교, 더 정확히는 시아파가 국민들의 삶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사실 망하든 말든 이란의 전신국가들이 종파 갈등에 휩싸인 일은 없었다.
그저 종파끼리의 갈등이라기보단 시아파를 믿는 사파비제국과 그 후신들,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오스만제국 간의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문제의 발단은 오스만제국의 패망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이슬람 수니파가 권력의 중심에 있긴 했어도, 밀레트 제도라는 특이한 행정제도 때문에 이슬람교를 국교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모자람이 있었다.
밀레트 제도는 오스만제국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문화와 종교, 정체성을 존중해 각자의 종교 공동체가 맡아 자치하게 하는 나름 앞서가는 제도였다. 밀레트 제도를 통해 다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공존시켰던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편에 섰다가 패망하게 되었고, 이때 망한 오스만제국의 시체를 잡아먹으며 새로운 나라들이 탄생했다.
그게 바로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이 국가들은, 정확히는 국가의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자들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던 오스만제국과 달리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다가 이란의 전신국들의 영토가 되기를 반복했던 역사가 있는 나라. 이라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걸프전쟁. 작전부터 보급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세계가 미국의 힘을 깨닫게 된 전쟁이다.
그리고 이라크는 미국이 벌인 완벽했던 전쟁에 희생당한(?) 당사자였다.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걸프전을 치렀고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는 유엔으로부터 제재까지 받았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라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전쟁으로 모자라 이라크에 쳐들어온 미군에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는 나라였다.
게릴라들이 종종 날뛰기는 했으나 전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되었고, 뉴먼 정부는 종교는 전혀 고려사항에 넣지도 않은 채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미국에 친화적인 친미 정부를 세웠다.
이 선택이 훗날 이라크 내전이 일어나게 된 발단이었다.
이라크는 국민 9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다. 하지만 주변국 시리아나 터키,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이라크는 시아파 신자가 수니파 신자보다 많은 나라였다. 비율로 따지면 국민 65%가 시아파를 믿었고, 35%만이 수니파를 믿었다.
시아파 신자가 수니파 신자의 2배 조금 못 미친달까? 문제는 권력을 잡은 지도부가 35%에 해당하는 수니파라는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지도부와 달리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수니파 신자 출신 지도부는 시아파를 박해했고, 전선을 확대해 후세인 정부를 무너트린 미국에 의해 세워진 정부 인사 대다수는 시아파 출신이었다.
“네오콘들은 정치 보복, 아니 종교 보복은 아예 고려사항에 넣지도 않은 겁니까?”
정치인조차 당했으면 갚아주는 게 당연한 데 광신을 이끌어내는 종교는 오죽하겠는가? 미국이 괴뢰정부로 세운 시아파는 미국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망가진 경제나 정국을 수습하는 것보다 수니파에 대한 박해를 더 중요시하며 보복에 나섰다.
“그렇다네.”
정호준의 질문에 오리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으며 단답했다.
“병신들.”
오리하의 대답을 들은 정호준은 저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을 내뱉었다.
‘최소한의 종교, 정치 역학관계는 계산에 넣고 허수아비 정부를 세워도 세워야지, 진짜 꼴리는 대로 사고만 치고 다닌 거네.’
정호준이 느끼기에 미국의 네오콘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군부랑 크게 다를 게 없는 사고만 칠 줄 아는 이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 게릴라들을 족치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집중하는 동안 시아파의 수니파 박해는 수년 동안 진행되었다. 이제 와 오리하가 정권을 잡은 시아파 인사들을 쫓아낸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였다. 시아파를 쫓아내고 다시 수니파 인사들로 정부를 구성해 봐야 똑같이 보복을 가할 뿐이다. 피는 반복되는 거잖나.
어차피 반복될 피라면 뉴먼 정부가 세웠고, 국민 65%가 믿고 있는 시아파를 추구하는 현 정부를 밀어주는 게 나았다.
‘그래서 이라크가 반쯤 이란의 괴뢰로 전락한다 해도 말이지.’
“진짜 갑갑하네요.”
“반리덴을 잡고 이를 명분 삼아 빠져 봐야지. 그게 우리 미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걸세. 내가 대선 후보 때 이야기해 줬던 대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빠질 생각이네.”
탈레반과의 전쟁을 끝까지 이어 가지 않겠다는 오리하의 선택에 정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중동 진흙탕에서 벗어나서 중국을 보셔야 합니다. 중국의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어 주지 않으면, 중국은 10년 후쯤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겁니다.”
미국이 중동에서 삽질하고, 북한의 핵 개발에 시선이 쏠린 사이, 중국은 견제 없이 성장했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세이긴 하나 2010년 말에 들어서는 미국의 패권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다.
정호준은 중국이 라이벌로 부상하며 패악을 끼칠 미래를 늦추기 위해 오리하에게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어넣었다.